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의 실력 #2
이른 봄이었다.
가로수의 잔가지는 앙상하게 벌거벗고 오직 목련만이 이제 막 하얀 꽃망울을 터뜨리고 있었다.
겨울의 끝자락에서 봄을 향해 반발 짝 다가가는 그런 계절이었다.
한국문화 공유 플랫폼 애스크컬쳐(AskCulture)도 이제 막 작은 꽃을 만개하려던 시기이기도 했다.
“제임스, 우리 회사 광고, 맨해튼에 있는 전광판에서 하려면 광고비가 어느 정도 될까요?”
미국 현지에서 사업을 도와주고 있는 제임스에게 반쯤은 지나가는 말로 뉴욕에서 광고를 하고 싶다고 말했다.
제임스는 하루도 안 돼서 맨해튼의 있는 모든 전광판들에 대한 광고단가와 그 전광판을 소유하고 있는 광고회사들의 정보를 정리해서 보내줬다.
“여기(FOX)에도 가능할까요?”
나는 영화와 드라마에서 늘 보던 타임스 스퀘어 정중앙의 전광판을 콕 집어 물었다.
“맨해튼에서 제일 중심가에 있는 가장 큰 전광판에요?”
“네, 공식 견적서에는 금액이 없던데, 더 비싸겠죠?”
“당연히 가장 비쌀 거예요. 어느 정도의 예산을 쓸 계획인지 구체적으로 알려주시면 제가 그쪽 광고 에이전시에 연락해보겠습니다.”
제임스의 말을 듣고 곰곰이 생각한 끝에 그 해에 쓰려고 했던 홍보비 예산을 알려줬다.
휴대전화 너머로 그의 헛기침 소리가 들렸다. 제임스는 일주일 정도 시간을 달라고 했고 정확히 일주일 뒤, 그에게서 전화가 왔다.
“알려주셨던 예산으로 올해 9월, 그 자리에서 광고하기로 얘기 잘 마무리 지었습니다. 한 달 동안 24시간 내내 노출되는 광고입니다. 다른 기업들 4곳과 함께 하게 되고요. 매 5분마다 1분씩 우리 광고가 노출되는 거죠. 광고 영상은 30초짜리 2개 혹은 1분짜리 1개로 보내주면 된다고 합니다.”
“히-야.” 나는 진심으로 감탄하며 말했다.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으로 한 번 물어나 본 건데 진짜로 그 금액에 협상을 했어요?”
“다행히 대화가 잘 통했습니다.” 그는 늘 그랬듯 자신의 능력을 조금도 자찬하지 않고 겸손하게 답했다.
“같이 광고하게 되는 다른 기업들은 어디예요?” 내가 물었다.
“아마존, 마블의 신작 영화 예고편, 비디오 게임 <파이널 판타지 15편>의 트레일러, 그리고 코카콜라예요.” 제임스가 답했다.
하나같이 초일류 기업이자 현시대에 가장 핫한 상품을 가진 회사였다.
그런 회사들과 우리 회사가 나란히 있을 수 있다는 건 상상만으로도 가슴 벅찬 일이다.
“다만, 그쪽 광고회사 담당자가 대표님과 직접 미팅을 해보고 싶다는 조건을 내걸었어요. 설립한 지 1년도 안 된 스타트업에 광고를 주는 게 처음이라 대표님을 만나보고 싶다고 하네요. 가능할까요?”
“물론이죠. 미팅 날짜를 잡아주면 제가 그날에 맞춰 뉴욕으로 가겠습니다.”
나는 화색을 띠며 답했다.
서울에서 가장 먼저 봄을 알리던 목련의 하얀 꽃잎이 모두 떨어지고 이제 매화와 벚꽃이 한창 만개하기 시작했다.
서서히 봄이 깊어가는 그 계절에 나는 수십만 달러가 오가는 광고 미팅은 어떤 걸까 하는 기대를 품고 뉴욕으로 향했다.
현지 광고회사 대표인 에블린과의 만남은 그녀의 오피스가 아니라 뉴욕 맨해튼 42번가 인근의 평범한 커피숍에서 단 둘이 진행됐다.
맨해튼과는 전혀 무관한 이름의 작은 커피숍이었는데 덕분에 큰돈과 프로젝트가 오가는 미팅이라기보다는 가벼운 티타임 같은 느낌이었다.
어지간히도 격식으로부터 자유로운 미국다웠다.
에블린은 키가 굉장히 크고 체격이 다부진 중년의 커리어 우먼이었다. 네이비 계열의 두꺼운 롱 원피스에 카키색 재킷을 걸치고 있고 머리는 염색을 하지 않은 진한 붉은색이었다.
테가 얇은 안경을 끼고 있어 첫인상은 꽤 날카롭고 시니컬해 보였는데 나이는 어림잡아 50대 중후반에서 60대 초쯤으로 보였다. 전체적으로 실무에는 도가 튼 커리어 우먼의 연륜이 느껴졌다.
