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책을 왜 읽을까. 무엇보다 재미를 얻기 위해서이다. 이야기가 재미있을 수도, 전해주는 정보가 유익할 수도, 뭔가를 배울 수도, 감동을 받을 수도, 위로가 될 수도 있다. 그런 순간들이 나에게는 재미이다. 그렇다면 이 책은 나에게 무슨 재미를 주는가.
앞부분은 좀 식상했다. 예전에 정서적 교감을 나누었던 두 남녀가 한 전시회장에서 우연히 만나 다시 인연을 이어간다니. 이게 웬 ‘7080’도 아니겠고 언제 적 유행하던 인연 잇기란 말인가. 게다가 ‘첫사랑 찾기’라니. 그러나 작가의 문장이 그 모든 걸 상쇄한다. 아름답고 물 흐르듯 수월히 읽히면서 나의 가슴과 머릿속 어딘가를 건드린다. 또한 두 남녀는 이 소설의 주 메뉴가 아니었고 ‘첫사랑 찾기’도 소설적 장치일 뿐이었다. 작가 백수린이 이 소설에서 들려주는 것은 여러 삶의 모습들이다. 낯선 곳에서 꾸려가는 삶도, 익숙한 곳에서 누리는 삶도 모두 따듯한 시선을 담아 조곤조곤 들려준다.
주인공 해미는 중학교 때 사고로 언니를 잃은 후 그 상처를 안고서 엄마와 동생과 함께 독일로 향한다. 독일에는 이모가 있다. 간호사로 파견되어 갔지만 공부를 더 해서 이제는 의사로 살고 있다. 그리고 다른 ‘이모’들이 있다. 그들은 파독 간호사로 독일에 온 사람들이다. 선자 이모는 그들 중 한 명인데, 뇌종양이 발병해서 위독한 상태가 된다. 그래서 아들 한수가 엄마가 그토록 보고 싶어 하던 엄마의 첫사랑을 찾으려고 한다. 한수는 한국말을 잘 몰라서 해미에게 엄마의 일기장을 보여주면서 도와달라고 부탁한다. 이렇게 시작된 ‘선자 이모의 첫사랑 찾기’는 해미가 한국으로 돌아온 후에도, 한수가 엄마의 일기장을 우편으로 보내주면서 계속된다. 과연 찾을 수 있을까? 그 첫사랑은 누굴까? 마치 추리소설처럼 독자의 뒤통수를 때리는 것도 작가는 잊지 않는다. 하지만 그런 뒤통수도 우리의 고정관념 때문인지 모르겠다.
이렇게 ‘첫사랑 찾기’가 줄거리를 이어가는 뼈대지만 거기에 붙어있는 살들이 풍성하다. 독일에서 우리 교포들은 어떻게 살았는지, 낯선 곳에서 어떻게 적응하며 삶을 꾸려가고 더 나은 삶으로 나아갔는지, 여러 삶과 죽음의 모습들이 펼쳐진다. 마리아 이모의 자유 찾기를 보면서 당시의 딱딱했던 가부장적 한국 사회에서 여성들은 얼마나 힘들었을까 공감이 갔다. 나의 이모는 의사 생활 초기에, 병원 밖에서 죽은 사람들의 시체를 살피고 사망진단서를 써주는 일도 했다. 그때 한 노인의 사망진단서를 써주었는데 일주일 후 노인의 유일한 보호자였던 50대 딸의 사망진단서까지 쓰게 되었다. 딸은 다른 자식들이 모두 외면한 구십 세 가량의 노인을 결혼도 하지 않고 홀로 돌보며 살다 아버지가 죽자 삶의 의미를 잃어버리고서는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하냐며 자살한 것이다. 빅터 프랭클은 <죽음의 수용소에서>에서 인간이라는 존재는 어떤 상황에서도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면 살아나갈 수 있다고 했다. 그 삶의 의미는 내가 찾아야 하는 것인데 그러지 못하고 자살한다니 안타까웠다.
그렇게 많은 죽음을 지켜본 이모가 말한다. “사람은 누구나 갑자기 죽는다는 거였어. 멀리서 보면 갑작스러워 보이지 않는 죽음조차 가까운 이들에겐 언제나 갑작스럽지.... 삶은 누구에게나 한 번뿐이라는 것.”(226쪽) 깊이 공감 갔다. 삶은 한 번뿐이고 죽음은 항상 갑작스럽게 찾아올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매 순간을 소중히 여기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보내는 시간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 해미가 읽고 있던 책을 보고 선자 이모는 한 구절을 소리 내서 읽는다. “내 안에서 우러나오는 대로 살고자 했을 뿐인데, 그것은 어째서 그토록 어려웠던 걸까?” 너무나 유명한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에 나오는 구절이다. 한 번뿐인 삶을 사는데도 우리는 내 안에서 우러나오는 대로 살기가 어렵다. 특히 선자 이모의 삶이 그랬다. 그래서 첫사랑과도 이루어질 수가 없었다.
깊은 고뇌나 심각한 갈등은 없다. 따듯한 인간관계로 이루어진 세계이다. 충분히 고뇌할 상황도 작가는 부드럽게 넘어간다. 그 점이 아쉬웠다. 우리의 실제 생활은 어디 그러한가. 겉으로 드러나기도 하고, 속으로 가려져있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깊은 고뇌를 하기도 하고 심각한 갈등을 빚기도 한다. 그런 고뇌와 갈등을 극복해 가면서 인간관계는 파탄을 빚기도 하지만 발전도 하는데 말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그래서 마음이 따뜻하고 평화롭기도 하다. 실생활이 괴로운데 소설 속에서라도 위안을 얻고 싶은 바람이 충족된다.
이야기가 주는 재미도 있었고, 감동도 받았고, 나의 존재에 대한 위안까지도 얻었다. “우리는 모두 그 자체만으로도 태초의 별만큼이나 아름다운 존재들일지도 모른다”(303쪽) 모든 인간은 각자의 존엄성이 있고 개성이 있고 존재 이유가 있는 유일한 존재다. 나의 존재도 그렇다, 라는 위안을 얻는다. 작가가 전하는 대로, 나의 삶도 매 순간 소중하고 찬란하길 바라며, 더불어 사는 모든 삶들 또한 안녕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