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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라도와 예수 9

예수 재판의 모순과 역설

by 박종규

아감벤은 이미 빌라도에 관한 백색 전설과 흑색 전설을 통해서 빌라도 전승에 대한 모순적 시각들과 층위의 겹침을 드러내었다. 앞에서 언급한 단테의 신학-정치적 테제는 교회에 맞선 제국의 정당화를 위한 것이다. 저자에 의하면 (물론) 로마 제국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들어가 있지만, 자율권 또한 가지고 있었고 그에 따라 움직였다. 역사는 (물론) 구원의 경륜에 속해 있지만, 그것은 (수동적인) 인형극으로서가 아니라 모든 면에서 (자율적인) 현실로 속해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빌라도는 새로운 약속의 집행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신 안에 풀 수 없는 모순들을 가득 지닌 한 명의 역사적 행위자이기도 하다.


기독교 신학의 역사는 여러 가지 주제의 논쟁의 역사이기도 하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구원에 대한 신의 섭리론(은총론)과 인간의 자유의지론 사이의 갈등이다. 만약 구원이 전적으로 신의 은총 아래 진행된다면 인간이 해야 할 일은 아무것도 없다. 그냥 성직자가 시키는 대로 믿으면 그만이다. 극단적인 예로 죽기 전에 회개하고 예수를 구원자로 시인만 해도 천국행이다. 과연 인간의 자유의지는 구원의 경륜에 비해 전혀 쓸모없는 것일까? 구약이나 신약에는 무엇을 하라 혹은 하지 말라라는 명령(계명)이 존재한다.

사실 구약의 계명보다 신약의 계명을 지키는 것은 훨씬 어렵다. 구약의 신명기에는 "생명에는 생명으로,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손에는 손으로 발에는 발로이니라(신 19:21)"고 기록돼있다. 대개 이런 규범은 고대 사회에서 널리 통용되었고, 오늘의 현대인이라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이것도 어렵다. 사람의 심리는 자기가 당한 것 이상의 보복을 하게 되는 것이 대부분이다. 2023년 10월 7일 이후 하마스의 공격으로 최소 1,139명의 이스라엘인이 사망하였고, 이스라엘의 공격으로 인해 죽은 팔레스타인은 2025년 10월 기준으로 최소 68,500명 이상이 사망하였다. 이렇게 보면 이스라엘 정권도 구약의 계명을 그대로 지킨 것이 아니다.


그런데 심지어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 5:38-40, 44)라는 신약의 계명을 어떻게 지킬 수 있을까? 그리고 만약 신의 은총에 의해 그것이 가능하다면 왜 아직도 기독교 혹은 비기독교 문화권에서도 잔인한 살상이 반복되는가?

아감벤은 빌라도에게 드러난 모순들은 심리학적으로 해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규정한다. 그 모순들 속에서 드러나는 것은 한층 더 심오한 대립, 즉 경륜과 역사, 지상과 영원, 공의와 구원 간의 대립이다. 이것은 단테의 이론으로도 화해시킬 수 없는 대립이다. 왜냐하면 빌라도 그 자체가 모순이고, 나아가서 그리스도 역시 모순이기 때문이다. 성육신인 그리스도 자체가 모순이다. 이 모순은 5-6세기로 넘어가는 시기에 교회의 분열을 초래한 논쟁 사건으로 현실화된다. 단성론과 양성론자 간에 벌어진 이 그리스도론 논쟁을 통해 두 개의 본성, 두 개의 의지, 즉 신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에 관한 교리가 형성된다.


정통 교리로 확정된 양성론에 따르면 신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은 실체적으로 구별된 상태로 그리나 분리불가능한 하나의 인격(위격)인 그리스도 안에 더불어 존재한다. 빌라도는 그리스도와 달리 (상충하는) 두 개의 의지를 감당할 수 없었다. 반면에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 그리스도는 (상충하는) 두 가지 의지를 한 호흡에 담아 말할 수 있었다.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마 26:39)" 그러나 빌라도에게는 하나의 의지밖에 없었고, 그 의지에 따라 나름의 방식으로 진리와 정의를 구현하였다.

17에서 아감벤은 기독교의 정통 교리를 윤리학에 비추어보면 가식적인 면모가 드러난다고 비판한다. 신학자와 철학자의 차이 역시 점점 그의 글에서 나타난다. 만약 어떤 사람이 두 가지 의지를 마음대로 부릴 수 있어서 한쪽의 의지가 원하거나 행하는 일을 다른 쪽 의지로 정당화하려 든다면, 그것으로 그는 이미 윤리학의 영역을 떠난 셈이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양성론을 아무리 진지하게 받아들인다고 해도, 두 가지 본성 혹은 의지 중 한쪽을 정당화하기 위해 다른 쪽을 끌어들일 수 없다는 해석 외에 달리 해석할 방도는 없다. 현대철학자인 저자의 시각으로는 예수 역시 빌라도와 다를 바 없는 인간, 어디까지나 인간이었다. 따라서 그의 증언은 역설적이다.


진리를 증언하러 왔다는 예수의 주장을 독해하는 지금까지의 방식은 대체로 그것을 수수께끼로 보는 것이다. 혹 그게 아니라면 빌라도에게는 이해할 수 없었던 말이었다는 식이었다. 아감벤이 보기엔 <실제로 예수의 말을 문맥 속에 놓고 보면, 거기에는 수수께끼로 볼 만한 구석이 전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예수는 (지금) 재판에 넘겨져서 자신을 심문하는 재판관 앞에 서 있는 것이며, 진리를 증언하는 것(진실만을 말하는 것)은 모든 피고인과 모든 증인이 응당 해야 하는 일이다. 이 재판 전에 간음한 여인을 데리고 와서 판결을 원하는 유대인들 앞에서 예수는 (이 여인에 대해 판결을 피하면서) "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하시고(요 8:7)"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손가락으로 땅에 무언가를 썼다고 한다.

그리고 다음 장면에서 예수는 당시의 유대인들이 듣기에 심히 참람한 말을 한다.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 8:12)" 그러자 즉각 바리새인들이 반박한다. "네가 너를 위하여 증언하니 네 증언은 참되지 아니하도다(요 8:13)" 이 말을 들은 예수는 다시 대답한다. "내가 나를 위하여 증언하여도 내 증언이 참되니 나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알거니와 너희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 너희는 육체를 따라 판단하나 나는 아무도 판단하지 아니하노라(요 8:14-15)"


저자는 예수의 재판을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지금 예수는 재판장에 서 있고, 따라서 자신이 증언해야 할 진리를 입증하기 위한 최적의 장소에 있다. 그러나 정말로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증언 자체가 아니라 입증되어야 할 진리, 다시 말해 그는 왕국을 갖고 있지만 그 왕국은 '이곳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역설적인 사실이다. 그는 역사 속에서 그리고 시간 속에서 초역사적인, 영원한 진리의 현전을 증언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곳에 의한' 것이 아닌 왕국의 현전을 무슨 수로 입증할 것인가? 16-17에 이르는 철학적 사유는 이제 18과 19 그리고 주해로 종결된다. 과연 그는 이 역설을 어떻게 풀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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