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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안 Feb 07. 2024

제주도를 떠났더니 바다에 가까워졌다.

제주도를 떠났더니 바다에 가까워졌다.

가끔 나는 내가 무섭다. 생긴 것과 다르게 차가운 면이 있는 나는 회사에 정을 떼는 속도가 초고속이다. 보라카이에서 마사지를 받고 만족하며 일어나 벽을 쳐다보고 마음을 먹었다. 고작 침대 두 개가 들어가는 공간도 안전을 위한 소방시설이 다 설치되어 있었다. 


우리나라보다 못 사는 필리핀의 3만 원짜리 마사지 가게조차도 있다니 놀랬다. 역시 내가 그렇게 윗사람들에게 주장했던 것이 맞았다. 이놈의 회사 일이라도 배울 게 있으면 눌러앉아보려 했건만 뛰쳐나와야겠다는 결론이 쉽게 났다. 여름휴가를 다녀오고 3호인 팀장에게 그만두겠다고 이야기하니 오늘은 2호가 없으니 다음 주 회사 결재 순서에 따라 2호, 1호 순서로 이야기해야 한다고 한다. 

완벽주의 성향인 나는 미리 인사담당자에게 1호가 직원의 퇴사 의사를 인지한 이후엔 언제든 퇴사가 가능하다는 조사까지 마쳤다. 


팀장님, 어디서 약을 팔려고 그러세요.
제가 허허실실 웃고 다녔다고 바보 아니에요.

왜 그만두려 하는지 묻지도 않고 구렁이 담 넘어가듯 절차부터 말하는 게 정이 확 떨어진다.     

발목을 잡을 명분이 없으니 내놓는 카드가 참으로 비루하다. 무엇보다 이미 마음을 정했다. 시간을 미루면 마치 남자 친구와 헤어지지 못하는 미련 있는 여자 친구처럼 보이는 질척거림도 싫다. 하극상이든 말든 나부터 숨 좀 쉬고 보자. 하지만 역시 졸보임을 숨길 수 없어 한 시간 동안 주문을 외우고 1호의 출장이 없는지 확인한 뒤 대사를 외운다. 그러던 갑자기 1호의 전화 호출이다. 


‘아, 오늘 얘기하고 주말 동안 발 뻗고 보내려고 했는데’ 

인사담당자가 말해준 한마디가 떠오른다. ‘주임님 마음만 생각하세요. 저들은 주임님을 생각하지 않아요.’ 냅다 원장실 문에 노크 3번을 때린다. 들어보지 못한 하이톤으로 나에게 왜 일이 늦어지는지 따져 묻는다. 내 탓이 아니라는 억울함과 평소의 나답지 않은 패턴으로 퇴사 이야기를 꺼내야 한다는 부담감에 갑자기 눈물이 나온다. 1호님은 티슈를 건네며 일하다 보면 마음대로 안 되는 게 있고 그러면서 배우는 거라며 위로한다. 엄마랑 같은 나이라 그런지 순간 자식 같은 마음이 발동했나 보다.

‘하 씨... 달래주는 분위기로 가면 안 되는데 오늘 말해야 하는데’

1호 입장에서는 생뚱맞겠지만 질러야 한다. “2호님이 자리에 없지만 팀 내 업무조정과 후임자 채용을 위해 빨리 이야기하는 게 회사에 좋을 것 같아서”라며, 사실은 내가 편해지자고 하는 말이지만 사측 입장을 배려하여 고심 끝에 말한다고 고급지게 포장한다. 


미리 계획한 복수대로 한 달 가까이 월급루팡러로 보냈다. 죽상이었던 얼굴은 웃음꽃이 가득 피어나고 피부까지 뽀얘진다. 보라카이 햇빛에 딴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말이다. 인수인계서를 10장을 빼곡하게 써 내려가고 친절히 캡처까지 하며 남긴다. ‘이것마저 이해가 안 된다면 한글을 모르는 것이오니 나를 찾지 마시고 한글 공부를 하시옵소서.’라는 분위기를 팍팍 곁들인다. 결재권자들이 행간 의미를 읽었는지 빠르게 결재가 된다. 회사에 갖다 놓은 짐부터 정리하기 시작하여 제주도에서 1년 동안 묵힌 짐들을 서울로 부치기 위해 정리한다. 이삿짐을 보내고 서울에서 프리다이빙 강습을 받기 위해 휴가를 냈다. 5m 깊이의 올림픽 잠수풀은 상상만 해도 무서웠지만 거센 보라카이 바다도 경험해 봤으니, 최면을 건다. 그것보다 발가벗고 탈의실에서 수영복을 입는 게 더 창피해서 입장 전까지 이미지 시물레이션을 했다. 수영복을 입고 샤워를 해야 하나? 아니면 그 반대인가? 초록색 검색 창에 검색어를 입력한다. 수영복을 입고 풀장까지 가는데 몸을 덮을 큰 수건도 챙긴다. 입수 전까지 사람들 눈에 내 몸을 노출하는 시간을 최소화하고 싶어서다.




