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Prosh 직장인 May 06. 2024

흥미로운 <알키비아데스>

짤막한 서평 103a~119a까지

 최근 직장을 다니게 됐습니다. 평일에는 일에 치이고, 주말에는 펑펑 노느라 바빴는데, 이번에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연휴가 있어서 플라톤 <알키비아데스>를 짤막하게나마 읽어보고 이야기해 보는 글을 남겨볼까 합니다.


1. <알키비아데스>는 무슨 책이야?


 <알키비아데스>는 플라톤 철학을 입문하기에 좋은 책으로 많이 추천을 해줍니다. 저 역시도 플라톤을 추천받았을 때, 플라톤 서적 중에서 뭘 읽어야지 고민했었을 때가 있었습니다.-지금은 선택의 문제가 아닌 어려움의 문제에 놓여 있습니다. ㅎㅎ;;- 그때 이리저리 검색하던 중 우연히 '정암학당' 홈페이지에서 <알키비아데스>를 추천해 준 댓글(?)이 있어 이 책을 구매했었습니다.

 "아테네 민중이 사랑한 알키비아데스와 그의 스승 소크라테스가 펼치는 긴장 어린 대화, 그리고 '너 자신을 알라!'는 모토의 참된 의미"(플라톤. <알키비아데스>(김주일, 정준역 역). 아카넷. 뒷 표지 1)

 위에서 말씀드린 인용문처럼 역자분들께서도 '플라톤 철학의 논점들이 집약적으로 잘 제시됐다.'고 말했으며, 플라톤 철학에 입문하기 '가장 좋은' 길잡이라고 표현할 정도의 서적이라고 해서 한 번 읽어 봤습니다.


2. '알키비아데스'는 누구야?


 <알키비아데스>의 주인공 '알키비아데스'는 흔히 말하는 좋은 가문에서 태어나고 잘 생긴 인물입니다. 역자의 인용에 따르면, 그는 "육체의 외모나 재산 또는 혈연적인 배경과 정치적인 배경 등의 외면적인 것"들의 힘을 강조했다고 합니다.(p.123)

 알키비아데스는 정치적인 재능을 보였지만, 나중에는 실각해 스파르타로 망명했습니다. 기원전 404년에는 비참하게 살해 당해 일생을 마친 인물입니다. <알키비아데스>에서 그는 정치적 야망이 엄청난 사람으로 묘사돼 있습니다.

 여담으로 기원전 432년경에 소크라테스를 만나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포테이다이아 전투'에서 소크라테스덕에 목숨을 건지게 됐다는 유명한 일화도 있습니다.


3. 103a~119a(21p~67p) 중 인상 깊었던 구절들


1) "그런데 일이 이렇게 된 건 인간적인 탓이 아니라 일종의 신령스러운 가로막음 탓이었네"(p.21)


 해당 본 구절에서 '신령스러운 가로막음'에 대한 인용구 부분이 있었습니다. 요약해서 말씀드리면, '신령스러운 가로막음'은 'daimonion enantioma'를 옮긴 말입니다.(p.122) 박종현 저자의 번역에서 'diamonion'을 두고 "제게는 이것이 (중략) 일종의 소리로서 나타나는 것인데 이것이 나타날 때는 언제나 제가 하려고 하는 일을 하지 말도록 말리지, 결고 적극적인 권유를 하는 일은 없습니다."(p.122)라고 쓴 부분이 있었습니다.

 박종현 저자의 번역을 인용한 역자는 'daimonoion'(신령스러운)은 무언가를 행할 때 잘못된 일일 경우 소극적으로 '가로막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고 했습니다.(허나 적극적으로도 해석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해당 부분을 보고, 학부 때 잠깐 공부했었던 아우구스티누스의 '신적 조명(Divine Illumination)'이 생각났었습니다. '신적 조명'을 짤막하게 설명하자면, '상주불멸하는 대상에 대한 지식은 '신적 조명'이 대상을 비춰 줌으로써 얻을 수 있으며, 인간의 인식 활동은 신의 조명에 의한 도움이 있어서 가능하다.'고 생각해 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2)

