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품
영화의 특징 중 하나가 아름답고 서정적인 배경이다. 카메라는 인물을 초점으로 맞추면서도 그 배경을 넓게 잡았다. 어느 공간에 있는 어느 인물의 어떤 마음을 보여주려고 한 것처럼 말이다. 때론 인물의 얼굴을 가깝게 잡아 눈부처를 보게 하고, 눈에 보이지 않은 바람이나 온도를 보여주기도 했다. 그리고 그 사이사이 스리슬쩍 들어가 있는 영화 속 소품들!
#1 고양이 엄마와 방석
어린 하은과 미소가 비가 오던 날 길에 버려져 있던 고양이를 주워와서 함께 키우던 그 고양이. 이름이 ‘엄마’라서 미소가 안쓰럽게도 했던 그 귀여운 고양이! 영화에선 초반 외엔 잘 나오지 않지만, 두 사람이 배 깔고 누워서 스케치북에 고양이를 그리며 서로의 마음을 나누던 장면은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두 사람은 서로 자매가 아닌데 함께 부르는 같은 ‘엄마’가 있다는 게 참 상징적으로 느껴졌다. 물론 하은이네 집에서 미소가 자라기는 했지만, 직접 부르는 건 못 들었다. 미소도 떠나버린 자신의 엄마 대신 실컷 부르고 싶은 엄마가 필요했겠지. 그리고 하은과 이어주는 고양이 ‘엄마’는 미소가 제주를 떠났을 때도 다시 돌아왔을 때도 여전히 하은의 곁에 있었다. 미소에게 엄마이자 고향은 하은이라는 뜻일까.
#2 이니셜 귀걸이
하은이 생일이라고 귀 뚫으러 갔다가 액세서리 보관함 부시고 도망치던 장면이 눈앞으로 슈샥 지나간다. 완전 천연덕스러운 얼굴로 ‘제가 안 그랬는데요? ㅇㅅㅇ’하던 하은이의 표정도 너무 웃겼다. 그러던 두 사람은 서로에게 자기 이름의 자음만 딴 귀걸이를 선물하며 우정을 맹세했지. 하은이 남기고 간 물건에서 미처 전달하지 못한 귀걸이를 봤을 때 너무 슬펐었다.
왜 하필 귀걸이일까? 반지도 있는데! 근데 만약 반지로 했다면 몇 번째 손가락에 끼웠는지를 보면서 궁예를 했을 것 같다. 저건 우정이느니, 영원한 약속 혹은 사랑이라느니 라면서. 하지만 그 나이 또래를 생각해보면 귀를 뚫는 게 가장 보편적인 문화니까 귀걸이를 했을 거란 생각이 든다. 내 마음대로 의미를 더하자면, 각자 귀에 서로의 이름을 걸며 어디에 있든 상대방을 향한 귀를 열어 놓은 것으로 해석하고 싶다. 언제나 결국 서로를 향했던 두 사람처럼.
#3 스쿠터
미소 전용 전동기. 스쿠터를 처음 봤을 때는 드라마 ‘커피 프린스 1호점’에서 은찬이가 타고 다니던 것을 봤을 때였다. 로망이 있지만, 아직 한 번도 타보지 않았다! 하지만 드라마나 영화에는 자주 등장해서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지금까지 검정색, 분홍색, 하늘색까지 봤다. 무지개색깔로 채워볼까? 그럼 몇 편이나 더 봐야 하는 거야.
미소의 성격을 나타내기에 자전거보다 스쿠터가 제일이다. 오토바이는 너무 거칠고 너무 반항적이고, 자전거는 수수한 하은이가 타는 게 좋을 것 같다. 적당히 속도도 나고 바람도 느낄 수 있는, 또 어디든지 가고 싶은 미소의 마음이 느껴졌다.
#4 벼락 맞은 나무 목걸이
진우의 목에 걸려있던 수호신. 대체 저런 목걸이는 어디서 구해야 하는 걸까 궁금했는데, 얼마 전 불교 박람회의 야외 부스에서 저걸 팔고 있었다. 신기해서 하나 살까 하다가 다른 곳 돌아보고 온다는 걸 까먹고 못 샀다. 근데 정말 그 대추나무, 벼락 맞았을까? 벼락을 맞았는데도 살아남은 나무라서 액막이를 해주는 거겠지?
미소는 하루하루 밝고 천진한 얼굴로 웃으며 살았지만, 사실은 그 반대로 너무 외롭고 기댈 곳이 없어서 살기 싫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막연히 오래 살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27살로 정했을 것 같다. 딱 10년만 더 살고 죽어야지, 그 나이면 하은이도 혼자서도 잘 살 수 있겠지, 이렇게. 미소가 목걸이를 가져간 이유는 영화 내내 명확하게 나오지 않았지만, 내 생각엔 하은이를 생각한 이유가 가장 컸을 것 같다.
#5 바이칼 호수 엽서
서울에서 돈을 벌고 그림을 그리기 위해 온갖 몸 고생, 마음고생을 하던 미소가 하은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방패로 썼던 바이칼 호수. 엽서는 꼭 거기서 사온 것처럼 보였는데도 하은이는 단박에 알아챈 것 같았다. 아끼지 않으면 볼 수 없는 상대방의 그림자가 엽서였다.
지금 생각하면 나도 참 이상하게 강한 척을 했던 것 같다. 쪽팔리고 자존심이 상해서 못나고 힘든 거 보여주기 싫어서, 그래서 되려 나를 구석으로 몰아세우며 나에게도 상대에게도 상처를 많이 줬었다. 왜 그랬지? 그냥 내 상황을 설명할걸. 괜한 없는 얘기 하지 말걸. 그땐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정말 알 수 없었다. 버티는 거 외엔 해본 게 없어서 그랬나. 현명하지 못했고 배려도 없었다.
#6 캔버스
하은과 미소가 어떤 영혼의 동반자인지 가장 잘 나타내준 소품이다. 미소가 쓰던 자취방에 가서 자신만의 그림을 그려가던 하은이는 옛날처럼 연필 하나로 마음을 그려내기 시작한다. 하은이는 ‘그려보면 알 수 있다’는 대사를 남기는데, 그건 나도 알고 있는 마음이다. 비록 미술을 전공하진 않았지만, 그림을 그리듯 누군가를 생각할 때 혹은 이렇게 글을 쓸 때, 해가 저물어 꿈으로 들어갈 때가 되면 무언가를 그리게 되니까.
반쪽만 그렸던 미소의 소묘를 하은이를 떠올리는 미소가 완성한 장면은 완벽한 ‘영혼의 동반자’였다. 감독은 영혼의 동반자가 이런 거라고 생각했구나, 한 번에 첫눈에 반하듯 알 수 있는 게 아니고 소묘하듯 섬세하게 시간을 쌓아가는 거라고.
**모든 사진, 동영상, 블로그 글의 출처는 구글, 네이버, 유튜브 등등 입니다. 삭제를 원하시면 말씀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