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죽음을 돌보는 사람입니다"를 읽고 쓴 학생의 비평문을 읽고 나서
죽음은 나의 것이 아닌 타인의 몫이라는 점을 '서로를 부르기 위한 각자의 이름'에 빗대어 말한 부분이 인상적이었어. 가까운 이의 죽음을 애도했던 경험을 얘기하면서 책이 말하는 고독사 문제를 말하는 전개도 훌륭했고. S가 책을 얼마나 진지하게 자기 삶 속으로 끌어와 고민하고 감상했는지 엿볼 수 있었달까.
죽음은 어떤 의미일까요? 저는 죽음은 이름을 닮았다고 생각합니다. 이름은 분명 다른 누구의 것도 아닌 저의 것입니다. 하지만 실제로 그 이름을 사용하고 불러주는 것은 타인입니다. 나의 것이지만 나의 것의 아닌 것 같습니다. 죽음도 죽은 사람의 것이 아니라, 산 사람의 것 같습니다. 죽은 사람은 슬퍼하지도, 눈물을 흘리지도, 그리워하지도 않습니다. 당연합니다. 죽었으니까요. 죽음을 느끼는 것은 모두 산 사람들의 몫입니다. - 'S'의 글에서
영화 <코코>는 선생님도 참 재밌게 봤던 영화였어. 볼 때마다 슬며시 눈물이 나기도 하고 가까이에 돌아가신 분들을 떠올리며 아득해지는 느낌을 받고는 하거든.
자신의 삶이 죽음 뒤에도 지상에 남아 그 의미를 영위하기를 바랍니다. 이는 사람들이 간절히 원하는 것이자 절대 이뤄지지 못할, 지는 꽃같이 허무한 소망입니다. - 'S'의 글에서
S가 말한 '지는 꽃같이 허무한 소망', 그것이 누군가가 죽음 이후에도 영원히 기억되기를 원하는 것이라면 정말 그렇게 볼 수 있을 거야. 도무지 현실적이지도 않고 이기적인 욕심처럼도 보이잖아. 다만 여기에 개인적인 생각을 조금만 더하자면 죽은 이들에 대한 사랑과 기억이 몇백 년에 걸쳐 이어질 것이 아니라, 다만 누군가의 가족과 친구로서 한 개인의 평생의 삶 정도로만 한정한다면 이대로도 꽤 괜찮은 소망이 아닐까 싶어. 말하자면 한 백 년 정도쯤 되는 한 세대 정도의 기간이라고 할까.
그러나 꽃이 진다고 그 아름다운 꽃잎들은 아무 뜻 없는 것인가요. 죽은 사람의 감긴 눈에 세상이 담길 순 없지만, 산 사람들은 길가의 민들레 한송이도 가만히 앉아 감상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죽은 이들을 추억합니다. 고인을 오래오래 기억하고자 하는 의지는 죽은 이들의 소망을 이뤄주고, 산 사람들을 위로해줍니다. - 'S'의 글에서
선생님도 이점에 있어서 S의 생각에 공감해. 기억이라고 할 수도 있고 추억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에 생전 그 사람과의 사랑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충분히 살아남은 사람들이 겪는 슬픔을 위로하는 역할을 할 수 있을 거야. 어쩌면 영화에서 말하는 죽은 이에 대한 기억은 사랑이라는 감정 그 자체이면서 이러한 감정의 크기와 형태를 보여주는 장치가 아니었을까 싶구나.
어떤 이의 죽음은 수많은 조각상과 어지러운 미로, 웅장한 피라미드로 장식되었습니다. 한편, 같은 날에 죽은 어떤 이의 시신은 나무로 깎은 비석조차 없이 버려졌습니다. 이 차이가 과연 고대 이집트에서만 나타나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수백 년이 지난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공평한 동시에 공평하지 않습니다. - 'S'의 글에서
S의 말대로 죽음은 죽음을 맞은 당사자가 아닌, 살아남은 사람들의 몫이라는 점에서 누구에게나 찾아올 죽음이 사실은 그 형태가 전혀 공평하지도 않고 그 느낌마저 다르게 전해지는 것 같아. 이것을 사회 문제로 두고 본다면 S가 읽은 책에서 말한 것 같은 고독사가 이제는 어느 개인의 불우한 처지나 운명이 아닌, 의료보험과 같이 사회가 책임을 느끼고 관리해야 할 문제로 볼 수 있을 거야. 그리고 우리 사회가 바람직한 방향으로만 잘 나아간다면 이것이 보편적인 현실과 제도로 보장되는 것도 그리 먼 미래의 일도 아니겠지.
덧붙여 그러려면 개인으로서의 사회 구성원 모두가, S가 그랬던 것처럼, 다른 모르는 사람의 죽음에도 안타까워할 수 있고, 특히 소외된 누군가의 부고에 대해서는 더 마음 아파하기도 하면서 공감할 줄 알아야 할 거야. 그리고 그것이 S가 바란다고 했던 그 세상이 아니었을까 싶다. S는 사람들의 죽음이 공평하면 좋겠다는 바람이 자기 자신을 가장 우선한 생각에서 비롯했다고 했지만, 한편으로 그런 S의 생각과 바람은 개인보다 타인과 사회를 돌아보고 생각할 수 있었던 너의 아름다움에서 비롯한 것이 아닐까 한다.
선생님이 S의 글을 평가하는 심사에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이렇게나마 작은 심사평을 더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