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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자차 Mar 27. 2024

영화 남자가 사랑할 때 후기 (5)

비타민, 홍삼 그리고 밤양갱


사랑은 뭘까. 일전에 학교 다닐 때 사랑에 대해 적은 글이 있어서 다시 열어보았다. 그때 나는 끌림은 유전자의 명령으로 사랑은 함께 먹는 밥 한 끼로 정의했었다. 그 당시 나한테 가장 필요했던 것을 사랑이라고 했다. 밥을 굶고 다닌 것은 아니었는데, 삼각김밥을 너무 많이 먹었나 보다. 만약 지금 내가 다시 사랑을 논한다면, 음. 끌림은 유전자의 명령이고 사랑이란.

     

영화는 태일이라는 역할을 내세웠지만,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남자가 사랑할 때’를 그려냈다. 태일의 모습이 사랑하는 남자의 모습을 떠오르게 한 걸까. 많은 관객이 이 영화를 보고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물론 그 안에 나도 포함이다. 앞에선 웃다가 끝에 가선 펑펑 울었다. 심지어 나는 남자도 아니고 수협에 다니지도 않는데 뭐가 그렇게 슬펐는지 흐르는 눈물을 막을 수가 없었다. 충분히 예상 가능한 이야기에 설렘 없는 투박하고 거친 사랑이 뭐가 특별하다고, 대체 나는 왜 울었던 걸까.

     

보통의 로맨스라면 아주 잘생긴 남자 주인공과 그에 맞는 자칭 평범하다는 예쁜 여자 주인공이 등장할 것이다. 남자 주인공은 돈이 아주 많고 잘생겼고 키도 크고 옷도 멋있게 입는다. 거기에 대체로 성격도 다정하고 배려심 깊은 예의 바른 사람이라 점수 따는 데도 무리가 없다. 만약 도도한 성격과 까칠한 성미까지 있으면 앙칼진 면모가 색다른 느낌을 준다. 이 잘생기고 조건 좋은 왕 싸가지 남자의 개과천선 프로젝트, 작전명 사람 고쳐쓰기는 여전히 질리지 않는 재밌는 이야기다.

     

그에 비해 태일은 어떤가. 일단 직업부터 주인공에서 탈락이고 고쳐쓰기도 망했다. 모름지기 깡패와 로맨스라면 여자 주인공을 괴롭히는 사람, 남자 주인공의 멋있는 모습을 도드라지게 하는 ‘장치’로서의 역할뿐이다. 그래서 태일이 그려낸 사랑은 이상했다. 물질 공세를 펼치는 게 아니라 돌려받지 못할 빚을 추석 보너스라며 제 앞으로 해 놓는 희한한 계산과 그 위험한 각서를 없앨 수 있는 무지개 색깔의 자필 각서와 결혼도 하지 않은 상대의 부모를 돌보고 상주가 되어 장례식 끝까지 지켜준 갚을 수 없는 마음 같은 것들 때문에 그렇다. 자신의 직위와 맞지도 않고 직업의식도 없는 행동인데, 이 사내 규정에 어긋나는 행동이 이렇게 괜찮을 수 있었나. 나에게 모든 것을 빼앗아 가도 할 말이 없는데 도리어 내가 가진 나쁜 것만 가져가겠다는 그래서 나는 네게 좋은 것만 주겠다는 태도는 정말 악마와의 계약 같았다. 그가 진정으로 원한 것이 나의 콩팥 두 개인가 싶을 때, 남자의 입에서 나온 말은 사랑한다는 충격적인 말이었다.

     

하지만 태일의 말은 진심이었다. 계약서를 제시할 때까지 믿지 못했지만, 정자 밑에서 호정을 보며 떨리던 눈동자와 마음대로 움직이는 눈 밑의 피부와 물리치료실에 찾아와 주황색 플라스틱 통에 손가락을 집어넣고 그 질색하던 ‘걷고 얘기하고’를 하자고 받아들이는 잔뜩 긴장한 얼굴은 정말 솔직했다. 앞서 나왔던 채무자들의 허무맹랑한 말에 ‘그러시든지’하고 무시하며 받아치고, 무슨 괴상한 소리를 하느냐는 얼굴로 화를 박박 내며 휘발유를 마시던 모습과 달랐다. 호정을 보던 태일의 얼굴은 줄곧 어색하게 굳어있었고 눈동자는 자꾸만 허공에서 머물렀다. 가끔 호정과 눈이 마주칠 때면 옅은 눈동자 색깔처럼 그 속마음이 투명하게 비쳤다. 호정에게 대차게 거절당하고 남에게 화풀이하며 속을 삭으면서도 그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말에 바로 달려가 함께 밤을 새워주는 것이 어떻게 진심이 아닐 수가 있을까. 상처받은 내 마음보다 상대의 마음이 더 신경 쓰이는 것이.

     

그래서 태일이 호정에게 병간호를 받는 게 아니라 돈이나 많이 주고 가려고 했다는 말이 가장 가슴이 아팠다.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상해가 아닌가. 내게 잔뜩 쏟아붓고 홀로 훌훌 털어내듯 떠나는 건, 남아있는 내게 얼마나 큰 허공을 남길까. 어느 날 그 허공에 발이 쑥 빠져버리면 무척 당황할 테다. 죽어서 떠날 태일보다 그를 미워하고 살아갈 내 마음이 더 싫었다면 정말 이기적이겠지만, 마음에서 깨끗이 지워낼 것이다. 원망하고 미워하며 살아가는 것보다 아예 잊어버리는 게 훨씬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으니까. 하지만 태일이 돌아온다면 눈앞에 나타난 것만으로도 안심할 것이다. 물론 내 평생, 속에 무덤 하나가 생길 테지만. 그 무덤을 파낼 수도 없어서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나는 모습을 보며 살아가야 할 테지만. 그게 누군가의 무덤이었다는 것을 잊을 때까지.

