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리다는 1장에서 셰익스피어의 비극 [햄릿]의 1막 5장에 나오는 마지막 대사를 인용하면서 유령에 대한 담론을 시작한다. 우선 우리는 번역자가 이 책에 나오는 유령이나 귀신에 관련한 단어들의 번역 지침을 유념하자. 번역자는 본문에 등장하는 fantôme을 환영으로, spectre를 유령으로, revenant를 출현 또는 허깨비, 허깨비의 출현으로 번역하였다고 한다. 이 단어는 모두 데리다가 말하는 유령을 나타내지만, esprit는 대부분 정신으로 번역하였으나 문맥상 유령으로 사용된 경우 혼령으로 옮겼다고 한다.
번역자가 이렇게 친절하게 각주를 붙여서 미리 번역의 용어들을 밝히는 이유는 햄릿의 인용에서 셰익스피어가 사용한 유령의 원어는 spirit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프랑스어 spectre는 영어로 specter이며, 마르크스가 사용한 유령이란 말의 독일어는 Gespenst이다. 언어권이 달라지면서 언어의 고유한 의미는 문화적 맥락에 의해 의미의 맥락에서 미끄러진 의미가 된다.
성경을 예로 들어보면 데리다가 사용하는 차연 <différance, 차이(difference)와 지연(deferral)의 합성어: 의미는 다른 기호들과의 관계 속에서만 생기며 동시에 의미는 결코 여기-지금에 완결되지 않음)이 더 확연하게 드러난다. 히브리어 창세기 1장 1절의 Elohim (אֱלֹהִים)은 성서 희랍어로는 ὁ Θεός (ho Theós)이며, 라틴어 Deus를 거쳐 영어 God와 독일어 Gott, 프랑스어 Dieu에서 중국어로는 神 이나 上帝로 번역되며, 한국어로는 하느님 또는 하나님으로 번역되었다. 실제로 히브리어 성경에서도 엘로힘으로 묘사된 창조주는 인간이 처한 문화적 맥락과 지평이 달라지면서 다양한 명칭과 의미로 확장되거나 왜곡된다.
사실 엘로힘의 다른 명칭인 여호와(YHWH)는 발음 자체가 불가능한 문자이다. 그래서 히브리인들은 그냥 <신성한 네 글자>란 이름으로 그들의 신 여호와를 불렀다. 하지만 후대의 성서 연구가들이 추측하여 야훼 혹은 여호와란 명칭으로 고정화된 것이다. 실제로 현대 유대인들도 그렇게 말하지 않고 단지 예배 중에는 아도나이(주님) 혹은 일상 대화에서는 하셈(그 이름)이라고 부른다. 유대인 출신인 데리다는 유대교도도 아니고 시오니스트도 아니지만 기본적으로 언어에 대한 이런 히브리적 전통을 오히려 그의 철학에 적용한다. 즉 모든 문자 이전에 말해짐이 먼저 있고 그리고 그 말해짐은 어떤 문자로 고정되지도 않기에 이를 더 급진적으로 표현하여 <원래 의미는 어디에도 없다>고 말한다.
이런 말은 플라톤 전통에 서있는 서구권의 학자들에게는 아주 낯선 담론이며, 담론 자체가 불가능한 담론이다. 언어분석에 치중하는 영미의 분석철학자들이 그를 조롱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래서 우리는 앞에서 이미 말이나 문자의 확정된 의미에 의지한 진리 담론과 그런 언어들을 넘어선 진리 담론을 구별한 원효의 탁월한 지혜를 미리 말한 것이다. 이미 유불도란 동양사상을 접한 사람들은 데리다의 차연이란 용어의 쓰임새를 우리 조상들이 일상적으로 이해하였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흔히 동아시아인의 사유 패턴은 대개 문자의 한계를 직시하였기에 직관적, 역설적 언어를 많이 구사하고 서구인의 사유 패턴은 문자화될 수 있는 추론적, 논리적 언어를 주로 사용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데리다가 동양 사상에 정통한 학자도 아니니 무조건 데리다와 동양사상을 대비할 수도 없다. 그러나 이미 7세기에 원효가 말한 이언진여(離言眞如)와 의언진여(依言眞如)의 사유 구조는 데리다의 로고스중심주의와 음성중심주의를 대비하며 그 너머를 사유하는 방식은 놀라울 정도로 유사하다.
논점을 너무 많이 우회했다. 다시 책으로 돌아가 햄릿을 인용한 데리다의 의도를 알아보자. "햄릿.... 맹세해. 유령(땅 밑에서) 맹세하라. (그들이 맹세한다) 햄릿 쉬어라 쉬어. 불안한 혼령(spirit)아! 그럼, 내 모든 사랑으로 자네들에게 날 맡기네....." 이 대사를 인용한 <지금 마르크스의 유령들을 유지하기>란 문장에 이어서 괄호 안에 넣어서 적은 표현들은 데리다 고유의 읽기와 쓰기의 대표적 형태를 보여준다. 이해하려 하지 말고 우선 그냥 그가 한 글을 그대로 읽어만 보자. (하지만 이는 연접 없이 지금을 유지하기다. 이접되고 일그러져 있는 '이음새가 어긋난' 지금, 확실하게 연결된 어떤 맥락, 여전히 규정 가능한 경계들을 지닌 어떤 맥락 속에서 더 이상 함께 유지될 수 없을지도 모르는, 이음매가 떨어져 나간 지금.)
