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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M Mar 07. 2024

어쩌다

1. 남할머니

-목표

 ∘ 이주민 한글 습득으로 사회통합

 ∘ 저학력, 문맹 주민의 문자 해득 능력을 갖게 함

 ∘ 지역사회와 학교 연계로 평생학습 기반 구현

     

-환경

 ∘ 군부대가 산재한 군접경지

 ∘ 읍단위 소재지로 군인 가족 거주 많음

 ∘ 젊은 층의 인근 도시 이동으로 고령화 가속

    

-현황

 ∘ 2007년부터 2011현재 한글 문해 교실 운영.

∘ 주민센터에서 시작하여 학교에서 운영

∘ 2010. 2011도교육청 한글문해 지원사업 선정(예산 400천원)

 ∘ 14명 중 8명이 독거노인

 ∘ 수강생 거주 지역-적성, 파주읍, 문산읍, 법원읍

     

-교사

 ∘ 2007. 2008년 **읍 주민자치위원회 활동

      

-기타

 ∘ 수강생 평균연령 73세

 ∘ 주 2회(목. 금 2시간) 수업

 ∘ 현장학습(2009년 과천 서울대공원, 2010년 용인 에버랜드)

 ∘ 태평12지 놀이 체험 병행



 남할머니!    

할머니가 짜 주신 털목도리 지금도 갖고 있답니다.

몇 날 며칠 밤을 깜깜한 눈으로 짜셨을지 안 봐도 짐작이 가요. 커다란 할머니 몸집만큼 풍성하게 만드셨네요. 목에 감으면 푹 파묻힐 만큼 두툼해요. 어서 빨리 주고 싶어서, 겨울이 오기 전에 주고 싶어서 졸린 눈 비비며 짜셨을 거예요. 할머니 집 형광등은 틀림없이 겨우 어둠만 몰아낸다는 것 알고 있답니다. 미순 할머니에게 들었어요. 남할머니, 우리가 만난지 벌써 4년 다 되어 가지요? 거구를 이끌고 쭈빗쭈빗 들어서시던 할머니 모습이 귀여웠답니다. 무언가 조심하면서, 호기심 반 머뭇거림 반의 표정으로 들어셨지요.


 수업이 끝나면 잠시 교실을 벗어나고 싶어 운동장가를 맴돌다 그 사람을 만났어요. 할머니와 인연을 맺어준 그 사람. 나이가 저하고 비슷해 보였어요. 언제나 그 시간에, 제가 운동장 가를 산책하는 그 시간에 운동장을 가로질러 주민센터로 출근(?)을 하더군요, 이 동네 사람들은 수시로 학교를 가로질러 다녔어요. 그럴 수 밖에요. 윗동네에서 아랫 동네를 가려면 후문으로 들어와서 정문으로 나가는 것이 지름길이라 대부분 이렇게 다녔지요. 학교를 가로 지르는 그 사람에게 누가 먼저 말을 걸었는지 기억에 없어요. 아마 서로 동시에 아는 체를 했을거예요.


그는 고등학생 때 공부를 잘 했다고, 그래서 지역의 기대를 한몸에 받고 서울에 있는 대학, 그것도 법대를 들어 갔다고 했어요. 그 사람이 말 한게 아니라 나중에 자치위원회 활동을 함께 하던 사람이 말해 주더군요. 법대를 나오고, 사법시험 공부를 10여 년간 했다는 것, 결국 마흔이 넘으면서 더 이상 공부할 돈이 없어 고향으로 돌아왔고, 일자리를 찾는 것보다 고향 발전을 위해 주민자치활동만 하고 있다는 등의 이야기였어요. 걸어왔던 길이 저하고 어느 정도 맞아서였을까요? 나무 그늘에 서서 몇 마디 주고 받고는 순식간에 결정을 했답니다.

‘아, 그래요? 그럼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가르치는 것, 이 고장에 이주 노동자들이 꽤 많더군요. 그들에게 한글을 가르쳐 봅시다.’