     

사랑은 기억 속에 점을 찍는다. 기억나지 않을 시간 속에도 점을 찍어 둔 그날의 기억은, 어느 날의 운명처럼 기억에서 되살아난다. 한참을 잊고 살다가 나를 깨우치는 듯한 알아차림은 그동안 감춰져 있던 것에 무례하리만큼 고통으로 슬픔으로 나의 아둔함과 마주치게 한다. 나는 대체 왜 너를 사랑했는가. 네가 내게 구하기 힘든 값비싸고 근사한 장식장을 선물해 줘서? 길을 가다 본 예쁜 옷이 내게 어울릴 것 같다며 사온 탓에? 난 관심도 없는 그 멋진 가을 산에 단풍 구경을 데려가 줘서? 너를 닮은 작은 아이가 있어서? 원수인 우리 사이에 네가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어서? 다시 만난 내게 먼저 달려와 줘서?

     

아니다. 그땐 몰랐지만 내가 널 사랑한 이유는 그런 이유가 아니었다. 네가 날 위해 뭔갈 해줘서 그런 게 아니다. 선물하는 건 너면서 내 눈치를 보는 그 긴장한 눈동자 때문이고, 역시 보는 눈이 있다고 아주 잘 어울리고 예쁘다며 칭찬하는 행복한 네 얼굴 때문이고, 맛있는 음식에나 눈독 들이는 내게 투덜대며 기어이 정자 밖의 찬란한 단풍을 보여주는 네 낭만적인 욕심 때문이고, 너를 닮은 아이인데도 나를 닮았다며 아이 팔을 붙잡고 인사하던 네 말 한마디 때문이고, 미워한 네가 내민 거칠고 커다란 손이 애달파서고, 다시 만난 주제에 처음 만난 그날과 똑같은 몸짓으로 제법 도도하게 굴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기억의 점이 되살아나 내 머리를 똑똑 두드렸기 때문이다.

     

호정도 그랬을 것이다. 험상궂고 거칠고 새까만 얼굴 위에 떨고 있는 투명하고 옅은 눈동자를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호정의 향을 맡으며 좋다고 하던 이상한 코를 꼬집어서 그랬을 것이다. 살짝 벌어진 입에서 나오는 투박한 애정을 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좋은 일이라곤 해보지도 않았을 그 손으로 남의 부모를 성심성의껏 돌봐서 그랬을 것이다. 부담 주기 싫어 떠났다가 뭐에 이끌리듯 다시 만나러 온 그 두 다리 때문일 것이다. 아픈 것을 들키기 싫어 저를 꽉 끌어안은 그 품 때문에 그랬을 것이다.

     

그러니 사랑은 한순간이다. 비타민은 하루에 두 개, 홍삼은 한 개. 영양제 먹어봤자 몸이 얼마나 건강해지겠니, 하고 괜히 타박했던 마음은 홍삼을 사서 집 앞 계단에 멍하니 앉아있는 태일을 보고 무너졌다. 한 세월의 원망과 내려놓음을 참 무책임하게도 되살리는구나. 풀지 못해 넣어 놨던 무지개 색깔의 각서처럼. 찰나의 순간을 파고들어 오는 것을 놓치지 않아야 한다. 시간의 흐름에 살갗이 뜯기고 뼈가 바스라져도 늘 그곳을 향해 뻗어있어야 한다. 태일과 호정이 다시 만난 건 숨겼던 진심이 서로를 향했기 때문에 먼 길이라도 돌아서 온 것이다. 그래서 다행이었다. 한순간의 못난 말로 마음을 감춘 두 사람이 아무것도 해갈하지 못할까 봐 얼마나 마음을 졸였는지 모른다. 내가 마지막에 흘린 눈물은 어두운 밤 가로등 아래에서 두 사람의 이별이 당도하고 나서였다. 다행이라서. 안도해서.

     

나는 다시 만난다면 무덤을 만들게 될까. 아니면 허공을 만들게 될까.

     

비타민도 홍삼도 싫다. 그냥 달콤한 밤양갱이나 주었으면 좋겠다. 그렇게 무덤에도 허공에도 밤양갱을 채우련다. 어쩌다 발견한 보물처럼.

     

그래서 그가 다시 무덤이 되고 허공이 되었을 때, 기어이 형에게 절까지 시킨다는 말은 하지 않도록 했으면 좋겠다. 만약 또 한 번 우리의 이별이 순리라면 내가 무덤을 만들지 않을 수 있도록, 허공 없이 살 수 있도록 내게 시간을 줬으면 좋겠다. 마지막이 좋아야 기억되는 법이라는 형사의 말은 싫다. 마지막이 좋아서 기억도 마음도 남지 않았으면 좋겠다. 순리대로 되어가고 있다고 마음 놓고 울고 나서 가뿐한 마음으로 저승을 밟았으면 좋겠다.

     

태일에게 꼭 말해주고 싶다. 당신이 다 망친 게 아니라고. 다 준 거라고. 당신이 모든 것을 기억하지 못해서 정말 다행이라고. 나는 또 기억할 거라고. 그러니 당신은 다 잊고 훌훌 떠나라고. 나도 다 받아들이고 때가 되면 당신을 훌훌 떠나겠다고. 그렇게 당신을 열렬히 사랑하겠노라고.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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