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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라도와 예수 6

신의 계명과 인간의 전통 사이의 대립

by 박종규

저자는 앞 장에 이어서 인계라는 뜻을 가진 희랍어 파라도시스 paradosis가 기독교 교리 혹은 교의를 가리키는 비유적 의미로 사용되어 왔음에 주목한다. 예수가 유대 민족의 구전 전통을 비판하면서 이 단어를 사용했던 이유를 다시 해명한다. 마가복음 7장에는 바리새인과 서기관이라는 유대교 지도자들이 예수의 제자들이 부정한 손, 즉 손을 씻지 않고 그 손으로 음식을 먹는 행위를 나무라는 장면이 먼저 나온다. 그러면서 그들은 예수에게 이렇게 다그친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께 묻되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장로들의 전통 kata ten paradosin ton presbyteron을 준행하지 아니하고 부정한 손으로 떡을 먹나이까(막 7:5)"


당시 유대 사회의 전통에 따르면 음식은 반드시 손을 씻고 먹어야 한다는 규례가 있었다. 그럼에도 예수의 제자들은 그 규례를 어긴 것이다. 여기에 예수의 답은 오히려 더 공격적이다.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 ten entolen은 버리고 사람의 전통 ten paradosin을 지키느니라 또 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전통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계명을 잘 저버리는도다(막 7:8-9)"

유대인이 식사 전 손을 씻는 의식은 단순히 위생을 위한 행위가 아니라, 고대 성전 제사장의 정결 의식에서 유래한 종교적 정결을 상징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는 일종의 성전 제사 의식의 재현으로써, 과거 예루살렘 성전에서 제사장들이 제물을 바치기 전 손과 발을 씻어 자신을 정결(출애굽기 30:17-21)하게 한 데서 유래한 것이다. 유대인들은 서기 70년에 성전이 파괴되자, 랍비들은 일반 가정의 식탁을 성전의 제단으로 그리고 식사를 성전 제사와 동일하게 여겨 제사장처럼 손을 씻는 전통을 만들었다고 한다.


아감벤은 마가복음에서 나타나는 이러한 신의 계명 entole과 인간의 전통 paradosis 간의 대립은 마태복음 15장 3절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예수가)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냐(마 15:3)" 손을 씻는 전통은 실제로 구약의 어떤 구절에도 명시되어 있지 않고 위에서 말한 것처럼 랍비들이 만든 인간적 관습에 불가함을 예수는 정확하게 지적한 것이다. 다시 <인계>란 주제로 돌아가자.

저자는 이 단어의 의미에는 부정적 측면만 있는 것이 아니라 메시아적 함의를 갖는다고 해석한다. 일상생활에서 언급된 지침들은 논외로 하자면 바울이 고린도인들에게 "너희가 모든 일에 나를 기억하고 또 내가 너희에게 전하여 준 대로 그 전통을 너희가 지키므로 너희를 칭찬하노라(고전 11:2)"고 권면한 전통은 유대인들의 관습이 아니라 오직 단 하나의 참된 기독교 전통 즉 예수가-처음에는 아버지 하나님을 통해, 그리고 다음에는 유다와 유대인들을 통해-십자가에 못 박히시도록 '인계된 consegna" 전통, (세상의 다른) 모든 전통을 실현하면서도 (동시에) 폐기하는 전통이었다. 과연 아감벤의 이 말은 무슨 뜻일까? 이제 우리는 10으로 넘어가서 알아보자.


10에서 아감벤은 바르트의 해석을 먼저 인용한다. 바르트의 견해에 따르면 빌라도의 이야기 역시 이 '전통'의 맥락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이 로마인 유대 총독을 단순히 [새로운 약속의 집행자]로 보는 견해에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만약 빌라도가 유대인 종교지도자들처럼 단순한 집행자라면, 왜 그가 그들의 요청에 바로 응하지 않았는가? 그리고 빌라도 아내가 꾼 꿈에 영향을 받은 것은 무엇인가? 루터는 그 꿈을 예수의 <십자가 형을 방해하기 위한 악마의 공작>이라고 밖에 달리 설명할 수 없다고 말했다.

복음서에 기록에 의하면 예수는 유다에게는 '네가 할 일을 지체 없이 하라(요 13:27)"라고 말했지만, 이에 반해 빌라도와는 긴 대화를 이어가면서 끝까지 자신의 무죄를 입증하려고 노력했다. 결국 빌라도의 재판은 하나님의 경륜 속으로 침투한 인간의 역사가 되었다. 저자에 의하면 이 <역사적 크리시스 krisis(위기)는 또한, 아니 다른 무엇보다, '전통 tradizione'의 위기>이다. 그러므로 아감벤은 역사를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이 실행되는 과정으로 보는 기독교식 역사 이해(세속사와 구속사를 함께 보는 역사관)는 적어도 이 경우에는 수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지상의 왕국을 대표하는 자(빌라도)는 '이 땅에 있지 않은 왕국'을 심판하는 권한을 부여받았고, 예수는 '위로부터' 권한이 빌라도에게 주어졌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파스칼은 예수가 더 큰 치욕을 당하기 위해 즉 법적 판결을 받지 않고 불의한 폭력에 의해 죽는 것보다 재판을 받고 죽는 것이 더 치욕적이기 때문에 그렇게 죽었다고 보았다. 사실 다른 이유가 있는지, 철학의 시각으로는 알 수 없는 사건이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예수가 이 판결을 피하려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신학적으로는 이미 이 사건이 인류의 구원을 위한 구속 사역의 정점이라고 해석이 내려졌지만 여전히 철학적으로는 물음 가운데 던져진 미증유의 사건이다. 왜 그는 피할 수도 있었는데(다른 지역으로 제자들과 함께 도주한다던가), 당시에 가장 비참한 죽음을 33세에 맞이했는가? 그리고 그의 죽음은 소크라테스의 죽음과 무슨 차이가 있는가? 우리가 알고 있는 4대 성인(소크라테스, 예수, 공자, 붓다) 중 앞의 두 사람은 심판을 받고 죽었으며, 뒤의 두 사람은 자연사하였다. 만약 말면에 사르트르가 고민했던 것처럼 인간에게 단 하나의 진리의 길이 있다면 왜 어떤 길은 타살로 다른 길은 자연사로 종말을 고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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