그녀가 내게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커피숍의 창가 쪽에 마주 보고 앉자 그녀가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간단히 안부를 물었다.
서울에서 뉴욕까지 비행시간은 얼마나 걸렸는지, 뉴욕은 처음 와봤는지, 이런 미팅이 처음인지,
그렇게 꽤 일상적인 걸 묻던 그녀가 갑자기 본론으로 들어간 건 주문한 커피가 나왔을 때였다.
“당신이 어떤 사업을 하고 있는지 정확히 알려줄 수 있어요?”
(“I wonder if you could tell me exactly, what your business is?”) 그녀가 물었다.
나는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 우리 회사의 애플리케이션을 보여주며 우리가 제공 중인 한국문화체험 공유 서비스에 대해 설명했다.
앞으로 예상되는 가입자 수와 월간 매출, 그리고 비전에 대해 다소 과장된 몸짓을 섞어 자신감 있게 말했다.
흡사 기업의 최종면접에 임하는 지원자 같이 적당한 속도로 발음에 신경 쓰며 또박또박 설명했다.
‘아니, 잠깐. 돈을 지불하는 건 이쪽인데 왜 자기가 클라이언트인 것처럼 구는 거지?’
열심히 회사를 소개하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스쳤다.
에블린은 자신의 스마트폰에 우리 애플리케이션을 설치하고는 앞으로 종종 이용하겠다고 웃으며 말했다.
광고 계약서에 사인을 하던 그녀가 안경을 벗어 안경집에 넣으며 말했다.
“좋아요. 제임스와 이야기했던 금액에서 내 재량으로 50%를 더 디스카운트해줄게요.”
“네?”
요청한 적도 없는데, 먼저 광고료를 반값에 해주겠다고 말하는 그녀의 말에 반신반의하며 내가 물었다.
이미 제임스가 예산에 맞춰 성사해둔 광고비도 말이 안 될 정도로 적은 금액이었다.
그 금액으로는 맨해튼의 중심인 42번가에서 한참 떨어지고 구석진 곳에 있는 작은 전광판에서 광고하기에도 아슬아슬했다. 그런 광고비로 맨해튼에서 아니, 이 뉴욕 전체에서 가장 중심에 있는 전광판에 광고를 하게 된 참이다.
그런데 오십 퍼센트를 더 할인해준다고 하니 어안이 벙벙해졌다.
‘뭐지? 이 사람 사기꾼인가?…’
한국인이었다면 ‘더 치트(인터넷 사기 피해 정보공유 사이트)’에 사기 피해 조회라도 검색해봐야 할 판이었다.
그런 의심을 하며 일단은 감사하다고 말한 후 함께 카페에서 나왔다.
작별인사를 하려고 하는데 그녀가 “잠시만”이라고 말하더니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그녀가 짧은 통화를 마친 뒤 말했다.
“한 번 뒤 돌아볼래요?”
그녀 입가에 떠오른 미소를 보며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봤다.
“…….”
광고 전광판 스크린에 우리 회사의 로고와 애플리케이션 구동 화면이 떠 있었다.
그대로 1분 남짓 나는 완전히 얼어붙은 채 멍하니 전광판을 바라봤다.
수백 수 천 개의 광고 전광판이 있는 뉴욕에서 가장 중심지에 있는 가장 큰 전광판에 내 회사의 로고가 떠있다니.
형언할 수 없는 감동과 전율이 밀려왔다.
아이디어만으로 불과 몇 개월 전에 시작한 사업이다. 그랬는데 벌써 이렇게…….
“나는 곧 은퇴를 앞두고 있어요.”
에블린이 어깨에 메고 있던 클러치 백에서 선글라스를 꺼내어 쓰며 말을 이었다.
“이번 계약을 끝으로 이제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려고요. 은퇴를 앞둔 내가 앞으로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젊은 친구들에게 주는 작은 선물이라고 생각해주면 고맙겠어요. 사업 번창하기를 기도할게요. 만나서 반가웠어요.”
그녀는 그렇게 인사하고 몸을 돌려 걸어갔다.
그때까지 봐 온 누군가의 뒷모습 중 가장 멋지고 당찬 걸음걸이로, 그렇게 그녀는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그해 가을,
한국문화 공유 플랫폼 애스크컬쳐는 한 달 내내 뉴욕 맨해튼의 가장 중심에 있는 광고 전광판에서
한국문화와 한국문화 공유 플랫폼인 애스크컬쳐(AskCulture)에 대한 광고를 진행했다.
그 한 해 동안
서울부터 파리, 런던, 부다페스트, 베이징, 도쿄, 싱가포르, 홍콩, 샌프란시스코, 뉴욕 등.
전 세계를 끊임없이 돌며 우리 한국문화와 한국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플랫폼을 열심히 홍보하러 다녔다.
그때 나는 만으로 서른 살이었다.
그리고 그 해에 썼던 사업 프로젝트 비용은 서른여섯이 된 지금까지 혼자 갚아나가고 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