 실제로 아우구스티누스는 플라톤/신플라톤주의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3) <알키비아데스>에서 말한 "신령스러운 가로막음"이 소리로서 나타나는 것처럼, 즉 특정한 정보를 주는 것으로 보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신적 조명' 또한 " 하느님이 정보 자체가 아니라 정보의 진실에 대한 통찰력을 제공"4)합니다. 즉 신께서 인간이 하는 판단/해석을 통해 참/거짓임을 알 수 있는 것처럼, 특정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으로 볼 수 있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신령스러운 가로막음'과 '신적 조명'의 또 하나의 공통점은 '강제적이지 않음'에 있습니다. '신령스러운 가로막음'과 '신적 조명'은 자연적이고 계시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소극적이고, 답만 주는 경우라고 볼 수 있죠. 5)

 결국엔 이 답을 따른 것인지 아닌지는 인간에게 달려있습니다.ー간단하게 이야기하면, 학창 시절 어머니가 조언을 많이 해주셔도, 잔소리로 생각하고 무시하거나,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거나는 오롯이 행위자인 저에게 달려있는 거죠.


2) 생각하건대 난 '모든 경우에 옳은 것'을 대답으로 내놓은 것인데(p.34)


 해당 구절에서 소크라테스는 "모든 경우에 옳은 것"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해당 구절에서 역자는 "<국가> I권에서 제시되는 '기능'의 관점을 적용하면, (중략) '더 나은 것'이란 임의적으로 설정되는 것이 아니라 문제의 대상이 가지고 있는 '기능'에 따라 규정된다. (중략) 다시 말해 한 대상의 옳은 상태는 그것의 기능을 기준으로 규정된다는 말이다."(p.131)

 역자가 해준 문장이 풀어서 설명해 준 것이지만, 상당히 어렵습니다. 제가 이해한 바에 따르면, '그것이 모든 경우에 옳은 것'은 무작위적으로 부여하는 것이 아닌 그것의 기능에 따라서 기준을 규정할 수 있다고 판단됩니다.

 예를 들어 '바디로션'이 모든 경우 옳은 것 즉 모든 경우 옳은 설명이 되려면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까요? 우선 역자의 말처럼 '기능'에 초점을 맞춰봅시다. 제가 생각하기에 바디로션의 바르는 이유는 '피부 보습' 때문입니다.

 피부 보습을 하는 이유는 인간의 피부 보호를 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합니다. 만일 바디로션이 인간의 '피부 보호를 위한 것'이 주된 기능이라면, 바디로션은 '피부 보호와 관련된 모든 경우에 기능이 옳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바디로션은 앞서 말한 기능으로 이해할 수 있겠고, 그것의 기능은 보습과 관련 돼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디로션은 피부의 보습을 도와줄 수 있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기에 '피부 보호를 위한 것'이라고 규정/설명할 수 있겠습니다. 참으로 어려운 부분입니다. 하지만 대상에 대한 객관적인 규정/설명을 위해서라면, 필히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6)


3) 자네는 어리석음을, 그것도 가장 극단적인 어리석음을 끼고 살고 있는 것이네. 그런 탓에 교육을 다 받기도 전에 자네가 정치에 달려들게 된 것이라네.(p.67)


 상당히 흥미진진하고 재미있는 부분입니다. 왜냐하면 해당 파트에서 무지의 지에 관해 설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길게 풀어서 말하는 것보다 알키비아데스(알키)와 소크라테스(소선생) 대화를 재미있게(?) 요약해서 말해보겠습니다.


알키 : 아니 소선생님 다중(多衆)한테서도 앎을 배울 수 있다니까요?

소선생 : 자 봐봐 다중이 '돌은 돌이다.' '나무는 나무다.'라는 합의를 해서 해당 부분에 대한 앎은 얻을 수 있어. 이러한 부분을 알려주는 것에서 그들은 훌륭한 선생이 될 수 있겠지, 자 그러면 무언가를 가르치는 사람들은 가르치려는 것에 대해 잘 알고 있겠지?

알키 : 그죠.

소선생 : 그리고 아는 사람들이라면 의견 일치가 되고, 서로 의견 충돌이 없겠지? 만약 의견 충돌이 있다면, 알키 너는 그들이 그것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을 테니까?

알키 : 맞습니다. 선생님

소선생 : 자 근데 봐봐 A라는 사람과 B라는 사람이 서 있을 때 다중은 그들을 보고 '사람'이라는 것에 동의할 거야? 맞지?

