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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종규 Oct 30. 2023

시작과 끝에 관한 사색 9

무에 관하여 1

무에서 나오는 것은 오직 무다. -월리엄 셰익스피어. ‘리어왕(1606)’ 인간은 그를 탄생시킨 무와 그를 삼킨 무한을 목격하기에는 부족한 존재다.?-블레즈 파스칼, ‘팡세(1670)’


논문에서 다루게 될 견해에 따라.? 우주의 절대정지 [상태]를 없애버림으로써, '발광성 에테르'가 불필요하다는 사실이 증명될 것이다.-알베르트 아인슈타인, ’ 움직이는 물체의 전기 동역학에 관하여(1905)‘


우리가 존재하는 이 오묘하고 경이로운 우주를 헤아리기 위해 여러 세대에 걸쳐 고군분투했지만, 무라는 개념만 큼 풍부한 아이디어는 거의 없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장한 대로, 무언가를 알기 위해서는 무언가가 아닌 것을 알아야만 한다. 이 고대 그리스 학자는 물질을 이해하려면 물질의 부재 혹은 '진공'을 이해해야 한다고 말했 다. 역시나, 기원전 5세기의 고대 그리스 철학자 레우키포스도 진공이 없으면물질이 들어갈 비어 있는 공간도 없을 것이므로, 움직임 또한 존재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불교에서는  자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공, 즉 자아가 없는 ‘비어 있는' 상태를 먼저 이해해야만 한다.  또한, 사회의 문명화 효과에 대해 이해하려면 사회로부터 동 떨어진 인간들의 행동 양식에 대해 알아야만 한다. 윌리엄 골딩이 소설 ’ 파리 대왕‘에서 강렬하게 묘사한 것처럼 말이다.


나도 아리스토텔레스의 방식에 따라 무가 아닌 것을이야기해 보겠다. 특별한 것이나 절대적인 상태는 무가 아니다. 무의 의미는 상황에 따라 다르다. 인생의 관점에서 보면 무란 죽음을 의미한다. 물리학자에게는 물질과 에너지가 완전히 말소한 상태, 또는 시간과 공간마저 사라진 상태를 말한다. 연인들에게는 사랑하는 이가 없는 것을 뜻할 것이며, 부모에게는 아이의 부재를 의미할 것이다. 파스칼과 같은 신학자나 철학자에게 무란 한없이 작은 것인 동시에 시간도 공간도 없는 오직 신만이 아는 영역을 뜻한다.(55-57 쪽)

희랍의 고대 철학자 파르메니데스는 “왜 도대체 존재이며 무가 아닌가? “라는 질문으로 엘레아학파를 창시했다. 이와 반대로 선불교의 화두집 ‘벽암록’에서 가장 유명한 화두는 ‘무’에 관한 것이다.


근대 독일 관념론 철학의 완성자 헤겔은  논리학(존재론)에서 ‘순수유와 순수무는 동일하다’고 이야기한다. 주어에 아무 내용이나 속성이 없는 한, 유와 무는 동일하다. 왜냐하면 존재란 말도 무란 말도 그 자체로는 추상적인 기호에 지나지 않는다.


노자는 ’ 도덕경‘에서 無名天地之始(무명천지지시) :무는 천지의 시작을 일컫고, 有名萬物之母(유명만물지모) : 유는 만물의 어머니를 일컫는다 “라 말한다. 도대체 그는 왜 이런 표현을 썼을까? 그에게 무와 무위는 유와 유위보다 더 근원적이다.


서양은 존재의 경이에서 학문을 시작했고, 동양은 무에 대한 사색에서 깨달음을 추구했다. 그러나 유와 무는 각자를 이해하기 위해 서로를 필요로 한다. 둘은 세계를 인식하기 위해 호모 사피엔스가 고안한

상보적이자, 상대적인 개념장치이다.

다양한 상황에 따라 무의 의미가 달라지긴 하지만, 나는 어쩌면 당연한 사실 하나는 강조하고 싶다. 무의 모든 의미 안에는 우리가 아는 사물이나 상태에 대한 대조적 개념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즉, 무는 상대적인 개님이다. 우리는 어떤 물체나, 생각, 또는 우리 존재의 상태와 관련되어 있어야만 그에 관한 생각을 할 수 있다. 이들테면, 슬픔 그 자체는 의미가 없다. 기쁨과 연관되어야만 의미가 생긴다.


자연에서는 나란한 조건에 놓인 차이가 있어야만 어떤 일이 일어난다. 비행기의 경우 양쪽 날개의 위아래로 기압의 차이가 있어야만 떠 있을 수 있다. 기압 차가 없어진다면 기압이 얼마이건 간에 그 비행기는날 수 없다. 증기 엔진은 열을 내는 보일러와 주변 장치 간의 온도 차에 의해 구동된다. 만약 온도가 같아지면 온도 값에 상관없이 그 엔진은 멈추고 말 것이다. 저 사람은 키가 큰가, 무거운가, 아니면 똑똑한가? 무엇에 비해 키가 큰가? 무엇과 비교해 똑똑한가? 절대적 가치는 의미가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무 또한 무언가와 비교했을 때에만 의미가 생긴다.


물리학자들은 에너지양이 가장 낮은 우주 영역을 '진공 vacuum'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그 진공조차 에너지장에서 벗어날 수 없다. 에너지장은 필연적으로 온 우주 공간에 퍼져 있다. 게다가 에너지장들은 계속해서 떨리기 때문에, 계속해서 물질을 생성해 낸다. 매우 짧은 순간 존재 하는 물질이라도 말이다. 따라서 현대물리학에서 '진공'은 고대 그리스 학자들이 말한 진공과 다르다. 그들이 말한 진공은 존재하지 않는다.


아무리 비어 있는 공간처럼 보일지라도, 우주 공간을 일일이 작게 나누어 살펴보면 그곳은 순식간에 나타났다 사라지는 아원자 크기의 입자들과 요동치는 에너지장들의 정신없는 곡예 현장인 것이다. 따라서 물리적인 기준에서 보면 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59-60 쪽)

물리학자들이 이해한 무란 개념은 마치 불교의 핵심경전 중 하나인 ‘반야심경’에 나오는 구절을 연상시킨다. “시제법공상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是諸法空相 不生不滅 不垢不淨 不增不減)“ 즉 이 모든 존재가 공하다는 인식 하에서 이 규정할 수 없는 존재(무)의 근원은 생멸도, 구정도, 증감도 없다는 것이다.


실제로 현대 물리학자의 관점에서 물질과 에너지가 완전히 말소된 상태는 불가능하다. 열역학의 제1법칙은 에너지 보존의 법칙이다. 이는 질량보존의 법칙과 결합하여, 아인슈타인의 질량-에너지 보존 법칙으로 수정 보완되었다.


어쨌든 우리의 현상계는 생멸이 분명히 존재하지만 이 생멸은 일종의 에너지의 변환 과정이지 무화(無化)로 가는 것은 아니다.  ‘성경’에도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창세기‬ ‭3‬:‭19‬ 란 말 역시 우리의 존재가 없어진다는 뜻은 아니다.


히브리인이 지내는 제사 중 번제에서 다 타버린 제물의 재는 성막의 동쪽에 버린다. 동쪽의 계시적 의미는 새로운 창조의 가능성이다. 그러므로 삶의 끝은 동양이던 서양이던 허무가 아니다. 하지만 이 책은 물리학적 관점에서 무를 보는 시각을 이야기한다. 우리는 현대 물리학의 세계관으로 한 걸음 더 들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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