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집배원 Feb 05. 2024

너는 나를 좋아하는가

소녀는 따로 자란다, 안담



   요컨대 이것은 놀라운 일이다. 놀라운 일. 오늘은 그 핫하다는 스타필드 별마당 도서관에서 책을 읽었다.  집에 쌓여있는 책이 수십 권임에도 책장을 구경하다가, 장바구니에 담아두었던 책 서너 권을 골랐다. 옆에 있던 친구는 내가 추천해 준 책을 가져왔고 우리는 나란히 앉아 조용히 책을 펼쳤다. 아, 책을 읽었다는 것이 놀라운 일은 아니고, 그저 너무나도 나의 이야기와 닮아 있는 책을 이 공간에서 읽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읽은 책의 이름은 "소녀는 따로 자란다"라는 제목이었는데, 표지 때문에 논란이 되었던 책이기도 하다. '차라리 여자랑 사귀고 싶다'니 강렬한 한 마디다.


   이 책이 딱히 엄청나게 사회비판적이라거나 페미니즘적이어서 감명 깊은 것은 아니었다. 그저 어쩜 이렇게 나의 초등학교 4학년 시절과 똑같은 이야기가 있을 수 있냐는 생각에 놀랍다. 이런 이야기가 흔한 것이었나? 작품을 읽는 동안 과거가 생생하게 재생된다. 이 시기를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암흑의 시기. 그것도 잊고 싶은 흑역사가 잔뜩인 어떤 기억이다. 당시 나는 쇼트커트 머리를 한 여자애를 동경했던. 무리에 끼고 싶어 탐색전을 벌였으나 내 자리를 얻지 못해 교실 뒤편에 움츠려 있어야 했던 통통한 아이였다. 통통한 아이. 그러니까, 그것이 문제였다. 아니, 통통하다는 것은 차치하고 아디다스 져지나 아베크롬비 집업과 같은 비싼 옷을 걸칠 수도 없다는 현실도, 다른 여자애들에 비해 예쁘지 않던 얼굴을 가릴 수 없다는 것도 문제였다. 나보다 통통한 아이들과 친구 하며 그것을 위안 삼아 나의 현실에 안주하고 했던 약은 아이. 그나마 있던 친구와 동떨어져 반에서 적응하지 못하고 도태되었던 가련한 아이. 그것이 나였다.


   아직도 기억이 나는 모종의 사건이 있다. 학교 체육 시간이었는데, 팀장이 뽑고 싶은 아이들을 자신의 팀으로 데리고 와 피구를 해야만 했다. 나는 평소와 다름없이 길고 풍성한 앞머리로 눈을 가리고 강당 한 구석에서 숨을 죽이고 있었다. 집에 가고 싶었다. 한 명씩 아이들이 호명될 때마다 강당에는 웃음이 가득 찼다. 리더들은 뽑고 싶은 아이를 다 뽑아도 사람이 없어질 때까지 호명을 계속해야 한다. 체육을 잘하는 사람, 나와 친한 친구, 그나마 나은 사람, 그나마 호감을 가진 사람들까지 호명되고 나니 나만 남았다. 나만. 그날 나는 집에 와서 학교가 싫다며 엉엉 울었다. 정체 모를 기분에 압도되어 엄마가 던지는 말 따위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고 나는 그저 초라한 마음과 속상함을 감추기 위해 눈물을 쏟아야만 했다. 그것이 생애 첫 우울이었다.



   그러니까 놀라운 일이다. 이런 이야기를 소설로 읽을 수 있다는 것이. 소설 속 '나'는 짧은 머리에 보이시한 옷차림을 고수한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히 남성성을 동경하기 때문에, 혹은 그런 옷을 좋아해서가 아니라 어머니인 '수'의 영향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사실 긴 머리를 하고 애교를 부리며 사랑받는 것을 동경하는 보통의 어린아이이다. 간혹 팔짱을 끼는 쪽이 되고 싶은, 위에서 애정을 표하는 것이 아닌 아래에서 애정을 표하고 싶은 당연히 여자이기에 생기는 생리적 욕구에 충실하고픈 어린아이이다. '나'를 보면 내 어린 시절이 생각난다. 지금은 손절한 어떤 여자 아이가.


   그 아이도 책 속에 나오는 다이애나이거나 공주이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니 항상 내게 먼저 팔짱을 꼈고, 야한 이야기에 무지한 아이에게 욕정이라는 것을 가르쳤으며 굳이 좁은 침대 옆에 나를 뉘이고 잠을 청했을 것이다. 그 경험을 뭐라고 정의하면 좋을까. 모르겠다. 알 수 없는 어떤 감정에 대해 마주친 지금은 그저 아무렴 어떠냐고 하고 싶지만 어딘가 찜찜하다. 그 아이에게 왠지 모를 위화감을 느낀 것은 중학교 1학년 때였다. 평소와 같이 그 아이의 집에 가서 라면을 먹고 침대에 누워 좋아하는 유튜브의 영상을 보던 어느 날. 나에게 그런 것도 모르냐며 야한 것에 대해 잘 아는 자신을 자랑하던 그 아이가 낯설어 막대했던 시기가 있었다. 그리고 중학교 2학년, 나는 새로운 친구들을 사귀었고 점차 멀어지다가 그 아이는 새로운 '나'를 찾았고 나를 버렸다. 그것은 내가 '위'의 역할을 잘 소화해 내지 못해서 그랬던 것일까. 흘러가버린 어떤 이야기이다.


"차라리 여자랑 사귀고 싶다고 말하면서 운다. 여자를 좋아하고 싶다. 나는 그게 무슨 말인지 정확하게 안다. 그건 호강을 하고 싶다는 뜻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오라, 지리멸렬한 인생이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