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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으로 가는 길 1

by 일기쓰는 복학생

오늘부터 목요일까지 3박 4일 동안 군산에 있는 할아버지 집과, 내가 어린 시절을 보낸 도시, 전주를 다녀온다. 방학 전에 세운 거창한 계획을 생각하면 용두사미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 한국에 처음 왔을 때 이런저런 약속을 다니고 저녁마다 야구를 보느라 바빴고, 도중에 몽골도 갔다 오느라 한 일정에 긴 시간을 할애할 수가 없었다. 생각보다 한 달이라는 시간이 길지 않기도 하고, 야구도 보면서 사람도 만나려니까 온전히 빈 시간이 별로 없다.

늦게나마 빈 시간을 만들어 군산으로 가는 기차를 예매했다. 원래 명절 때마다 수원에서 군산역까지 무궁화나 새마을호를 타고 갔는데, 예전보다 공기에 더 민감해진 건지 지난번 청주공항에서 집으로 돌아가면서 무궁화호를 탔을 때 안이 너무 덥고 숨이 막히는 듯하는 느낌을 받아(이것도 살쪄서 그런 건가) 이번에는 다르게 가보기로 했다. SRT로 수서에서 익산까지 간 후, 버스로 갈아타 대야(군산에 있는 작은 동네)로 가기로 했다. 오후 1시 9분 출발시간에 맞게 12시 정각 즈음에 집을 나왔는데, 마침 지하철 도착시간이 딱 맞아 도착했을 때 30분 넘게 시간이 남아있었다. 그 덕에 간단하게 역사 내 식당에서 김밥과 라면 세트를 먹고 갈 수 있었다.


주문을 할 때 약간의 해프닝이 있었는데 계산대에 서있는데도 직원 분이 반응이 없는 채 음식 준비만 하고 계셨는데, 별말 없이 기다리다 옆에서 들어온 사람이 향한 곳을 보고서야 키오스크로 주문을 해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이젠 사람이 아니라 기계를 통해 주문하는 게 익숙하지만, 막상 주문이라는 과정에서 사람이 완전히 배제된 듯한 느낌이 확 와닿으니 조금 위화감이 들었다.


식사를 마친 후 여유롭게 열차를 탔다. 확실히 고속철도라 중간 정차역이 거의 없어 막힘없이 빠르게 가지만, 문제는 서울에서 전라북도 익산까지 차로 2-3시간 족히 걸리는 거리를 가는데 1시간 10분 밖에 안 걸려 도중에 잠에 들 수 없다는 거였다. 자칫하면 못 일어나면 눈을 떴을 때 광주송정이나 목표역에서 내릴 수도 있어 어떻게든 졸린 눈을 부릅뜬 채 바깥 풍경을 구경했다. 기존에 이용하던 무궁화, 새마을과 달리 소요시간이 절반도 안되고, 무엇보다 내부 공기가 매우 쾌적해 괜히 비싼 돈 주고 SRT나 KTX를 타는 게 아니구나 싶었지만, 작년에 도쿄발 교토행 신칸센처럼 기차 안에서 여유를 만끽할 수 없어 약간의 아쉬움이 남았다.


드넓게 펼쳐진 논밭을 보면서 생각에 잠겨있으니 금세 익산역에 도착했다. 할아버지가 이틀 전에 일러준 대로 역사에서 나와 오른쪽으로 꺾어 잠깐 가니 금방 버스승강장이 눈에 들어왔다. 실내정류장처럼 생긴 대합실 겸 매표소로 가 직원 할아버지에게 대야로 가는 표 한 장을 달라고 했다. 가격은 고작 2000원, 거리 생각하면 매우 저렴한 가격이다. 지방이라서 가능한 건가. 10년 전에는 이런 느낌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 하긴 그때는 매번 엄마가 내서 그런 감이 아예 없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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