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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udovico Jan 29. 2024

어느 신경의학자 이야기

5화

새로운 경험들


캘리포니아주에 위치한 서부 최고의 도시인 샌프란시스코는 가톨릭 성인인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 프랑스 사람이란 의미의 프란치스코라는 이름은 현 프란치스코 교황을 통해 세계적으로 유명해졌으나 이미 가톨릭 내에서는 잘 알려진 성인이었다. 교황이 선출되면, 선출자의 사명을 나타내는 이름을 새로이 선택한다. 때로는 그 이름들이 중복될 때도 있는데, 교황 요한바오로 2세는 이전에 요한바오로라는 이름을 선택했던 교황이 있었던 것이고, 베네딕도 16세는 이전에 15번의 베네딕도라는 이름의 선택이 있었던 것이다. 프란치스코라는 이름은 이전에 한 번도 선택한 적이 없었는데, 예수회 소속이자 아르헨티나의 주교였던 호르헤 마리오 베르고글리오 시보리(Jorge Mario Bergoglio Sívori) 신부는 ‘가난한 사람들’과 ‘세상 모든 피조물을 사랑했던 평화주의자’였던 ‘아시시의 프란치스코’를 따르고자했던 마음에서 이 이름을 선택한다. 

Scott McKenzie의 San Francisco 뮤비 중 한 장면(자료 : YOUTUBE)

미국의 샌프란시스코가 이러한 지향을 둔 역사적 인물의 이름을 따라서 지어서였을까? 샌프란시스코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1960년대 중반부터 히피 반문화와 함께 자유를 원하는 사람들, 전후 군인, 대규모 이민자가 섞이면서, 성혁명, 평화운동, 베트남 전쟁에 대한 미국의 개입 반대 운동, 사랑의 여름, 성소수자 권익수호 운동이 주도되며, 정치적으로도 미국 자유주의 운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올리버가 도착했던 1960년대 초반 샌프란시스코에 이러한 문화가 깊게 자리잡지는 않았겠지만 어느정도는 조금씩 그러한 경향성이 확산하고 있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스콧 맥켄지(Scott McKenzie)의《San Francisco (Be sure to wear flowers in your hair)》는 1960년대 중후반 샌프란시스코의 분위기를 알려주는 곡이다. 유튜브에서 검색해보면 이 팝송과 함께 당시 샌프란시스코를 볼 수 있는 영상이 나오는데, 가사와 함께 보면 당시의 분위기를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런던에서는 올리버의 존재 자체가 범죄 혐의를 받을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샌프란시스코에서는 그러한 차별은 존재하지 않았다. 올리버에게는 여전히 런던에서 겪었던 트라우마가 내재되어 있었지만 샌프란시스코에서의 새로운 삶과 그 기대감은 그에게 삶의 활력을 준 것이 분명하다. 


미국의 심리학자인 칼 랜섬 로저스(Carl Ransom Rogers)는 인간중심접근이라는 상담심리이론을 정립한 인본주의 심리학자로, 모든 인간에게 ‘실현경향성(자기 자신의 가능성을 발휘하고 더 향상하려는 힘)’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하고자 했다. 오늘날 상담심리 영역에서 수련(역량강화 교육)을 받는 사람은, 상담을 녹음하여 일일이 기록한 녹취록을 보며 경험이 많은 선배 상담자에게 지도를 받는다. 이 방식은 칼로저스로부터 체계화 됐는데, 칼 로저스는 과학적인 방법론을 통해 주관적인 것들을 객관적으로 검증하려했고, 그 방법 중 하나가 이처럼 상담과정을 녹음하여 하나하나 분석하는 과학적인 연구방법론이었다. 축어록 풀어놓은 것을 읽다보면, 인간에게 있는 실현경향성에 대해 분명히 알 수 있는 순간들이 있다. 그렇지만 이러한 연구결과보다 직관적으로 실현경향성에 대해 설명해주는 일화가 있다. 칼 로저스는 어느날 어둡고 축축한 지하실에 내려갔다가, 한켠에 놓인 포대기 안의 감자가 햇볕이 내리쐬는 창가를 향해 싹을 틔우는 것을 보고, 이를 실현경향성에 비유하곤 했다. 어떠한 환경에서도 인간은 자신의 존재를 실현하기 위해 나아가기 마련이다. 다만 이는 마치 식물에게 필요한 햇볕과 물처럼, 관계 안에서 주어지는 중요한 토대가 필요하다. 이 3가지 토대를 ‘무조건적인 긍정적 존중, 공감적 이해, 진정성’이라고 하는데, 누군가를 조건화하고 하고, 자기 기준으로 사람을 판단하고 평가하며, 이익여부로 관계를 정립하는, 우리가 일상에서 쉽게 갖는 관계맺음과는 정반대의 모습들이 요구된다. 