그가 큰소리로 대답했어요. 최소 20명은 모을 수 있다고!


그렇게 해서 주민센터에 한글교실이 개설되었지요.

그가 마을마다 돌아다니며 안내장을 돌린 덕분에 3명의 수강생으로 개강을 했어요.

‘곧 많이 나올거예요.’

그의 위로를 들으며 시작했어요.

우리는 무언가 대단한 일을 한다는 사명감으로 부풀어 있었답니다.

저는 학교에서 자료를 만들었고, 그 사람은 주민센터 내 작은 회의실을 공부방으로 꾸미고 해서 월, 수요일 오후 일곱시부터 수업을 시작했지요. 아참, 그가 또 말했어요. 주민센터를 편하게 들락거릴려면, 이왕 이렇게 된 것 저도 자치위원으로 들어오라고 하더군요. 얼덜결에 감투를 썼네요.

      


첫날 3명, 둘째 날 0명, 다음 날 2명...그다음엔 1명, 한 달 여 하고 나서 계속해야 하나 싶었어요. 그가 또 말하더군요. 이주 노동자는 많은데, 그들이 불법 체류자들이고, 인근에 일터가 있는데, 이 동네는 방 값이 싸서 저녁이면 돌아온다고.

그들에게 관공서로 나오라고 했다고?

나올 리가 없지요.

그에게 말했어요.

이주민을 대상으로 하는 것은 안되겠네요. 다른 대상을 찾아 봅시다.

그는 한 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말 하더군요.

이 고장엔 문맹인, 나이드신 분들이 많다고.

처음 실패로 의기소침해 있는 저를 부추기는 거겠죠?

한 번 실패했다고 포기하면 안되잖아요.

그렇게 해서 곧바로 할머니 학생을 모집했어요. 당연히 할아버지도 포함되는데 이름만 그렇게 만든거예요. 모집에 대한 책임은 그에게 있었어요. 그가 큰소리 쳤잖아요. 한동안 바쁘더군요. 나무 그늘 아래 와 있다고 해서 내려가 보니 모집 요강을 만들어 왔어요. 둘이 소곤소곤 모의를 몇 번인가 하고, 그가 마을로 다니기를 몇 번 더 하고, 또 나무 그늘 회담 두어번 하니 이번에는 뭔가 되겠구나 싶었답니다.

나중에는 주한미군들이 서울은 몰라도 이곳은 안다는 용주골까지 갔다고 하데요.


     

할머니를 만난 그날은 8월 막바지 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늦저녁이었어요. 남할머니를 따라 미순 할머니가 오셨고, 그다음에 호할머니, 진할머니, 금곡할머니, 주내 할머니. 한 학기 마칠 무렵엔 14명으로 늘었어요. 이제 와 하는 말인데, 그래도 미순 할머니에게는 비밀로 해 주세요.

미순 할머니 사실은 한글 아시는 것 같았어요.

한글교실 오시는 것이 좋아 일부러 모르는 척 하시는 것, 다 알고 있는데, 저도 모른 척 했답니다. 비밀이예요?


 할머니들 좋아하시는 모습에 방학이 되어도 쉬지 않고 수업을 했네요. 일산에서 법원리까지는 경의선 타고 버스 타고, 참 그때 파주역은 기차가 멈추고 내려서면 그냥 논두렁이었어요. 당연히 매표소도 없어서 많은 사람들이 공짜로 타고 다녔어요. 어느날 몇 사람의 철도청 직원들이 논두렁에 기다리고 있다 검표를 했고, 그러면 막무가내 가버리는 사람, 몇 배인가 물어주고 가는 사람...참 재미있었네요. 저는 항상 표 끊고 다닌 것 아시죠? 피곤하고 힘들 땐 저도 게으름 부리고 싶을 때가 많았답니다. 몇 번 수업 빼먹은 적 있었지요? 그때 할머니들의 힘없는 모습을 보고 얼마나 죄송하던지, 그 후로 무엇보다 우선 순위가 한글교실임을 다짐하고 다짐했답니다. 해가 짧아지면서 수업을 하는 일곱시까지 기다리는 것도 고역이었어요. 어떤 날은 주내 가는 버스가 횡하고 지나가버릴 때가 있어요. 그런 날은 오돌오돌 떨면서 후회도 하고, 자책도 하곤 했네요.


