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습적 사고 뒤집기
《벤야멘타 하인학교》-로베르트 발저 (문학동네, 2014)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가 떠오른다. 소설 같기도, 에세이 같기도, 철학서 같기도 하다. 《벤야멘타 하인학교》의 틀은 소설이다. 그러나 그 내용은 주인공의 생각을 흐르는 대로 풀어놓은, 즉 지은이 로베르트 발저의 사유이다. 그의 철학이라고 해도 좋겠다.
아버지가 주의회 의원이고 귀족 계급인 야콥 폰 군텐은 스스로 벤야멘타 하인학교에 훈련생으로 들어간다. 벤야멘타 학교에서 배우는 것은 거의 없다. 교사도 없다. 훈련생들은 훗날 미미한 존재가 될 것이다.
이 작품에서 줄거리는 그저 틀일 뿐이다. 주인공인 군텐의 생각이 흐르는 대로 문장들이 이어진다. 이 문장들이 나타내는 것은 눈에 보이는 사물들이 아니다. 군텐의 머릿속에 흐르는 의식들이다. 그 의식을 따라가다 보면 삶에 대한, 인간에 대한, 인간의 세상살이에 대한 작가의 통찰을 엿볼 수 있다. “세상에서 성공하려고 애쓰는 사람들은 끔찍스럽게도 다 똑같아 보인다. ∼ 그들 모두 쉽사리 퇴색하는 친절함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서로 닮았다. ∼ 그들은 세상에서 부딪혀가야 할 고통 때문에 친절하고, 불안 때문에 상냥하다. ∼ 그들은 편안해 보이는 적이 없다. 세상의 존경과 영예를 중요시 여기는 사람이 편안함을 느낄 틈이 어디 있단 말인가?”(128-129쪽)
발저의 사유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관습적 사고를 뒤집는다. “크라우스는 어떤 성공도, 어떤 명성도, 어떤 사랑도 꽃피우지 못할 것이다. 아주 잘된 일이다. 성공이란 것은 신경쇠약과 천박한 세계관을 필연적으로 수반하기 때문이다. 성공한 것과 인정받는 것을 보여주려는 사람들은 ∼ 자기만족에 가득 차 뚱뚱해진다. 허영의 힘이 그들을 풍선처럼 부풀린다. ∼인정을 받는다는 것은 사람을 ∼ 정신적으로 혼란시키고 무기력하게 만든다.”(92쪽)
“내 안에 존중할 만한 어떤 것도, 그리고 볼 만한 어떤 것도 없으니 난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가! 작게 존재하고 작게 머무는 것. ∼ 나 자신을 저 밑, 아무 말 없는 어둠 속으로 던져버릴 것이다. 난 오직 저 밑의 영역에서만 숨을 쉴 수 있다.”(162쪽) 얼핏 이해가 안 되고 지은이가 반대로 말하고 있다는 생각도 든다. 어리둥절하다가 어느 순간 깨달음이 온다. 삶의 이면에 숨어있는 진실들이 다가온다. 세상에서 칭송하는 성공, 인정, 존중, 명예가 나의 진실한 행복과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요즘 많은 사람들이 과시적으로 SNS에 글과 사진들을 올리고 있다. 자신이 행복하다고 전시하는 건데, 그들은 과연 행복할까? 그런 SNS가 늘어날수록 우울한 사람이 많아진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나의 행복은 나의 내면에서만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로베르트 발저는 1878년에 스위스의 독일어 사용 가정에서 태어났다. 14세에 가정 형편으로 중학교를 중퇴했고 나중에는 하인 학교에 다니고 오버슐레지엔의 성에서 집사로 일하기도 했다. 인생 후반기에는 30년 가까이 정신병원에서 보내다 1956년에 사망했다. 동시대의 저명한 작가인 헤르만 헤세나 프란츠 카프카, 철학자이기도 한 발터 벤야민 등에게 칭송받았고 많이 언급되었지만 일반 대중들에게는 잊혔다가 사후에야 재발견되었고 재평가받으면서 현재는 스위스의 대표 작가로 꼽힌다. 그의 장편 소설인 《벤야멘타 하인학교》는 한 번 읽고 이해하거나 공감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처음 보고 뭔가 끌리는 점이 있다면 다시 보자. 더 많이 끌리게 될 것이다. 기성적, 관습적 사고에서 벗어나고 싶다면 이 책을 보자. 다르게 생각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