인간은 환경을 극복하는 능력으로 지구의 지배자가 되었지만 환경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것 또한 인간이 지닌 한계이며 본질이다. 그래서 올리버는 자신의 환경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통해, 자신이 바꿀 수 없는 영국이라는 환경을 떠나 미국으로 향했다. 미국으로 향하는 올리버는 칼 로저스가 이야기하는 관계의 3가지 토대와 같은 민주주의와 평등사회ㅡ그런 관계를 기대했다. ‘잉글랜드에서는  누가 되었건 입을 여는 순간 계급이 매겨졌다. 다른 계급끼리는 어울리지 않으며 다른 계급 사람과 있으면 불편해한다. 미국이라면 계급없는 사회, 혈통이나 피부색, 종교, 학력, 직업에 상관없이 모두가 사람 대 사람으로, 같은 종의 인류로서 서로 어우러지며 대학교수와 트럭 기사가 격의 없이 대화를 나누는 곳일거라고, 나는 생각했다.’

런던과 샌프란시스코는 모두 안개가 자주 생기는 기후를 지니고 있다. 다만 런던의 안개가 올리버를 억압하고 차별하여 그 존재를 흐리게했다면, 샌프란시스코의 안개는 흐릿함 너머에 눈에는 잘 보이지 않는 가능성을 지닌 올리버의 존재의 포용성을 지녔다는 차이가 있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살고있는 이 시대의 한국은 어떠할까? 모든게 너무도 ‘뚜렷해야만하는 곳’. 우리의 강점이기도 하지만, 지나치게 요구되는 명확한 형태에의 요구는 흐릿하게 보일 수 밖에 없는 존재의 가능성을 말살하기도 한다. 확신할 수 없이 존재하기에 두근거림을 주는 가능성들, 한치앞을 보기 힘든 것도 즐거움이 될 수 있다는 체험, 그런 것들이 수용되지 못하는 억압과 차별의 안개로 차있다.


과거의 그림자

올리버가 영국 옥스퍼드 대학교 퀸스 칼리지에서 받은 의학 학위는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마운트시온병원에서의 인턴과정을 거쳐, UCLA에서 레지던트 생활로 이어진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약 650Km 떨어진 로스엔젤레스에서 생활했던 올리버는 의학 학위 덕분에 다른 이주민에 비해 안정적인 정착을 해나가고 있는듯 보였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겉의 모습이었다. 올리버는 주말이면 오토바이를 타고 매번 800~1200Km에 달하는 거리를 밤새 달려 서부 곳곳을 여행한다. 신문에도 실렸던 역도 기록을 세웠던 시기도 이 때인데, 올리버는 자신의 미약한 자아상을 강인하게 대체하고 싶어 강한 남성상에 몰두했었다고 토로한다. 누가보아도 대단한 능력치와 멋진 외모를 지녔던 올리버인데 왜 그리도 자아의 힘이 약했을까? 


정신역동의 한 갈래인 대상관계이론에는 반사반응(mirroring response)이라는 개념이 있다. 유아의 행동에 대해 보호자가 적절하게 공감적인 반응을 해야한다는 것이다. 유아는 보호자와의 관계를 통해서 ‘보호자에게 반영된 자기’를 경험하게 되고, 이를 통해 자아 인식하고 발달시킨다. 즉 우리는 중요한 대상의  반응을 통해 자신의 자아상을 확인하고 공고히 강화시킬 수 있다는 의미이며, 이 반사반응은 유아뿐 아니라 생애 전반에서 필요한 경험이다. 올리버는 지옥의 구덩이였던 기숙학교에서 구해달라는 요청을 외면한 부모님의 반응, 동성애를 알게된 어머니의 반응 등에서 자신이 상실되는 불안을 느꼈다. 


어린시절에 이러한 경험을 놓쳤다고해도 우리 삶이 근본적으로 무너지는 것은 아니다. 대체로 삶에서는 무수히 많은 AS의 기회가 주어지기 때문이다. 정신분석가이자 정신과의사로서 우리 사회의 트라우마를 치료해왔던 정혜신 박사는 '내 고통에 진심으로 눈을 포개고 듣고 또 듣는 사람, 내 존재에 집중해서 묻고 또 물어주는 사람, 대답을 채근하지 않고 먹먹하게 기다려주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상관없다. 그 사람이 누구인가는 중요하지 않다. 그렇게 해 주는 사람이 중요한 사람이다. 그 '한 사람'이 있으면 사람은 산다...내게 집중하는 한 사람만 있어도 죽지 않는다'고 말한다. 나를 ‘무조건적인 긍정으로 존중’해주고, ‘공감하고 이해’하며, ‘진솔’하게 바라봐주고, 말을 걸며 함께해주는 관계가 경험된다면 우리는 어떤 어려움도 극복해갈 수 있다. 나는 미국으로 향하는 올리버에게서 ‘깊은 관계’에 희망을 갖는 모습이 그려진다. 후에 올리버가 겪는 정신적 방황과 그것이 깊어져 정신병리적인 상황에까지 처하게 되는 가장 근본적인 원인이자 트리거는 ‘깊은 관계의 좌절’이었다. 


