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가 짜증이 가득하다. 기본 매뉴얼대로 설명을 하고 안내를 했는데 갑자기 화를 낸다. 나도 사람인지라 내 감정 조절이 살짝 무너지며 나도 모르게 말끝이 조금 날선채로 답을 해버렸다. 그 순간부터 어긋나기 시작했다.
“왜 이렇게 비싸? 뭐 대단한 거라고?”
“고객님 비용에 대한 이야기는 제가 뭐라고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만일 비용에 관련된 내용은 해지부서에서 상담가능하니 접수해 드릴 수 있습니다.. 상담 한번 받아보시겠습니까?”
이미 정해진 비용에 대한 투정 같은 불만을 다스리기엔 역부족인 나는 해지부서 상담으로 비용 절감의 기회라도 얻을 수 있길 바라는 마음에서 안내를 했다.
그런데 그 말에 발끈한다.
“뭐? 나보고 해지를 하라고? 와 웃긴다.. 고객보고 해지를 하라네..”
“아니 고객님 해지하시라는 게 아니구요.. 제가 해지하시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비용에 관련된 내용은 해지부서에서 상담이 가능하니..”
“그러니까 해지하라는 말이 잖아~!!
“고객님 제가 드린 말씀은 해지부서 통화해서 상담받으시라는 이야기구요.. 해지는 고객님이 선택하시는 거지 제가 해지를 하라 마라 할 수 있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반말에 억지를 부리는 탓에 내 목소리는 평정심을 잃고 조금씩 커지고 있었다.
사무실 분위기는 갑자기 조용해졌고 내 목소리는 제법 커져 있었다고 옆자리 동료가 이야기해 줘 알았다.
“분명히 해지하라고 했잖아~ 왜 말을 바꾸지?? 상사 바꿔~ 아니 상사보구 당신 통화내용 듣고 바로 전화하라고 해~!! 뭐 이런 것들이 다 있어!!” 뚜뚜뚜뚜뚜……
그렇게 끊어진 전화.. 당황스러운 눈빛.. 그리고 울그락불그락한 내 얼굴…
파트장은 무슨 일이냐며 놀란 눈으로 내게 왔다.
“상사 보고 통화내용 듣고 전화하라고는 그냥 끊어버리네요.”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씩씩거리는 나에게 잠시 바람 쐬고 오라고 등을 토닥이며 작게 한마디 한다.
“그래도 그렇게 화를 내면 곤란하지..”
지난 11월에 있었던 일이다. 그날의 고객은 상사와의 통화에서도 말이 안 통했고 더욱더 높은 사람을 바꾸라며 클레임을 걸었다. 그런 고객은 ‘진상고객’으로 처리되었지만, 나에겐 벌점이 부과되었고 인센티브도 깎였다.
차가운 겨울바람보다 감정을 조절하지 못하고 커졌던 내 목소리가 더 싫던 겨울이었다. 마음이 지치기도 해서 그만 다녀야 하는가, 아니면 다른 회사를 알아봐야 하나 라며 조금 휘청거리기도 했더랬다. 하지만 피하지 않기로 했고 방법을 찾아보다가 생각해 낸 것이 목소리를 한 톤만 다운시켜 보는 것이었다. 밝은 목소리여야 한다는 의무감에 밝게 말하겠다는 의도가 오히려 조금 큰 목소리로 연결되고 큰 목소리엔 나의 감정이 드러나고야 만다는 사실을 파악했다. 조금 낮은 톤의 밝은 목소리로 차분하게 말하는 것으로 상대가 내 감정을 흔들어도 휘둘리지 말고 좀 더 작은 목소리로 내 감정을 억제하도록 말이다. 그들은 원래 그랬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니 내가 나를 단련하는 방법밖에는 없겠다 싶었다.
그 후로 나는 더 이상 벌점을 받지 않는다. 여전히 무례하고 말도 안 통하는 사람들의 전화는 계속되지만 그들의 무례함 덕분에 나는 단련되고 있다. 그래서 비슷한 상황이 오면 오히려 더 작은 목소리로 더 차분하게 이야기를 하려고 노력한다. 내 귀에 들리는 내 목소리의 톤을 의식하면서 말이다. 그들이 달라지지 않는다면 내가 달라지면 되는 것을 배웠다고 해야 할까. 옆에 있는 동료도 “언니 요즘 목소리 많이 차분해졌어요.” 라며 씩~ 웃는다.
살면서 반복되어 마주하는 상황들이나 책을 마주하는 것도 비슷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비슷한 경우에 놓여도 내가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대응은 달라지기 마련이다. 책도 처음 읽었을 때는 어렵고 힘들었더라도 다시 읽게 되면 처음과는 다르게 이런 내용이 있었나 하며 놀라는 부분을 발견하기도 하고, 감흥이 커서 밑줄을 제대로 그어놓았던 부분이 그저 스르륵 넘어가게 되기도 했던 기억들이 있다.
어떤 상황에 처하더라도 그 일을 통해 얻는 게 생긴다면 나는 살아낸 것이고 겪어낸 것이며 변할 수 있는 계기를 얻는 것이리라. 이렇듯 책도 다양하게 만나 보려고 한다.
삶이 선택할 수 없고 그래서 받아들이고 살아내다 보면 고된 삶을 통해 성장해 있는 나를 만나게 되는 것처럼, 책도 역시 나에게 전해주는 그 무엇인가가 단 한 줄이라도 반드시 있을 것을 알기에 오늘도 나는 분야에 상관없이 다양한 책들을 마주하려 한다. 나의 감각을 최대한 열고 주파수를 맞춰가는 과정은 바로 내가 성장하는 과정과 다르지 않음을 믿는 시간들이니까.
<글쓰기의 최전선> 중에서
도저히 감각의 주파수가 안 맞던 시가 계절이 바뀌고 나면 읽힐 때가 있다. 매번 읽을 때마다 새 책같이 새롭게 다가온다. 그사이 나는 살았고 뭐라도 겪었고 변했다는 이야기다.
그 해 여름에 나를 밀어내던 시가 이듬해 겨울에 조금씩 스며들고 문장들이 마음에 감겨오면 그 기쁨은 무척 크다. P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