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빌라도와 예수 11

결정하지 못한 사람과 결정할 수 있는 사람

by 박종규

[주해]에서 아감벤은 '시간적인 것과 영원한 것의 교차는 재판의 형식을 띠고 있다'라고 시작한다. 그러나 이 재판은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판결이 내려짐으로써 종결된 재판이 아니었다. 이 세계에 의한 것이 아닌 왕국을 가진 예수는 재판관의 판결에 내맡겨진 자신의 처지를 순순히 받아들였지만, 정작 재판관인 빌라도는 판결을 거부했다. 토론은 6시간 동안 진행되었지만, 재판관은 판결문을 낭독하지 않은 채 단지 피고인만을 산헤드린 회원들의 사형집행인들에게 '넘겨주었을 consegnato' 따름이다.


저자는 복음서의 이야기에서도 판결문이 공표되지 않았다는 사실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고 말한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 그리고 요한복음에는 한결같이 '넘겨주었다, paredoken'는 표현을 쓴 것이다. 예수의 십자가 처형은 산헤드린 회원들의 뜻이지 빌라도의 뜻은 아니었다. 빌라도의 의지는 표명되지 않았다. 고대의 성경 주석가들 중에 아우구스티누스만이 유일하게 '넘겨주었다'는 표현에 주목했다. 그는 텍스트에 함축된 의미가 빌라도 쪽에서 판결을 내린 것으로 해석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복음서에 '그가 예수를 넘겨주어 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도록 했다'라고 쓰여 있지 않고 [그가 예수를 넘겨주어] 십자가에 못 박히도록 했다]라고 쓰여 있기에 예수는 판결과 통치자의 권력에 의해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일 수 있다는 것으로 이해했다. 아감벤은 아우구스티누스의 해석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도록'이라는 수동태가 쓰여졌다고 해서 빌라도 쪽이 판결을 내렸다고 추론하거나, 책임이 있는 이들이 누구인지 지목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그러므로 예수의 재판에 대한 전통적인 해석은 수정되어야 한다.


재판-아마도 비상 심리 절차라는 비정규적 형식을 따른 것이었겠지만-은 개정되었다. 그러나 재판관은 판결문을 공표하지 않았다. 예수의 재판에서는 어떤 판결도 내려지지 않았다. 과연 판결[문] 없는 재판이란 무엇인가? 통상 법학자들이 말하는 재판이란 항상 그리고 오직 법적 절차이다. 그리고 재판은 판결과 합치한다. 재판법 분야의 위대한 한 학자가 적었듯이 "판결은 재판 바깥에 있는 어떤 목표가 아니다. 왜냐하면 재판은 판결 그리고 판결문의 작성 외에 다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판결 없는 재판은 용어상의 모순이다.

아감벤에 의하면 법적 질서란 결국 재판이며 본질상 재판이 판결이라면, 재판은 있었지만 판결이 없었다는 사실, 이것은 실로 법적 질서에 대한 강력한 이의제기라 할 수 있다고 한다. 신약의 맥락에서 (율)법(nomos: 희랍어에서는 주로 법, 관습, 규례를 뜻하나 성서 희랍어에서는 율법을 의미함)을 완성하러 온 사람, 판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원하기 위해서 세상으로 보내진 사람은 판결 없는 재판에 스스로를 내맡겨야 했다. [로마서]에서 율법에 대한 비판을 행했던 바울은 예수의 제자들을 통해서 향후 복음서에 삽입된 예수의 재판 이야기를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다.


바울은 [로마서]보다 앞서 기록된 [갈라디아서]에서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갈 2:16)"이라고 아주 단호하게 말한다. 이 구절은 예수는 (유죄) 선고를 받을 수 없었다는 사실에 완벽하게 부합한다.

예수 역시 [요한복음]에서 같은 똑같은 내용을 명백하게 표현한다.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요 3:18-19)"


저자는 이런 근거로 인하여 실로 예수에 대한 판결은 내려질 수 없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판결은 언제나 이미 내려져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곧 판결이다 Aute de estin he krisis.> 이것이, 오직 이것만이 예수의 눈에는 판결이(었)다. 예수의 재판-그리고 모든 재판-은 판결이 이미 내려진 상태에서 시작한다. 재판관은 다만 피고를 집행관에게 넘겨줄 수 있을 따름이다. 그는 그를 판단할 수 없다. 이 수수께끼 같은 글의 이해를 돕기 위해 아감벤은 1949년 살바토레 사타의 [재판의 신비]란 책에 등장하는 성찰을 소개한다.

사타는 이 저서에서 '재판은 법, 정의 혹은 진리를 완수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는 주장은 완전히 잘못되었다'라고 적었다. 저자는 이 주장이 만일 사실이라면, 우리는 판결의 권능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판결의 권능은 정의 혹은 불의로부터 독립적인 선고에 속해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가 재판에 어떤 목표를 부여하려 한다면, 그것은 판결 외에 다른 것일 수 없다. 진리와 정의를 대신하는 공표된 판결문, 기결된 사건이 재판의 궁극적인 목표다... 그러나 그것은 어떤 면에서는 목표 없는 행위이다. 이것이 바로 사타가 말하는 '재판의 신비'이며, 이것은 다시 목표도 중단도 없이 어느 순간 판결이 처해지기 위해 멈출 때까지 계속해서 전개되고 전진하는 삶 자체의 신비이다.


