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요일에 있던 약속이 하루 전에 취소돼서 휴일 하루가 텅 비어버렸다. 원래는 숙제 좀 하다가 여행기를 마저 쓸 계획이었는데, 그마저도 2,3편 쓰고나니 손이 아파 관두고, 할 게 없어 늘어지려던 찰나, 이렇게 쓸데없이 시간 보내지 말고 영화라도 봐야겠다는 생각으로 앱으로 예매를 했다. 남은 시간은 3시간, 가기 전까지 뭘할까 고민하다가 핸드폰을 책상에 둔 채 잠시 낮잠을 잤다.
일어나니 버스 도착시간이 다 돼 허겁지겁 나갔는데, 이번에도 학교 교통카드를 두고오는 바람에 하는 수 없이 돈을 내고 버스를 탔다. 그렇게 20분 정도 박완서 선생의 에세이를 읽으니 영화관에 도착, 기사님에게 감사 인사를 건네고 영화관으로 향했다. 휴일이라 평소와 달리 영화관 안에 사람이 많았고, 매점도 인산인해를 이뤘다. 미국에선 기본적으로 팝콘이 양도 많고 무엇보다 가격이 너무 비싸 보통 친구랑 같이 갈 때만 사먹는 편인데(지난번 판교에서 인사이드 아웃 2 볼 때 친구가 팝콘이랑 같이 영화 굿즈를 사자고 한 거를 애도 아니고 이런 걸 왜 사냐 뭐라한 게 좀 미안해진다), 어느새부턴가 영화보는 게 순전히 혼자만의 취미가 돼버려 매점에서 뭘 사먹는 일이 거의 없다.
영화는 그럭저럭 재밌었다. 입장이 뒤바뀐 상황에서 과거 인간의 역사를 답습하는 유인원과, 그 자리를 다시 되찾으려고 하는 인간 사이의 갈등을 잘 그렸는데, 아쉬운 점이라면 서사 자체가 긴장감이 떨어졌고, 잠재적 적이자 협력자였던 메이라는 캐릭터의 개성에 조금 아쉬움이 남았다. 그래도 볼 영화가 없어 고른 거 치고는 들인 시간이 그다지 아깝진 않았다.
영화가 끝나자마자 돌아가는 길에 배가 고파 버스를 기다릴 겸 근처 Trader Joe’s에 갔다. 식재료를 좀 사려고 했다가 가보니 휴일이라 오후 5시까지만 영업하고, 당시엔 직원들이 정리를 마무리하고 퇴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지나가서 버스 정류장으로 향하던 와중에 버거킹이 눈에 들어왔다. 미국에 온 이후로 버거킹은 단 한 번 가봤다. 햄버거 자체를 여기서 자주 안 먹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통새우 와퍼가 미국에는 없어서 버거킹 자체를 아예 안 가고, 대신 집에서 가까운 Super Duper 위주로만 다닌다(여기 진짜 맛있다. 무조건 추천).
그러나 오늘은 유독 견디기 힘들었던 게, 이른 오후에 먹어야했던 한 끼를 일찍 일어난 탓에 배가 고파 정오가 되기도 전에 밥을 먹어서 영화가 끝나고 나왔을 때에는 이미 밥 먹은지 7시간 넘게 지난 후였다. 미국에 온 이후로 최대한 허기에 익숙해지는 연습을 하고 있지만, 오전에 한 끼만 먹은 후 마주한 버거킹은 도저히 지나칠 수 없었고, 결국 가게 문 앞까지 다다랐다. 그러나 문을 열고 들어가 카운터 앞에 길게 늘어져있는 줄을 보자마자 내가 왜 허기에 익숙해지려고 했는지 떠올렸다. 게다가 어제 배고픔에 괜히 기분이 더 다운되는 것 같아 오랜만에 하루에 제대로 된 두 끼 식사를 했는데, 이미 전날 예외를 둔 상황에서 계속해서 면죄부를 주는 상황이 반복되면 가뜩이나 미약한 의지와 함께 목표의식이 무너질거라는 두려움이 밀려왔고, 결국 그대로 마음을 다잡고 발걸음을 돌려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일상처럼 다가오는 허기를 견디는 건 살을 빼기 위한 단계 중 하나이지만, 동시에 적당함을 받아들이고 쓸데없는 욕심을 줄이려는 삶의 태도와도 밀접해있다. 한순간 찾아오는 유혹을 참아내면서 인내심을 기르고, 사소한 것에 연연하지 않으면서도 찾아오는 작은 순간들에 감사하는 마음을 키우는 연습이지만, 동시에 우리가 좋아할법한 이성은 돼지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친구의 날카로운 직언에서 비롯된 좋아보이는 육체에 대한 속물적 갈망을 충족시키는 과정이기도 하다. 언제까지 이런 상황을 지속해나갈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방학동안 남은 한 달 반 가량은 계속 이대로 이어나갈 생각이고, 더 나아가 어느 때나 에너지 레벨을 유지할 수 있는 건강한 생활 습관을 유지하는 관성을 만드는 게 목표다.
버스를 기다리면서 구글 맵 교통 정보를 보니 제시간에 온다고 했다. 문득 내가 갈망하는 것들은 언제 찾아올지 궁금해졌다. 정해진 시간에 맞게 도착하는 버스와 달리, 그런 것들은 이미 내가 느끼는 제시간을 넘긴 듯한 상황에서 괜히 조바심이 들기도 하지만, 결국 뭐든 때가 있을 거라는 믿음을 지켜야 한다. 그래서 그런가, 버거킹을 뒤로 한 채 기꺼이 받아들인 허기가 짧게나마 허한 내 마음을 채워주는 듯한 위로를 전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