 엄마는 내가 초등학교 4학년 때 큰 수술을 받은 뒤로 공중목욕탕을 가지 못했다. 일요일마다 함께 가던 목욕탕에서 엄마가 때를 밀 동안 피부가 벌겋게 익을 때까지 담그곤 했다. 냉탕과 열탕을 요란하게 오가는 모습을 보이며 나는 더 이상 어린이가 아니라고 증명해 보였다. 보통의 날에는 요구르트를 사줬고, 엄마가 세신사에게 때를 밀며 길어지는 날은 바나나우유가 상처럼 주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엄마는 병을 얻고 일주일을 마무리하는 우리만의 의식을 잃어버렸다. 이후 사춘기 신체 변화를 안고 엄마 없이 홀로 입장하는 게 부끄러워 자연스럽게 나도 가지 않게 되었다. 배우던 수영도 중단했다. 앞으로도 엄마는 목욕탕과 수영장을 못 갈 텐데 나만 가면 상처받을 거라고 지레짐작했다. 엄마도 하고 싶을 텐데 혼자 하는 건 의리 없는 딸 같아서 애초에 선택지에서 삭제했다. 


수심 5m 깊이의 올림픽 잠수풀장

 

내 평생 수영장을 다시 찾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오늘 27년 만에 왔다

라운지에 앉아 프리다이빙 강사를 기다리며 수영을 어디까지 배웠는지 더듬어 보니 배영이 기억이 난다. 수영연습을 하라는 선생님 말을 지키지 않았던 나는 수영보다 수달처럼 물에 떠 있는 느낌이 좋았다. 수면 밖으로 배를 내밀고 둥둥 떠다니면서 천장에 맺힌 물방울들이 언제 떨어지는지 관찰하곤 했다. 선생님이 혼내기 위해 죠스처럼 다가오기 전까지 나는 로빈슨 크루소가 되어 수영장을 표류했다. 사실 물을 좋아했었지. 오늘은 어린 시절의 내가 되어보기로 결심한다.


 프리다이빙 강사는 S기업 연구원이었는데 퇴사하고 세계여행을 하면서 배낭여행 성지인 이집트 다합에서 지내면서 강사가 되었다고 한다. 선망하는 회사를 박차고 퇴사한 점에서 동족의 향기가 난다. 퇴사 이유를 물었더니 한낱 작은 부품이 되어 주도적으로 할 수 없어 목표의식이 사라졌다고 한다. 신기해하는 나에게 다른 강사는 연극배우였는데 배낭여행에서 만나 함께 있단다. 나와 나이 차이가 얼마 나지 않는데 결단력이 대단해 보였다. 


나는 늦게 밥벌이를 시작해서 남들보다 뒤처지는 데에 불안감을 갖고 있다. 계획을 최대한 틀어지지 않도록 컨트롤하며 인생을 효율적으로 보내야 한다는 강박이 있는 내게 강사이력은 신선하게 다가왔다인생을 정해 놓지 않아도 살아지는구나갑작스러운 퇴사에 참고문헌이 될만한 사람이 필요했다. 수업받기도 전에 강사가 마음에 쏙 든다


 오늘 함께 교육받는 한 사람은 호흡법이 되지 않아 2 레벨 수업을 1년 가까이 받는다고 한다. 

1 레벨이어도 충분히 즐겁게 펀다이빙은 할 수 있는데 1년 동안 붙잡고 있다니 수능도 아니고 이해가 안 되었다.

 프리다이빙 매력이 뭐길래 왜 1년이 넘어도 포기하지 못하는 걸까?


 뻣뻣하지만 물을 좋아하는 친구 K의 성화로 같이 배우긴 하지만 아직 온전히 즐길 만큼은 아니다. 보라카이에서 호흡법이 되지 않는 나를 포기했던 강사의 표정이 되살아난다. 돈을 받았는데 어쩌지 못하는 그 얼굴을 보자 하니 내가 이런 몸뚱이라 죄송스러울 따름이었다.


1년 넘게 진전 없는 상태로 배울 자신이 없기에 언제라도 그만둘 수 있도록 당분간 다이빙용품은 구매하지 말고 빌려야겠다. 스스로 체념한 채 장비를 장착해 잠수풀에 들어간다. 프리다이빙 핀(오리발)을 차고 왕복운동을 하며 몸을 푼다. 수영으로는 절대 낼 수 없는 속력으로 나가는 게 다리를 찰 맛이 난다. 


어릴 적 못다 한 수영을 한풀이하듯 그저 피닝만 해도 입장료 본전은 뽑은 거 같아 만족스럽다. 바다에서는 물고기와 여러 생명체를 보는 재미가 있었지만, 조류 때문에 체력적으로 힘들었다. 잠수풀은 위험한 일이 나도 제한된 정사각형 공간 안에서 나기 때문에 왠지 생명이 보장되는 안전한 느낌이다. 목숨을 구해줄 라이프 가드도 있어서 다음 수업에는 긴장을 풀고 조금 즐거워져도 괜찮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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