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격의 신점썰!
언제나 딴짓하는 것은 참 재밌다. 써야 할 이력서와 만들어야 할 포트폴리오가 쌓여있음에도 백지를 펼쳐 타자를 치는 것이 이리 재밌으니 말이다. 여하튼 한창 이력서를 작성하고 있던 삼십 분 전. 엄마가 내 이력서를 보더니 이렇게 일축한다.
"너는 참 잔재주는 많은데 창의력은 없다."
나도 안다. 나는 창의력 따위의 말과 거리가 먼 사람이라는 것을. 그러니 오늘도 핀터레스트와 노트폴리오를 보며 그럴싸한 작업물을 만드는데 머리를 쥐어싸며 괴로워하는 것이겠지. 내가 비범한 사람이었다면, 책상에 앉은 두 시간 동안 이력서쯤은 다 만들었겠다만 나는 지극히 범한 사람이니 2시간 동안 글자의 배치만 고민한다. 이름을 맨 위에다가? 아님 중간에 세로 쓰기? 왜 여기는 이력서가 자유 양식인 것이야. 괜히 글보다 이미지가 중요해 보일 것 같아 이미지를 고르는 데만 한 세월이 걸린다. 괜히 기운이 풀려 밀려있던 인스타그램 피드를 업로드 하기 위해 포토샵을 켠다. 한창 이미지를 넣고 작업을 빠르게 완료하고 다시 이력서로 돌아가려 하니 집중이 안 된다.
사실 이력서를 작성하는 내내 어제 보았던 신점이 아른거린다. 신점을 예약한 것은 올해 1월이었다. 바야흐로 12월 31일 오후 11시경. 친구와 함께 1월 1일을 맞이하여 술을 마시던 참이었다. 내일이면 벌써 2024년이라고 시간이 참 빨리 간다며 시시콜콜 이야기를 덧붙이다 문득 올해의 계획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여러 이야기가 오가던 와중, 의식의 흐름에 따라 신점 이야기가 나왔는데, 예전에 아는 오빠에게 들었던 점집이 생각났다. 있지, 인천에 용한 점집이 있는데 아는 오빠가 거기서 점을 봤대. 그랬더니 이런 점이 나왔다는 거야. 흥미롭게 듣던 친구가 자신은 한 번도 점을 본 적이 없다는 말에 같이 갑작스레 점 보러 가자는 얘기를 꺼내고 만 것은 그 탓이었다. 그렇게 즉흥적으로 그 점집을 예약한 것이었다. 1월도 아니고 2월 초 아주 애매한 시기에. 모든 것이 술 때문이었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 당일이 되었다. 친구와 나는 떨리는 마음으로 점집을 방문했다. 하필 전 날 모 유튜버의 결혼할 상대를 맞춘 무당이 SNS에 거론되며 사람들 사이에서 이슈가 되었던 터라 더욱 긴장되었다. 방문했는데, 나는 결혼을 못한다고 하면 어떻게 하지. 아니면 취업 안된다고 악담을 퍼붓는 거 아니야? 초인종을 누르고 들어간 점집 내부는 세련된 가정집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방 한 켠에 신당이 아담하게 마련되어 있었다. 현금으로 준비한 복채를 소심하게 주섬거리며 짐을 조심스레 놓는다. 잠깐 대기하고 있으면 들어가겠다는 무당의 말에 어떤 질문을 할지 복기를 시작했다. 건강운 물어봐야 하고 학업운이랑 취업운, 이사운도 물어봐야겠다. 조곤조곤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시간이 되었는지 무당이 들어온다.
