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이라 오전에 과제와 할 일을 마무리하고 영화관에 갔다. 최근에 개봉한 콰이어트 플레이스: 데이원을 Dolby Cinema 플랫폼으로 봤는데, 생각했던 것보다 호러보다는 일종의 드라마에 가까워 무서운 장면이 그리 많이 나오진 않아 상대적으로 긴장이 덜했는데, 그마저도 괴물이 나올 때마다 화들짝 놀라서 보는 내내 무서운 장면에선 토끼처럼 귀를 접고 있었다. 그렇게 영화가 끝나고도 놀란 심장은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는데, 이미 극장을 나왔는데도 계속해서 여파가 가시지 않는 건 어딘가 좀 신기하달까. 뜬금없지만 설렘과 두려움 사이에서 보이는 반응의 차이가 그리 크지 않은 것 같기도 하다.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려는데, 안에는 무지개색 페이스 페인팅을 한 사람들이 여럿 타고 있었다. 6월은 프라이드 먼스(Pride Month)인데, 미국에서 제대로 산지 1년이 채 안 돼서 아직까진 이런 행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게 마냥 신기하기만 하다. 서울에서 이런 거 한다고 하면 매번 기독교 단체랑 충돌하고 뉴스 댓글에선 여론의 뭇매를 맞고 있을 텐데, 이런 것도 여기에서만 할 수 있는 경험이니 나중에 기회가 되면 구경이라도 한 번 가보는 것도 괜찮아 보인다.
버스가 집 근처 정류장에 도착해서 내리는데, 하늘 저 멀리서 떠있는 하트 모양 구름이 눈에 들어왔다. 심장이자 사랑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모양의 구름을 보면서 불현듯 며칠 전 프라이드 먼스와 성소수자 관련된 이야기를 할 때 한 말을 떠올렸다.
“우리나라에서 사람들이 동성애는 죄악이다 이런 얘기 많이 하잖아. 그런데 본질적으로 생각해 보면 저출산이나 남녀 갈등 같이 우리 사회가 가진 가장 근본적인 문제들은 이런저런 이유로 사람들이 사랑을 안 하는 거 아닐까? 그걸 깨닫고 난 이후에는 동성애가 잘못된 거라고 생각 안 해. 진짜 문제는 형태가 다른 사랑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사랑을 안 하는 나 같은 사람들이지.”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말이 어떤 가치를 내보이기 위함이었다기보다 나의 상황에 대한 자조적인 푸념에 가까웠던 것 같디. 게다가 인간끼리 사랑하는 걸 두고 형태를 가지고 이래라저래라 따져야 하는 게 피곤하다. 매년 서울 퀴어축제 앞에서 열리는 기독교 단체의 반대 시위를 보면, 저런 것까지 소신 있게 나서야 할 정도로 동성애가 정말 이 세상에서 심각한 문제인 건지, 아님 그들의 삶에 동성애를 반대하는 것 이상의 중요한 문제가 없는 건지 구분이 안 간다. 뉴스를 보면 나오는 사람들은 대부분 나이 드신 분들인데, 가뜩이나 더운 6월에 땡볕 아래에서 단체로 모여서 맞서 싸우며 지켜야 할 숭고한 가치가 있는 건가. 그 가치라는 게 도대체 뭘까.
그런 사람들에 대한 편견일지도 모르겠지만,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고민하기는 보다는 갈등 자체에 사로잡혀있는 듯한 사람들을 보면 세상 돌아가는 거에 무관심한 것보다도 못하다고 생각하는데(지난날의 경험으로부터 얻은 교훈이다), 세상 자체가 한쪽은 정치충, 다른 한쪽은 무관심으로 정의되는 양극화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아니 사실 그런 것들은 해결할 게 아니라 우리 모두가 안고 살아가야 하는 문제인 것 같기도 하다.
한국 사회가 무너지는 현상의 본질은 더 이상 구성원의 이상을 충족시켜 줄 수 없는 경제 상황, 인구 패러다임의 변화, 그리고 무엇보다 그것에 맞게 변화하기는커녕 더 극단적으로 이상에 몰아넣는 사회공동의 가치관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가끔 민주주의 시스템에 회의가 드는 부분이, 문제를 마주해야 하는 사람들보다, 그럴 필요가 없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의사결정에 너무나도 많이 반영되는 것 같기도 하고, 요즘 같은 시대에선 무엇보다 소음과 목소리 구별 자체가 안되는 것 같다.
이런 세상에서 혐오나 편견 없이 올바른 자세로 세상을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지조차 의문이다. 해결되지 않는 문제에 있어서 남탓하는 건 정말 쉬운데, 어려운 문제네, 미래에 어떻게 해야 내 자녀들한테 편향되지 않는 시선을 가지고, 올바르게 잡힌 삶의 토대 위에서 개인과 세상의 문제를 대하게 할 수 있을까. 결국 이건 내가 20대라는 수많은 유입의 시기를 어떻게 보내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과도 결부되어 있다. 나 역시 가족 배경을 생각하면 결코 편향적이지 않다고 할 수 없는데, 세상의 일들을 넓으면서도 깊게 바라볼 수 있는 시야와 무엇보다 현상을 한 가지로 규정짓지 않고 입체적인 관점에서 접근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