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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종규 Oct 18. 2023

시나리오 어떻게 살 것인가? 5

이야기의 문제점들 1

이야기의 쇠락


상상해 보라. 이 지구상의 어느 하루 동안 이야기 책의 책장들은 넘어가고 연극들이 공연되며, 영화가 상영되고 텔레비전 연속극과 코미디들은 끊임없이 흐르고 신문과 방송 뉴스들은 스물네 시간 쉬지 않고 계속되며, 침대에 든 아이들에게는 잠자리의 이야기가, 술집에서는 온갖 허풍이, 마주한 뒷담들에서는 소문이 끊이지 않고 이어진다. 이야기를 향한 인간의 욕망은 채워질 줄 모른다.


이야기는 우리가 가진 가장 다산성의 예술 형식일 뿐만 아니라 우리가 깨어 있는 동안 수행하는 일, 놀이, 식사, 운동 등 모든 활동에 필적한 만한 비중을 가지는 일상 활동이다. 우리는 잠자는 시간만큼이나 오랜동안에 걸쳐 이야기를 말하고 또 듣는다. 왜일까? 도대체 왜 우리는 우리 인생의 그렇게도 많은 부분을 이야기들 속에서 보내는 걸까? 왜냐하면 비평가 케네스 버크가  말한 대로 ‘이야기는 우리 삶의 도구’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오래전 「윤리학」에서 제기했지만 아직도 새삼스러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으면서 하루하루를 보낸다. 인간은 어떻게 자신의 인생을 살아야 할 것인가? 만약에 우리가 어떤 모범과 의미를 찾으려면, 삶은 마치 스스로 대상을 지각하고 반응하는 통일적 구조물처럼 가볍게 튀어 오른다. 우리가 온갖 노력을 다함에도 수시로 우리들의 인생을 휘몰아가고, 바깥세상에서 일어나는 중대한 사건들은 아예 우리들의 조종 능력 바깥에 머물러 있다.


전통적으로 인류는 서로에 관한 내밀한 통찰력을 통해 결합하여 생명력 있는 의미를 만들어내는 네 가지의 지혜들, 즉 철학, 과학, 종교, 예술로부터 아리스토텔레스가 제기한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아왔다. 그러나 오늘날 시험에 통과하려는 목적 없이도 헤겔이며 칸트를 읽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한때 가장 위대한 설명자였던 과학은 복잡함과 당혹함으로 삶의 참모습을 왜곡시키고 있다.


냉소를 머금지 않고서 경제학자나 사회학자, 정치가들의 말을 들어줄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는가? 종교는 많은 이들에게 위선을 가리기 위한 공허한 의식이 되고 말았다. 전통적인 이념들에 대한 믿음이 사라져 가면서 우리들은 아직도 여전히 우리가 믿고 있는 것을 향해 돌아서게 된다. 이야기의 예술이 바로 그것이다.(21-23 쪽)

인간은 다른 동물과 달리 집단지성을 사용하여 인지능력을 향상하고 문명을 건설하며 문화 특히 상부 이데올로기로서 종교, 철학, 예술, 과학의 발전시켰다. 집단지성의 배후에는 항상 그 집단의 정체성을 확인시키는 거대서사 즉 큰 얼개의 이야기들이 존재했다.


대화와 담론 때론 토론과 논쟁을 통해 이 거대 서사시들은 더 다듬어졌으며, 문자의 발명과 더불어 더 정교하게 각 문명과 집단에 맞게 편집되었다. 종교와 철학은 그것을 의례화하고 체계화하였으며, 예술과 과학은 감성과 이성을 통해 표현하고 설명했다.


철학으로부터 정치학, 경제학, 사회학 등의 현실 사회의 인간들이 향해야 할, 행해야 할 좌표들이 찍히고 사람들은 자신들이 공동선이라고 믿는 이념이나 가치에 대해 다시 이야기하고 그것의 전파를 구실로 제국들은 침략을 감행했다.


그 침략의 선봉장이거나 방어장이 바로 영웅들이었으며, 대개의 이야기 혹은 스토리텔링은 히어로 스토리로 이루어진다. 때론 이 영웅들은 비극적 결말을 맞는데 이런 스토리가 더 깊은 여운을 만들었고, ‘오펜하이머’와 같은 오늘날의 영화 제작으로 이어졌다.


오랫동안 영향력을 행사했던 제국적인:위계적인 전통이념에 더 이상 몰입하지 않는 현대인들은 많은 시간을 다양한 영상매체를 통해 문화가 융합되고, 다원화되고, 개체화된 이야기를 듣고, 다시 만들어낸다. 개별성과 독창성은 이제 오늘날을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의 필요조건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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