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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rosh 직장인 Aug 24. 2024

플라톤의 <알키비아데스 Ⅰ>의 나름 요약 및 정리

흥미로운 알키비아데스 / 9장 정리 및 요약


 <알키비아데스 Ⅰ>의 9장 “정치술과 ‘자신을 돌봄’”(127e~129b)에서 소크라테스는 그것 자체를 돌보는 것과 그것 자체에 속하는 것을 돌보는 것을 구분했다. 또한, 그것 자체에 대한 제대로 알아야지만, 그 자체를 더 낫게 발전시킬 수 있는지 설명한다.     


자, 자신을 돌본다는 것이 무엇이고(돌본다고 생각은 하면서도 정작 자신도 모르게 자신을 돌보지 않는 일이 일어나지 말라고 하는 말일세), 또 이 일을 어느 때 하는가? 자신에게 속하는 것들을 돌볼 때면, 그때 자신도 돌보는 것인가? (...) 그런데 어떤가? 사람은 발을 어느 때 돌보는가? 발에 속하는 것들을 돌볼 땐가?”(p. 94)     


 해당 구절에서 소크라테스는 알키비아데스에게 돌보는 것은 무엇이며, 돌보게 됐을 때 자신에게 속하는 것을 돌볼 때면, 그때도 자신 자체를 돌보는 것인가? 에 관한 질문을 던지며, 자신에게 속하는 것에 관한 이야기를 이어간다.     


자네가 ‘손에 속한다’고 하는 뭔가가 있나? 예컨대 반지의 경우, 그것은 손가락 말고 한 사람의 신체 부분들 중 다른 부분에 속한다고 자네는 말하는가? (...) 그러면 또 마찬가지로 발에는 신발이 속한다고 말하는가?”(pp.94~95)     


소 선생 : 그러면 어떤 기술이 신발을 더 낫게 만들지?

알키 : 갖바치(가죽신 만드는 일) 기술이죠.

소 선생 : 그러면 우리는 갖바치 기술로 신발을 돌보는 거지?

알키 : 네

소 선생 : 그리고 갖바치 기술로 발까지 돌보는 거야? 아니면 발을 더 낫게 만드는 기술이야?

알키 : 발을 더 낫게 만드는 기술이죠

소 선생 : 발을 더 낫게 만드는 기술이라면, 신체의 나머지 부위도 더 낫게 만들지 않나?

알키 : 그런 것 같네요

소 선생 : 그럼 이건 신체 단련술(본 맥락에서는 운동으로 짐작됨)이겠네?

알키 : 그죠.

소 선생 : 그러면 신체 단련술은 발 자체를 돌보지만, 갖바치 기술은 발에 속하는 걸 돌보겠네?

알키 : 네

소 선생 : 더불어서 신체 단련술로는 손을, 보석 세공술로는 손에 속하는 것들을 돌보겠네?

알키 : 그죠

소 선생 : 그러니 우리는 어떤 기술로는 각각의 것 자체를 돌보지만, 다른 기술로는 그것에 속하는 것을 돌보겠네?

알키 : 맞습니다.

소 선생 :그러면 자네 자신에 속하는 것들을 돌볼 때 자네는 자네 자신을 돌보는 것은 아니겠군?

알키 : 네” (pp.95~97 참고 및 인용)     


 위의 내용을 통해서, 우리는 소크라테스는 반지는 손에 속하는 것이며, 신발은 발에 속하는 것이라 말한다. 갖바치 기술은 발에 속하는 것(신발)을 더 좋게 만든다고 설명한다.―해당 문장을 통해서 보석 세공술은 손에 속하는 것(반지)을 돌보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소크라테스는 ‘신체 단련술’과 신발, 반지와 대조시킨다.

 보석 세공술은 손에 끼는 ‘반지’를 좋게 만들어주고, 갖바치 기술은 발에 착용하는 ‘신발’을 좋게 만들어주지만, 신체 단련술은 손과 발 자체를 더 낫게 만들어준다. 즉, 반지와 신발은 그것들에 속하는 것만 좋게 만들어주지만, 신체 단련술은 신체의 한 부분만 좋게 만들어주는 게 아닌 다른 부분들도 좋게 된다.1)

 소크라테스는 ‘신체 단련술’과 신발, 반지와 대조를 통해, 자신이 자신 자체를 돌보는 것과 자신에게 속하는 것을 돌보는 게 무엇인지 알려주기 위해서 비교 및 대조했다. 즉 두 돌봄에 대한 범위/범주를 이야기하고, 그 자체를 돌보는 돌봄은 어떤 형태의 것인지 알려준다.

 마지막으로, “하지만 ‘우리가 우리의 것들 가운데 그 어떤 것을 더 낫게 만드는 기술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더 낫게 만드는 기술로’라는 정도까지는 합의를 보았지?”(p.97)라는 말과 함께 특정 부위를 좋게 하는 것(자신에게 속하는 것을 돌봄)보다는 우리 자체를 좋게 되는 기술이 더 좋다는 합의점을 도출시켜 줬다.     


