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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과 이데올로기 8

21세기 참여사회주의를 위한 요소들

by 박종규 Mar 12.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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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케티는 현재의 자본주의체제를 극복할 대안으로써 <21세기형 참여사회주의>란 대안을 제시한다. 그가 제시한 이 사회주의는 보편주의적 평등주의를 향한 전망으로, 그 근간은 사회적 소유와 교육, 지식 및 권력의 분유에 있다. 우선 그는 정의로운 소유의 조건들을 분석하면서 시작하려 한다. 이 조건들의 전반적인 윤곽을 그려보면 새로운 형태의 사회적 소유, 기업 내 의사결정 참여 및 의결권 분유를 발전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대규모 소유에 강력한 누진세를 통해, 영구적 사적 소유를 일시 소유 개념으로 대체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저자는 이데올로기스트가 아니라 경제학자이기 때문에 자신이 제시한 이러한 대안제가 앞으로 도래할 위기들에 대하여 충분한 대응력을 가진다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우선 그가 던지는 첫 번째 화두는 미국의 철학자 마이클 샌델이 던진 것과 유사하다.  <정의로운 사회란 무엇인가?> 피케티는 정의로운 사회란 <사회구성원 전체가 가능한 한 가장 광범위한 기본 재화에 접근할 수 있는 사회>라고 규정한다. 이러한 기본 재화에 해당하는 것에는 특히 교육, 보건, 투표권이 있고, 더 일반적으로는 사회적 문화적 경제적 시민적 정치적 삶의 다양한 모든 형태에 대한 완전한 참여가 있다. 정의로운 사회는 가난한 사회구성원이 가능한 한 가장 높은 생활조건을 누릴 수 있도록 사회경제적 관계, 소유관계, 소득 및 자산 분배를 조직한다.

다만 과거 공산주의 체제와 다른 점은 그가 제시하는 정의로운 사회는 절대적 획일성이나 절대적 평등을 전제로 하지 않는다. 그는 다음 조건 하에서 불평등의 발생은 인정되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즉 소득 및 소유의 불평등이 다양한 열망과 서로 다른 삶의 선택에서 나온 귀결인 한에서, 그 불평등을 통해 생활조건이 개선되고 가난한 이에게 허용된 기회 범위가 증대되는 한에서, 그 불평등은 정당화될 수 있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은 소득 증진이나 사적 소유의 증가에 그다지 관심을 가지지 않고, 마치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가 1845-1847년 사에에 그랬듯이 월든 숲 속에서 보다 적은 소유에 만족하고 질 높은 삶을 추구할 수도 있다.


그러나 반대로 한국의 경우에서 보듯이 기본 재화에 대한 접근이 사교육에 대한 과도한 투자로 연결된다면 가난한 자에게는 기회 범위가 축소되고 만다. 저자가 불평등체제 개선에 반드시 교육의 문제가 언급되어야 한다고 강조하는 점은 바로 이러한 문제 때문이다. 그러나 저자는 자신이 사용하는 사회주의란 개념은 비록 이 책에서 초중앙집중화된 국가사회주의와 구분하기 위해 '참여사회주의'란 말을 사용하지만, 그 용어보다 내용에 더 관심을 기울일 것을 요구한다. 이 참여사회주의에서 제안된 전망은 교육제도와 일시소유 및 누진세 주제에 핵심 역할을 부여한다.

그가 두 번째로 던지는 화두는 <정의로운 소유란 무엇인가?>는 질문이다. 이 물음은 참여사회주의를 정의하고 자본주의를 극복하기 위해 반드시 답해야 할, 가장 복잡하고 핵심적인 질문이다. 그는 자본주의 사적 소유를 극복하기 위하여 다음의 두 가지 측면의 변화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먼저 법률제도와 조세제도를 바꾸어서, 한편으로는 기업 내 권력을 더 폭넓게 분유하여 자본의 진정한 사회적 소유를 제도화하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막대한 소유에 강력한 누진세를 적용하는 가운데 자본의 일시소유 원칙을 확립함으로써 불평등체제를 개선할 수 있다고 전망한다. 사실 이런 제안은 필연적으로 기존의 양 체제 즉 하이퍼자본주의나 포스트공산주의의 기득권 세력들의 저항을 불러일으킨다.


피케티는 [21세기 자본]에서 이미 300여 년에 걸친 통계 자료의 분석으로 현재의 자본주의가 세습자본주의로 이어지면서 불평등 구조는 개선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자본과 이데올로기]의 마지막 장에서 그는 이 세습자본주의를 극복할 누진세 3종 세트(소유세, 상속세, 소득세)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그가 제시하는 정의로운 사회의 세제는 세 가지 기본 누진세에 기초한다. 연간누진소유세, 누진상속세, 누진소득세. 여기에 제시된 도식 안에서 상속세와 연간 소유세의 합은 국민소득의 약 5% 일 텐데, 이 총액은 전적으로 자본지원의 재원으로 쓰여야 한다. 사회적 분담금과 누진탄소세도 포함된 누진소득세는 국민소득의 약 45%가 될 것이고, 여타 공적 지출, 특히 기본소득과 무엇보다도 (보건, 교육, 퇴직연금 제도 등을 포함하는) 사회국가의 재원이 될 것이다.