일단 데리다가 해석하려는 공산당선언의 영어본과 한국어본을 먼저 읽어보고 다시 그의 글로 돌아가는 것이 유리할 것이다. 영어 원문 (도입부/1848) A spectre is haunting Europe—the spectre of Communism. All the powers of old Europe have entered into a holy alliance to exorcise this spectre: Pope and Tsar, Metternich and Guizot, French Radicals and German police-spies.(유령 하나가 유럽을 배회하고 있다 ― 공산주의라는 유령이. 교황과 차르, 메테르니히와 기조, 프랑스의 급진파와 독일의 경찰 스파이들에 이르기까지, 낡은 유럽의 모든 권력들이 이 유령을 몰아내기 위한 신성동맹을 맺었다.)
데리다는 이 책을 집필하기 전 앞에서 언급한 강연 제목에서부터 유령들이란 복수를 선택하였다고 회고한다. 왜 유령이 아니고 유령들인가? 그는 유령들이란 복수가 하나 이상의 유령 혹은 하나 이상/하나 아님 그리고 이것은 대중까지는 몰라도 군중이나 무리 또는 모임을 의미할 수 있으며, 심지어 사람들이 있거나 없는 유령 주민, 우두머리가 있거나 없는 공동체를 의미할 수 있다고 진술한다. 실제로 현대 유럽에서는 수많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이나 단체 혹은 모임이 존재하고, 중국에서는 여전히 공산당 정부가 그리고 러시아에서는 통합 러시아당이 집권하고 있지만 제2당으로서 러시아 연방 공산당이 존재한다. 현대의 공산주의 혹은 사회주의 집단 안에 마르크스의 사상은 여전히 중심에 있다.
[공산당선언]의 머리말에 나오는 <공산주의라는 유령>은 그 선언을 다시 읽은 데리다가 보기엔 부패한 나라의 왕자 이야기인 [햄릿]에서와 마찬가지로 모든 것은 한 유령에서 시작한다. 이제 데리다식 해석이 등장한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이러한 출현에 대한 기다림에서 시작한다. 예상은 초조하고 불안하면서 동시에 매혹되어 있다. 이것, 이 사물은 끝내 도착할 것이다. 망령/되돌아오는 것은 올 것이다. 늦지 않게 올 것이다. 아무리 늦더라도 올 것이다.... 유령의 경험 바로 이것이야말로 마르크스가 엥겔스와 더불어, 근대 유럽의 어떤 연극 연출, 특히 그것의 위해한 통합 계획들의 연출을 또한 사고하고 기술하고 진단했던 게 될 방식이다. 심지어 그가 이를 무대에 올리거나 연출했다고 말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혈통의 기억의 그림자 속에서 셰익스피어는 자주 마르크스의 이런 연극화에 영감을 불어넣게 될 것이다."
데리다는 마르크스를 마치 셰익스피어가 사용했던 기법처럼 근대 유럽사회에 공산혁명이라는 새로운 비극(?)을 연출하는 각본을 쓴 자로 접근한다. 이어서 그는 정신적 혈통의 계보로 셰익스피어는 마르크스를 그리고 마르크스는 폴 발레리를 낳았다고 비유한다. 왜 발레리인가? 우선 데리다와 발레리는 둘 다 <유럽의 위기>가 외부 침입이 아니라 내부의 정신적 논리(혈통)의 결과로 보기 때문이다. 프랑스 시인 폴 발레리는 1차 세계 대전 이후 [정신의 위기(1919)]란 에세이집에서 다음과 같이 쓴다.
“Nous autres, civilisations, nous savons maintenant que nous sommes mortelles.(우리 문명들 또한 죽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이제 우리는 안다.)” 발레리는 유럽 문명은 더 이상 세계의 중심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논증한다. 그 이유는 바로 유럽 정신의 자기 분열 때문이다. 그는 유럽을 구성해 온 세 가지 전통인 그리스적 이성 (논리, 철학, 과학)과 로마적 조직 (법, 제도, 행정) 그리고 기독교적 영성 (초월, 구원, 의미)이 전쟁 이후에는 이성은 파괴를 설계하고, 제도는 살육을 관리하며, 영성은 침묵하거나 국가주의에 종속되었으므로 유럽 정신은 통합된 전체가 아니라 분열된 기계가 되었다는 것이다. 데리다가 발레리를 인용하여 다시 소환한 유럽의 근대 정신과 철학자에 대해서는 다음 편에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