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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인 Dec 27. 2023

농담 혹은 모욕 혹은 예술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밀란 쿤데라


  이 책을 처음 만난 건 영화 《프라하의 봄》을 통해서다. 1989년에 개봉했으니 30년도 넘었다. 재미있었다. 그래서 원작을 찾아 읽은 건데 훨씬 더 좋았다. 영화는 좀 더 흥미에 치중했다면, 소설은 인물들의 심리 묘사와 그 사이 작가의 철학이 곁들여 있어서 좀 더 무겁지만 그만큼 생각거리를 던졌고, 삶과 인간과 시대에 대해 성찰하게 했다. 그런데 이제 다시 읽으니 그 성찰이 좀 달라진다.

  테레자와 토마시, 사비나, 프란츠. 이 4명이 주요 인물이다. 때로는 그들 각자의 시각에서, 때로는 작가의 관찰자적 시각에서 혹은 전지적 시각에서 이야기는 펼쳐진다. 토마시는 다른 의사를 대신해 방문한 시골 마을에서 테레자를 만나게 되고, 테레자가 다시 토마시를 찾아가면서 둘은 함께 살게 된다. 여자에 대한 ‘탐구’를 멈출 수가 없는 토마시는 끊임없이 여자들과 관계를 갖고, 그와 ‘에로틱한 우정’을 나누는 사비나는 자신의 주관대로 사는 화가이다. 대학 교수인 프란츠는 사비나를 사랑해서 부인과 이혼하려고 하지만 오히려 사비나는 그를 떠난다. 여기까지 보자면 딱 3류 에로 소설이다. 그러나 그럴 리가 있겠는가. 지은이가 밀란 쿤데라인데.  

  밀란 쿤데라는 체코의 작가이다. 그는 체코의 민주화 운동인 ‘프라하의 봄’에 참여했다가 이후 프랑스로 망명해서 정착했다. 올해 향년 94 세로 사망했다. ‘프라하의 봄’을 배경으로 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전 세계적으로 사랑을 받은 베스트셀러였다. 주인공 토마시는 신문에 기고했다가 그걸 빌미로 탄압을 받고 의사 직에서도 쫓겨나는데 작가 자신의 경험이 투영됐으리라고 짐작할 수 있다. 그는 프라하 대학의 교수였다. 작가는 ‘나’라는 인물로도 작품에 등장한다. 이 책 외에도 《불멸》 《농담》 등 여러 편의 소설과 《소설의 기술》 등의 에세이, 희곡을 발표했다.

 

  이 작품은 여러 주제로 접근해 볼 수 있다. 성과 사랑과 영혼과 육체. 시대 배경이 개인에 미치는 영향. 니체의 영원회귀, 베토벤의 ‘그래야만 한다’, 데카르트의 인간 중심 사상 등의 철학적인 사고. 테레자와 반려견 카레닌의 관계에서 보이는 더 나은 사랑. 주인공 4명 각자가 지닌 가치관과 존재의 무게. 여기서는 성과 도덕에 대해 간단히 생각해 보겠다.  

  토마시는 여성, 정확히는 여체를 끊임없이 ‘탐구’한다. 토마시는 정부에서 온 사람에게 일종의 심문을 받을 때 거짓말을 하는 것에 대해 죄의식을 느끼고 도덕적 장애를 극복해야만 했다. 타인을 보호하기 위해서 거짓말을 하는 것이 옳다고 느껴지는 그런 상황인데도 거짓말에 대해 죄의식을 느낀다는 것이다. 그런데 자신의 개인적 욕망을 채우는 데는 그런 도덕이 작동하지 않는다. 늘 테레자에게 거짓을 보이니까. “그를 여자 사냥에 내모는 것은 관능의 욕구가 아니라 세계를 정복하려는 욕망이었다.”(329쪽)고 쿤데라는 말한다. 왜 작가는 토마시의 바람기를 이렇게 옹호할까? 결국은 바람기를 현학적으로 묘사한 것뿐이지 않을까? 토마시가 사랑한 건 테레자뿐이고 결국은 그녀를 따라서 안전한 취리히를 떠나 신변의 위협이 있는 프라하로 돌아왔다. 그러니까 괜찮은 것일까? 그는 여전히 여체 탐구를 멈추지 않는다. 어려서 읽을 때는 육체 이면의 심리를 묘사하는 것에 재미를 느꼈다. 작가의 문장들이 인생에 대한 은유이고, 심오한 뜻이 담겨있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좀 나이 들어 읽으니 약간은 냉소적인 시선으로 보게 되고 현학적인 말장난으로 보이기도 한다.  작가의 이름에 홀린걸까.

  이 장구한 사랑과 성에 대한 이야기를 작가의 농담으로 받아들이면 어떨까.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 사비나는 토마시와의 에로틱한 일화를 회상하면서 “그 본질이 농담이 아니라 모욕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면서도 모욕을 거부하기는커녕 오히려 나서서 수치심을 뒤집어쓴다.”(149쪽) “행위의 목격자가 있는 그 순간부터 우리는 좋건 싫건 간에 우리를 관찰하는 눈에 자신을 맞추며, 우리가 하는 그 무엇도 더 이상 진실이 아니다. ... 사비나는 작가가 자신의 모든 것을 까발리는 문학을 경멸했다.”(188쪽) “그녀를 짓눌렀던 것은 짐이 아니라 존재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이었다.”(189쪽) 그래서 그녀는 토마시에게서도 떠나고 프란츠에게서도 떠난다. 멈춤 대신에 계속 뛰어서 멀리 가버린다.

 

  이 책을 농담으로 보든, 모욕으로 보든, 예술로 보든, 어느 쪽으로 접근해도 독자들은 재미있게 보고 많은 것을 생각해 볼 수 있다.


202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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