더 세세한 논의는 필요하면 직접 책을 읽어보기를 바라고 마지막으로 그가 제안하는 교육 분야에 대한 관점을 살펴보고 마치기로 하자. 인도를 비롯해 일부 나라는 특정한 사회계층을 위해 대학의 자리를 배정하고 할당하는 조처를 오래전부터 시행하였다. 인도 정부는 1950년부터 역사적으로 차별을 받아온 계층에 해당되었던 정책을 1990년 이후에는 사회적 하층계급 전체로 확대했다. 유럽의 많은 나라에는 아주 최근에야 입학 절차에서 가족의 배경을 고려하기 시작했는데, 안타깝게도 투명성이 부족하다. 예를 들어 프랑스에서 고등학교 입학 허가 시 사용되는 알고리즘과 고등교육기관용 알고리즘은 대체로 국가기밀로 남아있다. 미국에서는 출신 인종 활용에 대한 법원의 금지명령과 더불어 부모 소득의 활용(학교 기부금 등)에 대한 법원의 금지도 적용되는데, 형평성을 고려하여 교육기관의 입학 자격을 낙후 지역별로 우선 배당한다.


그러나 미국에서 출신 지역의 우선 배당자 대부분은 낙후된 지역에서도 부유층에게 우선권이 돌아간다. 그러므로 저자는 부모 소득 같은 개인별 특성을 사용하는 일반규칙을 정하는 것이 한 방법일 것이다. 상대적으로 고소득 계층의 지역 우선 배정 비율을 줄이는 것도 사회적 균형을 위하여 바람직할 것이다. 영국에서는 엘리트 학교 진학 기회를 민주화하기 위하여 일정 점수 이상을 취득한 학생 집단 내에서 추점체를 장려하자는 제안이 있어왔고, 이는 해당 집단 내에서 사회적 할당제를 활용하는 것으로 귀착된다. 만약 우리나라에서 대학 입시를 이렇게 하자고 하면 교육의 질이 떨어지니, 아니면 기회균등에서 어긋난다는 식의 논리가 팽배해질 것인데 이 역시 근본적으로 피라미드형 사회구조의 지속성을 위하여 기득권을 가진 소수 대학의 출신들이 배후에서 만들어내는 여론 조성의 메커니즘으로 여겨진다.

마지막으로 그는 초민족적이고 지구적인 정의에 대한 인식들이 환경, 인류세, 생물다양성, 기후변화를 둘러싼 논의들에서 그 역할이 증대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러나 유엔의 기능이 한정적이고 일부 강대국(그 안의 초엘리트들)에 의해 좌우되는 지구 문제는 그렇게 낙관적이지 않다. 강대국 내에서도 권력 획득을 위한 포퓰리즘적 정책이 만연하고, 보호 무역과 관세 장벽이 강화되면서 지구 문제뿐만 아니라 불평등체제 역시 해소될 기미가 보이지 않고 있다. 과연 초고소득층에게 부유세를 엄청나게 낸다고 해서, 사회적 안정과 경제적 성장이라는 두 마리 토끼가 다 잡힐 수 있을까? 그리고 국민에게 기본 소득을 보장한다고 해서 수출로 먹고사는 한국의 경제가 과연 무역 경쟁에서 버틸 수 있을까? 종합병원에서 협진체제를 통해 불치병을 극복하는 방안이 일반화되었듯이, 사회 내에서도 전문가 집단의 소통과 국민 다수에 대한 보다 객관적 전달이 시급하다.


한국의 방송이나 인터넷 영상에 나오는 유명 논객들은 과연 모든 정책이나 시사 문제의 전문가일까? 내가 다 안다는 사람은 필시 정략배이거나 사기꾼일 가능성이 높다. 아는 것만 말하고 모르는 것은 말하지 않는 지적 양심이 모든 언론 매체의 운영자나 편집자 그리고 구독자에게 필요한 시기이다. 하나의 정답을 요구하지 말고 다양한 대안들 중에서 가장 시대적으로 혹은 현실적으로 개선가능한 우선순위를 일반인들에게 제시하는 그런 사회가 아니고서는 미래의 희망이 없다. 혹시 내가 지금 선동에 놀아나거나, 상업적 메커니즘에 의해 세뇌되지는 않았는가를 성찰하는 길은 바로 철학적 반성과 비판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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