1961년, 올리버는 샌프란시스코의 한 헬스장에서 멜Mel이라는 한 남성을 알게된다. 벌꿀, 달콤함의 뜻을 담고 있는 그의 이름을 소개받고, ‘내 이름은 올리버에요’라고 말하기 전까지 짧은 시간에, 올리버의 머리속에는 Mel로 시작하는 온갖 단어들이 맴돌았다.(mellify 벌꿀로 방부처리하다, melliferous 벌꿀을 만드는, mellifluous 감미로운 등..) 올리버에게 꿀같이 달콤한 사랑이 찾아왔다. 


올리버는 20대 초반, 처음으로 사랑에 빠졌었다. 그러나 그 사람은 동성애자가 아니었고 결과적으로 사랑이 좌절됐으나 올리버는 잘 극복했다. 여기에는 올리버를 존중하고 좋아했던, 그 사람이 올리버에게 ‘너와는 방식은 다르지만 나도 너를 사랑해’라는 따뜻한 마음을 담아 거절했고, 올리버의 동성애는 존중받았다는 점이 컸다.  그리고 우리는 알고 있다. 사랑에 실패했던 젊은 시절을 떠올리며 그 아픔을 극복하는 방법에는 언젠가 만나게 될 누군가에 대해 희망을 품는 것임을 말이다. 올리버도 이러한 미래에 대한 희망이 위안과 힘을 주었다고 생각하면 비약일까? 


올리버는 해군에 복무하고 있던 멜과 많은 시간을 운동을 하며 보냈다. 멜도 동성애적인 성향을 지녔지만 올리버만큼 자신에게 솔직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하지만 둘은 서로에게 소중한 사람이 되어갔다. 올리버가 샌프란시스코의 마운트시온 병원에서 인턴을 마치고 UCLA로 옮겨 레지던트를 시작할 즈음, 두 사람은 로스엔젤레스에 함께 집을 얻어 살게되었다. 하지만 올리버가 유대교의 교리로 자신의 성정체성을 거부받아 고통받았듯이, 멜은 가톨릭 교리에 막혀 자신의 성정체성을 받아들이지 못한 상태에서 어떤 일이 발생한다. 올리버가 자신이 정해놓은 경계를 넘었다고 판단한 멜을 다음 날 아침 떠나겠다고, 얼마전에 알게된 한 여자의 집으로 가겠다고 선포한다.  


실연에 대해, ‘시간이 약이야 다 순간이야’라는 싸이와 이제훈이 불렀던 위로는, 하림의 ‘사랑이 다른 사랑으로 잊혀지네’라는 조건에서만 성공적으로 이뤄질 수 있다. 다시금 사랑에 실패한 올리버는 첫사랑으로부터 받은 거절의 경험, 어머니로부터 부정당한 자신의 성정체성, 그리고 멜에게 다시 거부 당하며, ‘자신은 결코 사랑할 수 없을 것’이라는 역기능적인 신념을 강화하게된다. 이 신념은 올리버에게 이 세상에서 근본적으로 그 누구에게도 수용받지 못한다는 좌절, 혼자라는 ‘소외, 외로움, 고립감’을 계속 악화시켰다. 올리버는 ‘다시는 누구와도 같이살지 않으리라 결심’하며 마약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Narcotic, 영어권에서 마약의 의미로 사용하는 이 단어는 나르코티코스(narkotikos)라는 ‘무감각’을 의미하는 그리스어에서 유래했다. 15세기부터 통증을 완화하는 물질을 칭할 때 사용되었는데, 21세기인 지금은 통증 완화의 약물을 지칭하는 의료적 의미 외에도 쾌락과 흥분을 위해 섭취하는 물질이란 의미로도 사용한다. 올리버는 왜 마약에 빠졌는가? 키워드는 두 가지다. 쾌락과 무감각. 견디기 어려운 현실의 고통스러운 감각을 상실하고 싶은 마음과 더불어 이 지독한 현실에 대해 쾌락으로 기분을 전환하고 싶은 마음이다. 고통을 극복하는데 있어서, 마약은 너무나도 쉬운 해결책으로 보인다. 내 삶에 비어있는 무엇을, 마약의 도파민으로 인한 쾌락이 잠시라도 채워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렇게 경험한 쾌감은 각인되고 의존성이 커져 삶을 더욱 거칠게 만든다. 


6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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