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주말에 할 게 없어서 이런저런 인스타그램 릴스나 유튜브를 보다가, 우연히 영화 <올드보이>와 관련된 영상을 우연히 많이 보았는데, 짧게나마 적을 부분이 있어 글을 올린다.
1. "지선씨네마인드"를 보고 나서
박지선 교수가 '올드보이'를 보고 나서 ''올드보이' 제목에 부합한 인물은 '이우진(유지태 배우 역)'인 것 같다.'라고 말했다.
이 말에 <올드보이>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을 때, 이 영화는 우진의 복수심으로 인해 시작되었고, 우진의 자살로 이야기가 끝난다.
<올드보이>에서 작중 노출 비중을 따졌을 때, 오대수가 매우 높게 나오지만, 오대수 또한 이우진의 이야기를 위한 등장인물에 불과했다.
결국, 올드보이는 '오대수'의 처절한 20년간의 처절한 이야기 나 복수극이 아닌 이우진의 복수극이다.
아마 우진이 자살했던 이유는 본인의 인생 최종 목표를 달성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어렸을 때의 복수심과 구 복수만 생각하고 달려온 우진, 목표를 달성한 우진에게 남은 것은 새로운 삶이 아닌 복수가 완료된 것뿐이었다. 복수가 끝난 그에게는 남아있는 게 없었다. 그러니 우진은 자살했다.
ー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 연관 지어 해석하는 분들이 많았고, 필자도 그러한 해석에 동의하지만, 좀 더 다르게 해석해보고 싶었다.
박지선 교수의 말처럼, 어른이 될 때까지는 그 시절에 살았었던 우진은 복수가 끝난 뒤 새로운 인생을 맞이한다. 하지만 그는 그 삶을 스스로 거부한다. ー학생시절의 우진의 대타자1)는 본인의 누나였을 것이고, 청년(?)시절 우진의 대타자는 복수가 완료되기 직전까지의 '오길수'였을 것이다.
2. '<올드보이> 블루레이'의 신형철 교수에 한 마디
신형철 교수는 '<올드보이> 블루레이'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2)
"정직한 예술가라면 피해 갈 수 없는 질문이 있다. 그것은 인간의 삶이 송두리째 파괴되는 경우가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야 되는 이유가 무엇인지 말해야 한다."
위에서 말했다시피, <올드보이>는 철저하게 이우진의 이야기이다. '오대수'의 삶도 송두리째 파괴되었지만, 우진의 삶도 송두리째 파괴되었다.
극 중 우진의 삶만 보았을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야 되는 이유를 찾지 못했다. 물론 필자보다 문학적인 면모가 비교도 안될 정도로 좋은 신형철 교수에게 있어서 이러한 말을 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되지만, 필자는 잘 모르겠다.ー오대수를 끼워 넣는다면, 이야기가 달라지겠지만, 오대수의 이야기로 살아가야 된다는 이유를 말한다면, 해당 질문에 대한 답변이 부실하다는 느낌이 있다. 어찌 보면 대수 또한 극 중에서 우진에게 잡히고 나서 자신을 20년째 가둔 사람을 찾기 위한 복수심으로 살아왔기 때문이다.ー
개인적으로 예술가가 죽으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ー흥행성, 윤리적 문제와 별개로ー 모든 작품이 좋은 교훈이 있어야 되는 건 아니니까. 우리는 죽어가고 있는 존재지만, 삶의 이유를 알려주고 행복하게 사는 일, 나약한 인간의 존재를 버텨주게 하는 일이 문학의 의미이자 더 넓은 의미에서는 예술의 의미라고 생각한다.
우리의 삶이 송두리째 흔들리고 파괴 됐을 때, 우리는 어디서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을까?
적어도 "이우진"의 삶을 보여주고 "이우진"의 마지막을 보여준 <올드보이>에서는 위 질문에 대한 답이 충분해 보이지 않는 것 같다.
인용부호
1) 대타자란, 주체를 보증해 주는 존재를 의미한다.
- <로자의 한국문학 수업> 中
2) 지금은 사라졌지만, 인스타 릴스에서 보았고, 그 기억을 토대로 적었기 때문에, 완전하게 신형철 선생이 했는 말이라고 볼 수는 없다. 허나 그가 말했던 부분을 나름대로 이해해서 다시 적어보았다. - 틀렸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사용된 사진 출처 - 영화 <올드보이> 作中 일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