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무제 이전의 중국사
왜 중국 역사의 위대한 황제들 중에 진시황이나 영락제 혹은 건륭제가 아니고 한나라의 한무제를 택한 것인가?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필자는 중국인 유학생을 오랫동안 가르쳐왔던 이유로 주로 여름/겨울 방학이면 중국인 학부모의 초청이나, 그 밖의 이유로 중국의 약 10개 성을 제자들과 함께 여행하였다. 아시아인으로서 유럽을 오래 여행하면 남게 되는 감정은 이방인이라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중국의 각지를 구석구석 탐방하면서 점점 더 알게 되는 것은 내가 유럽인들이나 미국인들과 달리 보다 쉽게 그들의 이웃이거나 친구가 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들과 우리에겐 너무나 많은 공통점이 있었다. 그렇다고 내가 친중주의자 혹은 신사대주의자인 것은 아니다. 나는 여전히 대한민국의 민족주의자이다.
누구나 알다시피 중국의 역사는 우리의 역사와 가장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렇다고 우리가 중국의 한 제후국이었던 것은 아니다. 아마 가끔 그런 형태를 취했지만, 중국 변방에서 오랫동안 자기 민족의 고유한 문화를 지켜온 나라는 한국과 베트남 그리고 일본만이 아직 독립국가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그 문화의 골격은 일본을 제외하고, 두 나라다 유교 문화권으로 분류된다.
그렇다면 비록 현대 중국이나 베트남에는 공산당이 집권하고 있지만 그 뼈대를 이루는 유교문화와 권위는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 물론 한국의 경우에는 이 뼈대가 흔들려서 도대체 우리의 정체성이 무엇인지가 위태로운 형편이지만, 두 나라는 관주도적 정치 그리고 시장경제를 병행하고 있기에 그 뼈대를 유지하고 있는 것 같다. 물론 이렇게 보지 않는 학자도 있을 것이다.
아무리 뛰어난 영웅이 천하를 통일해도 결국 그 나라의 정체성을 좌우하는 것은 일종의 정치사상이다. 그리고 그 사상은 후대의 문화유전자로 계승되어 변화되고 발전한다. 진시황은 법가(法家)의 패도(霸道: 무력과 술수로 다스림) 정치를 행하여, 천하를 무력으로 통일하였으나, 진나라는 바로 멸망하였다. 여기에 교훈을 얻은 한무제와 동중서는 유가(儒家)의 덕치(德治: 군주의 덕으로 다스림) 정치를 도입하여, 중국 정치와 문화의 근본 틀을 만들었다.
신석기시대 이후에 중국 역시 고대 국가의 형태가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먼저 하(夏) 나라가 세워지고 그다음에 상(商) 나라 혹은 은(殷) 나라, 주(周) 나라로 이어진다. 주나라는 상나라 시대 주문공의 아들 주무왕이 강태공(태공망)을 만나서 민심을 잃은 상나라에 대하여 역성혁명(易姓革命: 왕조의 교대를 정당화하는 이론)을 일으켜 세운 중국 역사상 가장 오랜 기간 존립한 고대 제국이었다.
주나라가 몰락하고 등장한 시대가 바로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 기원전 770-기원전 221)이다. 이 시대에 춘추오패(제齊, 진晉, 오吳,월越)와 전국칠웅(연燕, 위魏, 제齊, 조趙, 진秦, 초楚, 한韓)의 시기를 거쳐, 진나라의 왕 영정이 앞에서 말한 것처럼 통일국가인 진제국을 건국하게 된다. 그러나 얼마가지 않아 진은 망하고 다시 초패왕 항우와 한고조 유방이 싸워서 결국 한(漢) 나라가 건국된다.
한고조가 세운 한나라는 유방과 그의 공신들이 말년에 황노(黃老: 황제와 노자의 사상을 혼합해 불로장생을 꿈꾸는 신선이 되는 것) 사상에 심취해, 건국 초기부터 혼란스러웠으나, 한무제는 유비가 제갈량을 발탁한 것처럼 동중서를 통해 지금의 중국까지 영향을 끼치는 중화사상을 만들어내었다.
이 책은 사마천의 사기 연구를 통해 중국의 역사를 오랫동안 연구해 왔고, CCTV의 유명한 프로그램 <백가강단>의 인기 있는 강연자로서도 유명한 왕뤼 친 교수의 작품이다. 그는 <한무제>의 생애와 업적 그리고 과실을 중국 대중들에게 알기 쉽게 이야기하고 있다. 다음 편은 한무제가 어떻게 중국사의 영웅으로 등장하는 지를 알아보기로 하자.
그리고 포퓰리즘이 판을 치는 우리나라의 정치 현실에 <한무제와 동중서>와 같이 넓고도 먼 안목을 가진 탁월한 리더십을 가진 인물들이 새롭게 나타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