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키비아데스 1>의 10장 “사람은 자신의 영혼이다”(129b~132b)에서 소크라테스는 우리(인간) 그 자체가 무엇인지 밝혀내는 시도와 어떤 것을 돌보아야 진정으로 그 자체를 돌보는 것인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어떤 방법으로 자체 그 자체가 찾아질까? 그래야 우리 자신이 도대체 무엇인지를 우리가 밝힐 수 있을 테고, 그렇지 않고 여전히 이것에 대한 무지 속에 있다면, 아무래도 그러긴 불가능할 테니까 말일세.”(p.98)
소크라테스는 인간 그 자체가 무엇인지 밝혀내려고 한다. 그는 먼저 사용하는 사람과 사용되는 것의 예시를 통해 인간과 신체가 다르다는 논리를 펼쳐 나간다. 아래의 대화에서 사용하는 사람과 사용되는 것, 이 두 가지를 각각의 범주로 분리해서 말하는 것이 인상적이다.
“소 선생 : 그런데 내 짐작으로는 이야기를 하는 것과 말을 사용하는 것을 자네는 같은 것이라 부르는 것 같군.
알키 : 물론이죠.
소 선생 : 그렇지만 사용하는 사람과 사용되는 것은 다르지 않은가?
알키 : 무슨 말이죠?
소 선생 : 갖바치가 굽은 칼과 곧은 칼 및 다른 도구들로 자르듯이 말일세.
알키 : 네.
소 선생 : 그러니 사용하고 자르는 사람 다르고, 자른 때 사용되는 것 다르지?
알키 : 그죠
소 선생 : 그러니 바이올린 연주할 때 연주자가 사용하는 것과 연주자 자신은 다르겠지?
알키 : 그죠
소 선생 : 방금 내가 묻던 게 그걸세. 사용하는 사람과 사용되는 것은 언제든 다르게 여겨지는지 말일세.
(...)
소 선생 : 그런데 사용하는 사람과 사용되는 것들이 다르다는 데 우리는 동의하는 것이지?
알키 : 그죠
소 선생 : 그러니 갖바치와 바이올린 연주자는, 그들이 작업할 때 사용하는 손과 눈하고는 다르겠지?
알키 : 네네
소크라테스 : 신체 전부도 사람이 사용하는 것이지?
알키 : 맞습니다.
소크라테스 : 그런데 사용하는 사람과 사용되는 것이 다르다고 했지?
알키 : 네
소 선생 : 그러니 사람은 자신의 신체와 다르지?
알키 : 그죠
소 선생 : 그렇다면 우리는 사람이 신체를 사용하는 쪽이라는 답변을 할 수 있을걸세”(pp.99~101 인용 및 참조)
사람은 신체를 사용하는 존재라는 결론을 내린 소크라테스는 세 가지 경우의 수 즉 ‘영혼’, ‘신체’, ‘영혼+신체’ 중 한 가지가 인간을 다스릴 수 있다고 말한다. 먼저 ‘신체’의 경우, 위에서 말했다시피 ‘사람이 사용하는 것’이라고 말했기 때문에 굳이 인용문을 적지 않겠다.
다음으로 ‘신체와 영혼’ 둘 다가 합쳐져서 인간을 다스린다면, 이 둘 중 하나가 ‘다스림’에 참여하지 않는다면, “둘이 합쳐진 것이 다스릴 방도가 전혀 없게 돼”(p.102) 인간이 다스려지지 않는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므로 소크라테스는 우리가 영혼에 의해 다스려진다는 전제가 참인 것을 말하며, 영혼이 곧 사람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본 글만 보게 된다면, 영혼에 관한 설명을 하지 않고 세 가지만 던져놓고 그중에 둘은 아니니 결국 ‘영혼’이 정답인 것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파이돈>에서 육체와 영혼의 분리가 죽음라고 말한다. 그래서 아마 위 세 가지 단어들은 소크라테스에게는 당연히 떠오르게 되는 것으로 추측된다.