무당이 향을 붙이자 본격적으로 점이 시작된다. 내 이름과 생일, 친구의 이름과 생일을 적더니 내 이름 밑에 마구 글씨를 써 내려간다. 긴장하며 그것을 멍하니 보고 있는데 무당이 돌연 나에게 말을 꺼낸다. 왜 모르겠어? 그러니까 네가 이도저도 안 되는 거야. 막 집에 들어왔을 때는 친절하게 응대하던 무당이 점을 보기 시작하니 사람이 180도 달라진다. 그녀가 던진 냉철한 말 한마디가 머릿속을 복잡하게 헤집는다. 내가... 뭘 모르고 있더라? 아니, 내가 아는 것은 있나? 그나저나 내가 이도저도 안 되는 사람이라고? 이게 대체 무슨 뜻이야! 곰곰이 생각하는데 점쟁이는 계속 내 머릿속에 모르겠다는 말만 가득하다고 한숨 쉰다. 이미 다 알고 있다는 무당의 눈빛에 압도되어 나도 모르게 정돈되지 않은 생각이 주룩주룩 흘러나온다.
아, 제가 원래는 출판편집자를 하고 싶었는데요.... 요즘 기획 쪽이 워낙 티오도 없고 그러다 보니 마케팅으로 노선을 회선 해서 미디어 편집을 배워보려고 하거든요. 더듬거리며 꺼내는 말을 듣던 무당이 기획 이야기를 할 때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마케팅 단어를 꺼내자마자 혀를 쯧쯧하고 찬다. 그러니까, 왜 갑자기 마케팅이냐고. 원래 하던 거 하면 되는데 자꾸 이상한 거 하려고 하니까 이도저도 안 되는 거 아니야.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어 고개를 테이블 쪽으로 내려버리고 말았다. 아니, 저는 점을 보러 온 거지 혼나러 온 건 아니었는데요.... 가만히 종이를 내려다보던 무당이 말을 덧붙인다. 네 사주에는 비디오가 없어. 그런데 어떻게 미디어를 한다는 거야? 그건 어떻게 아신 건가요. 제가 영상 편집을 못해서 그 길을 힘들어 하고 있던 것을. 점점 혹하는 마음으로 여러 이야기를 나누다가 인턴에 관련된 이야기가 나왔다. 그럼 혹시 이번 년에 휴학하고 인턴은 넣어도 될까요? 8개월은 괜찮아. 근데 어차피 2년 간은 짧게 밖에 일 못해. 공부나 열심히 해. 공부 열심히 하고 26년에 취업해야 해. 아아 그렇군요. 그런데 제가 이번에 넣으려던 인턴이 8개월이었던 건 대체 어떻게 아신 건가요. 6개월도 아니고 12개월도 아니고 콕 집어서 8개월이라고....
충격의 신점을 보고 정신없이 나와 차이나타운에서 짜장면을 먹으며 복기할수록 기가 막혔다. 학업이나 취업운은 그렇다 치더라도 내가 평소에 근육 마디, 관절 마디가 안 좋다는 것은 어떻게 알았으며, 말을 꺼내지 않았음에도 연애 시기를 궁금해한다는 것은 어떻게 알고 앞으로의 연애운까지 술술 말해주다니.(물론 이건 모두가 궁금해하니 자연스레 말해준 것이겠지.) 혼이 빠졌지만, 희망은 생겼다. 무당님은 비록 나의 사주를 점친 것에 불과했지만 자존감을 많이 얻었다. 사실 그동안 공부를 하기 싫어 빨리 취업을 하고 싶어 마케팅 인턴을 넣었었다. 넣은 지원서는 1차는 붙는데 항상 면접에서 떨어졌다. 자존감을 잃어가던 차에 마케팅 인턴이 아닌 다른 직종이지만 나의 스펙과 딱 맞는 인턴 자리를 발견하게 되었고, 한 번 넣어보자 생각하면서도 그냥 복학을 할까 말까 고민했다. 그런데 용기가 생겼다. 넣고 안 되면 공부하면 되고, 아니면 하면서 경력을 쌓고 내 갈길 가면 되지.
엄마에게 신이 나서 그날의 이야기를 하니 내가 생각해도 너는 마케팅은 아니다. 너는 그냥 사서나 출판사 쪽이 적성에 맞다며 공감했다. 이력서를 쓰는 것을 보며 싸늘한 비수를 날린 엄마가 방을 나가며 말한다.
"그래도 그 점쟁이가 신기하긴 하다. 그 짧은 사이에 너에 대해 그렇게 파악하고 말이다."
그러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