"왜냐하면 체포되는 바로 그 순간 정확히 판결이 내려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행위는 삶의 경제, 온갖 운동, 온갖 의지 그리고 온갖 일들로 이루어지는 삶의 경제에 반대되는 것이다. 반인간적이고 비인간적인 행위이며 실로 목표 없는 행위이다... 우리의 교리에 따르면 삶이 끝나고 모든 일이 끝나는 때 그분께서 오실 터인데, 그것은 벌하기 위함도 상을 주기 위함도 아니고 다만 판결하기 위해서이다. 산 자와 죽은 자 모두를 판결하실 그분에 의해서 qui venturus est indicare vivos et mortuos." (사타의 저서 25)

아감벤은 예수의 재판이 의문에 부쳐지는 것이 바로 이러한 재판의 개념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왜냐하면 그 재판에서 판결의 신비와 삶의 신비는 닿을 듯 말 듯 가까스로 접촉한 다음 영원히 서로 떨어져 버리기 때문이다. 실제 인간 사회의 판결 역시 완전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현행 법의 해석 또는 새로운 법에 의해서 이미 판결된 사건을 확정하는 행위에 불가하다. 공정과 정의가 사법부의 규준이지만 적어도 예수의 재판에 만큼은 이런 세속적 기준조차 적용되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로마 총독의 관저 안 빌라도 앞에서 진행된 재판은 신비라고 할 수 있다.


이 재판에서 서로 만나는 것은 신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 시간적인 것과 영원한 것은 철저하게 분리되어 있다. 그래서 빌라도는 번민하고 주저했으며, 그래서 예수는 고통에 무관심한 듯 정중했던 것이다. 판결과 구원은 끝까지 서로 무관한 것으로 그리고 서로 소통할 수 없는 것으로 남을 것이다. (대신) 남아있는 것은 드라마다. 여기에는 추적을 가능하게 해주는 아르키메데스의 점(지렛대의 원리에 적용되는 포인트), 삶 너머에 있는 아르키메데스의 점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예수의 재판은 판결로 해소된 것이 아니라 거꾸로 판결이 재판으로 해소되었기 때문이다.

재판의 신비를 해석하는 저자의 글은 더 어렵다. 아마 독자의 당혹감에 대해 저자도 글을 쓰면서 알았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좀 더 구체적인 역사적 사례를 든다. 단테는 로마 제국의 보편성과 유일신의 현현,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구 조사와 그리스도의 탄생 사이에 어떤 유비 관계가 존재한다는 생각을 했고, 이런 생각은 유세비우스와 요한 크리스토무스, 제롬, 암브로시우스(아우구스티누스의 스승)에게서 찾아볼 수 있으며 아우구스티누스의 제자 오로시우스가 역사서에서 명백하게 밝혔던 것이다.

이들에게 중요했던 문제는 <교회가 결국 제국의 권력과 결탁했다는 사실 그리고 그렇게 교회와 결탁한 제국의 권력을 신학적으로 어떻게 정당화할 것인가>였다. 아마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상정된 상징 속에 빌라도의 이름이 기입된 까닭일 것이다. 하지만 빌라도가 법적으로 합당한 판결을 공표하지 않은 것이 사실이라면 카이사르의 대리인과 예수, 인간의 법과 신의 법, 지상의 나라와 하늘의 나라 간의 만남은 존재 이유를 상실해 수수께끼가 되고 말 것이다. 동시에 기독교 정치신학 혹은 세속 권력을 정당화하려는 모든 노력은 결국 수포로 돌아갈 것이다.

로마 제국과 기독교 정치 신학, 근대 시민사회와 로크나 루소의 사회계약론, 소련과 중국의 권력체제와 마르크시즘 사이의 괴리는 인간의 힘으로는 풀 수 없는 것이다. 발터 벤야민과 조르조 아감벤과 같은 현대 철학자들은 바로 이런 점에서 어떤 신학, 정치, 철학이론도 어떤 종류의 사회 체제를 온전하게 정당화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저자의 결론은 우리는 최종적으로 결정 내릴 수 있는 능력을 상실했으며, 끊임없이 실제로는 아무것도 제대로 결정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사실 오늘날의 모든 사회 구조 속에서 대부분의 사람은 적어도 어떤 법적 혹은 윤리적 행위에 대한 규범적 결정을 따르거나, 동의하거나, 자신의 자의적 판단으로 판결을 내린다.


그러나 아감벤의 의도는 분명하다. 인간 사회에서 제도화된 어떤 사법 권력도 혹은 입법 권력이나 행정 권력을 정당화하는 온전한 이론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일단 판단유보(에포케, 괄호 침)를 하고 다시 숙고하는 것이 필요하다. <결정하지 못하는 사람-빌라도-은 계속 결정하고, 결정할 수 있는 사람-예수-는 아무것도 결정할 게 없어졌다.> 이 문장은 저자가 독자에게 던지는 마지막 결론이자 동양식으로 말하면 화두(話頭: 말보다 앞서 가는 것, 언어 이전의 소식)이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