우리는 해당 이야기를 통해서 사람은 영혼에 의해 다스려지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사람 그 자체 즉 자신을 알게 되었다. 소크라테스는 본 이야기에서 마지막으로 “그러니 자신을 알라고 명하는 자는 우리에게 영혼을 알라고 시키는 걸세.”(p. 104)라고 말하했다. 그렇기에 영혼을 돌봐야하고, 마주봐야한다고 말한 뒤 다음 주제로 넘어간다. ―추가로 알려주자면,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은 소크라테스의 명언이 아닌 당시 델포이 신전에 새겨진 유명한 글귀이다.‘―
다음으로는 9장의 내용과 같이 그것 자체를 아는 것과 그것에 속한 것을 아는 것에 관해서 이야기한다. 그리고 위에서 이야기했다시피 영혼이 아닌 것은 나 자신을 돌보는 일이 아니라고 말했으며, 소크라테스는 몇몇 직업과 예시를 들며, 자신에게 속하는 것을 돌보는 일은 자신 자체를 위한 일이 아닌 것을 이야기한다.
의사도 체육 교사도 농부도 돈을 버는 일을 중점적으로 하는 사람도 자신 자체를 돌볼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적어도 이들은 자신에 속하는 것들도 모르는 듯하고, 그들이 가진 기술의 측면에서만 보자면, 자신에 속하는 것들보다 훨씬 떨어져 있는 것들을 알 뿐이기 때문이네. 왜냐하면 그들이 아는 것은 신체에 속하는 것들인데, 그것들은 신체가 보살핌을 받는 데 수단이 되는 것일 뿐이기 때문”(pp. 104~105)이다. ―즉 신체 혹은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수단을 알려고하지, 영혼을 위한 행위가 아니다.
소크라테스는 앞서 말한 예시를 토대로 알키비아데스에게 누군가가 알키비아데스의 육체(속하는 것)를 사랑하는 것이 아닌, 영혼(그 자체)을 사랑할 수 있도록 분발하길 부탁한다. 즉 소크라테스는 알키비아데스가 민중의 애인1)되지 않길 원했으며, 영혼의 아름다움을 갈고닦길 원했다.
마지막으로 소크라테스는 알키비아데스가 나랏일에 나서기 위해서는 먼저 배우고 익혀야지, 그전까지는 절대 먼저 나서지 말라고 말한다. 그리고 11장에서는 자신의 돌봄에 관한 이야기로 이어진다.
아마 9장의 심심했던 부분이 10장이 되어서야 우리들에게 심심하지 않게 다가왔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론>을 학부 시절 짧게나마 읽었을 때, '어떻게 고대에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었지?'라는 생각을 종종 했었는데, 플라톤의 책을 읽을 때는 더더욱 대단하게 느껴진다. ―역시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의 제자이다.
본 10장에서는 계속해서 범주화시키며, 시쳇말로 '애매한 말'을 상쇄시키고 각각의 말들을 철저히 나누어서 본다. 필자가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은, ''인간은 영혼에 의해 지배받는다.' -> 그러므로 영혼을 보살피는 것이 진정한 인간 그 자체를 위한 보살핌이다. -> 그 이외의 보살핌은 모두 속하는 것의 보살핌이기에 그 자체를 위한 진정한 보살핌이 아니다.'라는 레퍼토리였다.
필자가 여태까지 읽어본 서양철학 서적들의 전반적인 느낌은 '애매성을 두지 않는다.'인데, 아마 이러한 모습들은 플라톤 때부터 계승되어 온 서양철학적 면모라고 생각된다.
인용부호 및 참고사항
* 본 글은 “플라톤. (2020). <알키비아데스 ·>(김주일,정준영 역). 아카넷” 판 책을 기준으로 인용했으며, 본 책을 인용할 때는 쪽수만 표시하겠다.
1) “민중의 애인 : 플라톤의 조어로 보인다. 본래 이와 유사한 표현으로는 ’민중의 벗‘이 있는데, 중년 남성이 동성애인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자신을 망치듯이 민중의 변덕을 쫓아가다가 자신을 망칠 수 있다는 의도를 담기 위해 말을 만든 것으로 보인다.”(p.1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