사실 점수 따려고 온 이곳에서 ‘쓸데없는’ 짓 하고 있다고, 관리자들에게 핀잔도 많이 들었답니다.

그들이 모르는 것이 있었어요.

이곳 문화라고 부르더군요. 저하고는 도저히 맞지 않는, 숨이 막힐 것 같은 문화가 학교에도 있었는데, 그걸 이겨낼 길이 없었어요. 다시 용인으로 내려 가거나 받아들이거나 하는 것 밖에. 실제 되돌아간 친구들도 많았답니다. 저는 소심한 도피를 선택했어요. 도망간 곳이 그곳, 할머니들 품 안이었네요. 누군가는 훌륭한 일을 한다고 칭찬인지 경쟁자의 방심에 대한 안도인지를 말할 때 많이 부끄러웠답니다. 무엇보다 글자를 깨우쳐 가는 기쁨을 온 얼굴 가득 표현하는, 지극히 공손하게 선생님이라 부르며 따르는(?) 할머니들께는 더욱 부끄러웠지요.

    

제 기억에 아마 2년 정도 지나지 않았나 싶은데, 어느 날 할머니가 그러셨어요.

‘선생님, 저 오면서 글씨 읽었어요.’

‘예? 무엇을 읽으셨나요?’

‘우리 동네 순길 세탁소, 법원 슈퍼, 장미 미장원요.’

‘그거 원래 있던거잖아요.’

간판을 읽었어요 하면서 수줍고도 기쁘게 웃는 모습이 지금도 어제 같아요. 그리고 할머니가 조곤조곤 해 주신 이야기 생각나요.

          

신의주가 고향이었고, 6.25 때 피란을 왔다는 것. 병들어 누워 있는 어머니가 어서 가라고 손짓하며 떠나 올 때가 열한 살이었다고 하셨어요. 할머니보다 두 살 어린 조카랑 동네 사람들 따라 내려 오다 비행기가 곤두박질 치면서 총을 쏴 댈 때 논두렁에 엎어졌는데 정신을 차려 보니 조카가 없어졌고, 어찌어찌 진주까지 내려갔고, 거기서 남자를 만나 딸 둘을 낳고 살다 산판을 다니던 남편이 죽고 다시 올라와 강원도로 해서 서울로 와 식모 생활을 하셨다는 것. 딸 둘도 어디서 어떻게 사는 지 모르게 살다 어느 날 우연히 서울 길거리에서 함께 피란 내려온 조카를 만났는데 조카 형편도 할머니 형편과 다를 게 없었다고, 희미하게 웃으시며 이야기를 이어 가셨어요. 홀로 된 몸 고향 가까이 가고 싶어 올라오다 여기에 주저 앉았다고. 참 담담히 말씀하시데요.


     

2년 후 도교육청에서 한글문해교실 공모가 있어 응모했더니 선정이 되었잖아요.

그 돈으로 공책, 연필, 조그만 가방까지 사고, 방학에는 63빌딩도 가고, 애버랜드도 갔어요.

‘선생님 이런 곳이 있네요.’

하시던 할머니 눈이 촉촉하게 젖은 것 봤어요.

무엇을 생각하고 계실까?

떠나온 고향과 엄마 눈이었을까? 어디 사는지도 모르는 두 딸? 조카? 먼저 간 남편...

할머니는 시간 날때마다 저에게 ‘선상님 고맙습니다.’를 입에 달고 사셨잖아요.

할머니, 오히려 고마운 건 저예요.

그 힘든 시기 할머니 덕분에 이겨냈고, 세상 시련이란 시련 다 겪으셨으면서 소녀 같은 마음 잃지 않으신 마음이 저에게 준 기쁨이 훨씬 많았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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