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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종규 Nov 27. 2024

그림의 역사 5

시간과 공간의 픽처

인간은 기억을 통해 세계를 바라본다. 회상적 기억의 총체가 바로 나의 정체성이기도 하다. 수많은 기억의 연결고리가 수백만 년 동안 진화한 대뇌피질의 뉴런 시스템에 저장되고 어떤 인지적 환경에서 새롭게 구현된다. 1882년 프랑스의 심리학자 테오뒬 리보는 <새로운 기억보다 오래된 기억이 더 안정적이라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리보의 법칙이라고 불리는 이 기억의 원리는 말년에 이른 사람 중 일부가 어린 시절의 말투로 돌아가는 현상을 설명해 준다.


호크니는 사진과 회화의 차이를 이렇게 설명한다. 사진 속에는 시간이 저장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회화나 그림 속에는 수많은 시간(기억)이 겹겹이 쌓여있다. 루시안 프로이트란 화가가 호크니의 초상화를그릴 때 자신이 124시간 동안 앉아 있어야 했고, 그렇기에 그 회화 작품 안에는 화가와 대상과 기억이 입체적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회고한다.

게이퍼드는 아예 <모든 픽처는 타임머신이다>라고 규정한다. 픽처는 대상(사람, 장면, 시퀀스)의 외형을 압축시켜서 보존한다. 픽처를 만드는 데도 일정한 시간이 들고, 감상하는 데도 시간이 걸린다. 대개의 한국인들은 유럽이나 다른 지역의 해외여행 기간 대부분 몇 시간 안에 유명 박물관이나 미술관 투어를 주마간산(말을 타고 경치를 보는)식으로 스치듯이 지나간다. 한 회회 작품 앞에서 오랫동안 그 안에 집약된 화가의 심층에 자리 잡은 장기기억 혹은 단기기억에 동참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필자는 파리 여행 시 여러 미술관과 건축물을 관람하였는데, 자유 여행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음속 시간제한에 묶여 수많은 그림이나 조형물들을 사진만 찍고 지나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사실 우리는 전공자가 아니면 누구나 미술이나 그림의 역사나 화가에 대한 세밀한 정보(기억)가 없기에, 누구나 그것들을 깊이 감상할 두뇌의 Livewired(생후배선)이 충분하지 않다.

호크니는 <우리는 기억을 통해 세상을 바라본다>라고 말한다. 같은 사람을 보아도 이미 알고 있는 사람을 보는 것과 잘 모르는 사람을 보는 것은 다르다. 사람들은 같은 시간과 공간 속에 있더라도 각자 다른 시선으로 사물을 그리고 서로를 바라본다. 그 시선은 대부분 그들의 기억에 의존하고, 반복적 기억을 통해 생성된 패턴에 의존한다.


저자들은 화가이고, 평론가이기에 이런 패턴이 어떻게 인지에 침투하는지 그리고 그 인상들이 어떻게 그림으로 구현되는 지를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여러 작품을 통해 시간과 공간이 어떻게 회화와 연관되는지를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호크니는 드로잉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형상을 공간에 배치하는 일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 공간은 시간을 통해서 만들어진다.  


우리의 눈은 항상 움직인다. 눈이 움직이지 않으면 죽었다는 뜻이다. 보는 방식에 따라 관점도 달라진다. 그러므로 관점도 끊임없이 변한다. 호크니는 다음의 질문을 던진다. 인간이 어떤 장면을 관찰할 때, 그는 무엇을 가장 먼저 보는가? 무엇을 보는가? 보는 것은 무엇인가? 세 질문은 유사한 것처럼 보여도 시간으로 보면 각기 다른 시점을 나타낸다. 클로드 모네의 작품들은 이 물음에 대한 단서들을 제공한다

게이퍼드는 오래전부터 미술가와 과학자들은 양안 효과 즉 인간이 두 눈으로 무엇을 본다는 것에 관심을 가졌다고 한다. 사실 두 눈에는 막대세포와 줄기세포가 각기 다른 역할을 하면서 장면의 초점이 되는 사물과 그 배경을 동시에 관찰한다. 그리고 망막에 맺히는 것은 이 배경의 거꾸로 된 이미지이다. 이것을 뇌가 다시 거꾸로 뒤집어서 시각 이미지로 정보화한다. 우리의 뇌에는 사진이 들어있지 않다. 영상이나 음성이미지들은 단지 생화학물질로 된 뉴런과 시냅스들 사이의 전기 작용으로 존재한다.

서양의 르네상스 화가들은 원급법(遠近法: 눈으로 보는 3차원의 세계를 2차원의 평면에 표현할 때, 멀고 가까운 거리감을 느낄 수 있도록 하는 회화 기법)을 사용했다. 그들은 인간이 실제 바라보는 세계를 평면에 재현하려고 노력했다. 대표적인 작품이 조토의 <수태고지, 그리고 가브리엘 성모에게 보내는 신>이란 프레스코화이다.

반면에 호크니는 <중국 회화의 시점은 고정되어 있지 않으며, 이동 시점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그는 청나라 화가 왕휘의 <강희제 남부 탐방, 제7 두루마리: 우시에서 쑤저우까지>란 작품을 예로 든다.

게이퍼드 역시 중국 회화가 시간뿐만 아니라 공간마저 훌륭하게 압축되어 형상화하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그는 송나라의 화가 연문귀(燕文貴)가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산과 강, 그리고 정자들>에서 언덕들이 바다로 이어지고, 바다는 보다 먼 곳에서 하늘에 자연스럽게 녹아드는 광대한 공간을 탁월하게 표현하고 있다고 감탄한다.

북송의 화가 곽희(郭熙)는 산을 그리는 데 세 가지 기법이 사용된다고 말했다. 첫째는 고원법, 산 아래에서 낮은 곳을 바라보는 법과 둘째는 심원법, 산 앞에 서서 그 배후를 바라보는 법과 셋째는 평원법, 산과 동일한 높이에서 넓은 범위의 산을 관찰하는 법이다. 이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기법이 게이퍼는 고원법으로 보았다. 그는 곽희의 그림 <초봄>이 바로 그런 기법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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