 다음으로는 “정치술과 ‘자신을 돌봄’” 부분의 마지막인 부분인 ‘자신을 돌봄’에 관해 대략적으로 말해준다.2) 해당 파트에서는 자신을 돌보려면, 그 자체/원형/―더 나아가서― 이데아를 알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럼 정말 신발이 뭔지 몰랐다면 도대체 어떤 기술이 신발을 더 낫게 만드는지를 우리가 알았겠는가? (...) 반지가 뭔지 몰랐다면 어떤 기술이 반지를 더 낫게 만드는지를 몰랐겠군.”(p.97)    


 먼저, 소크라테스는 만일 우리가 신발과 반지가 뭔지 몰랐다면 그것들을 좋게 만드는 방법을 알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 말한다. 그와 동시에 본인 스스로가 자신을 잘 알지 못한 채로 있다면, 그 사람은 자신을 스스로 좋게 만들 방법을 알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런데 어떤가? 그렇다면 도대체 우리 자신이 무엇인지를 모르면서 어떤 기술이 사람을 더 낫게 만드는지 우리가 알 수 있긴 하겠는가? (...) 그것을 알면 아마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한 돌봄을 알 테지만, 모르면 결코 우리 자신에 대한 돌봄을 알지 못할 것이네.”(pp. 97~98)     


 소크라테스가 이 말을 한 까닭은 무지한 상태에서 ‘무지의 지’가 실현되지 않고 그저 자신을 모르는 상태에서 우리가 자신을 돌볼 경우, ‘자신에게 속하는 것’을 돌볼 수는 있을 것이다.―예를 들어 반지를 사거나, 좋은 신발을 사거나 등― 하지만, 자신에 대한 돌봄을 실현하지 못한다고 말했다.

 결국에는, 헛된 돌봄만 하게 될 것이며, 영혼이 빈곤한 상태로 계속 남아있다는 말로 보인다.―위의 예시처럼, 좋은 집, 좋은 신발, 좋은 반지, 좋은 차(Car)를 구매한다고 해도 근본적인 돌봄이 되지 않는다면(아마 근본적인 해결로 봐도 무방할 것 같다), 그것은 헛된 돌봄 즉 돌봄이 아닐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는 자신에게 속하는 것에 대한 돌봄은 자신에 대한 돌봄이 아니게 된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게 된다.     


어떤 방법으로 자체 그 자체가 찾아질까? 그래야 우리 사진이 도대체 무엇인지를 우리가 밝힐 수 있을 테고, 그렇지 않고 여전히 이것에 대한 무지 속에 있다면 아무래도 그러긴 불가능할 테니까 말일세.”(p.98)라는 말을 끝으로 10장으로 넘어간다.               


 9장이 흥미로웠던 이유는 아래에 각주에 서술했다시피, 10, 11장을 위한 발판으로 쓰여졌다는 점이다. 이 점에서 플라톤의 서술 능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본 장에서 범주에 대한 내용을 간략하게 썻지만, 역시 서양철학은 범주에 대해 민감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끼게 된다.

 단순히 생각해 보았을 때, 반지를 끼는 일, 좋은 신발을 신는 일은 우리 몸을 돌볼 수 있다는 생각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소크라테스/플라톤은 몸에 속하는 것과 몸 자체를 구분하여 진정으로 몸을 위하는 게 무엇인지 나누어 우리에게 앎을 제공해준다.





각주 및 참조사항


* 본 글은 “플라톤. (2020). <알키비아데스 Ⅰ·Ⅱ>(김주일,정준영 역). 아카넷” 판 책을 기준으로 인용했으며, 본 책을 인용할 때는 쪽수만 표시하겠다.

     

1) 간단하게 생각해 보자, 반지를 끼면 사람들이 손이 멋있다고 하지, 발이 멋있다고 하지 않는다. 좋은 신발을 신으면 발이 편해지지 다른 부분이 편해지는 건 아니다(물론 척추나 발의 스트레스에 따라 신체 건강이 달라질 수 있다만, 해당 부분은 현 논점에서는 논외의 이야기다).

 그렇지만, 신체단련술, 예를 들어, 우리가 턱걸이한다면, 등뿐만 아니라 상체의 전반적인 기관들이 더 좋아지게 된다.      


2) 대략적으로 말한다고 서술한 이유는, 9장의 대화는 실질적으로 129b에서 소크라테스의 첫 번째 대사로 끝이 난다. 또한, 제10장, 11장에서 돌봄과 영혼에 관해 말했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ー즉 9장은 10, 11장을 위한 발판이라고 생각된다. 그렇다고 해서 중요하지 않다는 게 아니다. 9장을 대강 넘겨버리면 뒤의 10, 11장을 이해하지 못하는 불상사가 발생하게 된다.     


** 더 좋은 상태에 있을 수 있는 세 가지

질문에 대답하는 것, 신이 허락하는 것, 자신의 예감이 맞는 것(p.94)     


*** 추가적으로 소크라테스의 이러한 철학적 근원은 고대 그리스의 전통적인 믿음인 “인간의 무지와 지혜의 신적인 기원에 대한 믿음”에서 왔습니다.(조대호. (2003). <소크라테스 윤리의 그리스적 전통에 대한 연구: 소크라테스 철학 안에서 이성과 신적인 계시의 관계>. 철학논총, 3(33), p. 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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