알키 : 당연하죠!

소선생 : 근데 A와 B 중 누가 달리기를 더 잘하고, 짜장면을 더 빨리 먹는지에 대해 알고자 하는 경우라면, 이 경우에도 다중이 좋은 선생이 될 수 있을까?

알키 : 어... 그건 아닌 것 같은데요.

소선생 : 맞아 의견이 갈리게 될 테니까. 그렇기 때문에 모든 경우에서 다중이 좋은 선생이 될 수 없는 거야.

알키 : 아...

소선생 : 이러한 부분까지 알려고 할 때 좋은 다중이 좋은 선생일까? 내가 볼 때는 서로 합의를 못할 것 같은데? 그렇게 내놓은 답이 ‘참된 답/앎’이 될 수 있을까?

알키 : 없을겁니다. 근데 제가 봤을 때 저는 제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조차 모를 때가 있고, 선생님과 대화에서 질문할 때, 똑같은 질문이라도 그때그때마다 다른 생각으로 다른 답을 이야기하는 이상한 상태에 있는 것 같아요.

소선생 : 너는 네가 왜 그 이상한 상태에 있는지 모르는 거지?

알키 : 맞아요.

소선생 : 알키 네가 왜 그런지 알려줄까?

알키 : 뭔데요?

소선생 : 네가 알지 못한다는 생각을 안 해서 그런 거야.

알키 : 네?!

소선생 : 봐 나랑 플라톤이 짜장면을 먹고 싶어서 알키 너한테 먹고 싶다는 부탁을 했어. 그렇다면 네가 짜장면을 만들어줘야 할까? 이연복 셰프님한테 부탁하는 게 나을까?

알키 : 이연복 셰프님한테 부탁해야죠.

소선생 : 하나 더 내가 다음 주에 예비군에 가야 하는데 군복이 너무 더럽고 주름이 많아서 드라이클리닝과 다림질이 필요해, 그래서 내가 알키 너한테 드라이클리닝과 다림질을 부탁했어. 그렇다면 네가 드라이부터 다림질을 해야 할까? 크린토피아에 맡겨야 할까?

알키 : 크린토피아에 맡기는 편이 낫죠.

소선생 : 너는 너 자신이 그 일을 하지 못한다고, 즉 알지 못한다고 생각하니까 그 일의 전문가들한테 맡기는 거겠지?

알키 : 그죠.

소선생 : 자 그러면 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사람들은 자신의 '무지'를 알고 있기 때문에 남들한테 맡기는 덕분에 실수를 범하지 않아. 맞지?

알키 : 네!

소선생 : 하지만 잘못을 범한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알키 : 자신이 뭘 못하는지 모르는 사람 아닐까요?

소선생 : 맞아. 정확히는 자신의 무지를 모르는 사람이지.

알키 : 아...

소선생 : 그런 사람들은 이러한 무지가 나쁜 것들의 원인이자 혼낼 만한 어리석음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

알키 : 네

소선생 : 너도 똑같아. 너는 중요한 것들에 대해 무지할 뿐만 아니라, 알지도 못하면서 알고 있다고 생각하잖아.

알키 : 앗...

소선생 : 그러니 자네는 어리석음을, 그것도 가장 극단적인 어리석음을 끼고 살고 있는 것이네. 그런 탓에 교육을 다 받기도 전에 자네가 정치에 달려들게 된 것이라네.

알키 : 아앗...


 본 대화를 통해서 우리는 무지를 아는 것, 즉 '무지의 지'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소크라테스의 변명>에서도 “나는 내가 실제로 알지 못하니까 바로 그렇게 알지 못한다고 생각도 하기 때문이다. 어쨌든 나는 적어도 이 사람보다는 바로 이 점에서 조금은 더 지혜로운 것 같다.”(아카넷 판. p.44)라고 말한 것처럼, 무지의 지를 상당히 중요한 미덕으로 보았습니다. 7)

 더 나아가 소크라테스는 본인의 무지를 알게 되는 순간 탐구하려는 마음이 생기고, 그 마음이 생기기 때문에 탐구가 가능하다고 주장한 것 같습니다. 이와 반대로, 자신이 안다고 생각한다면, 탐구하는 마음이 생길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지식/앎 정도를 자신이 정하고,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버리게 된다면, 결국 방종해져 결국, 자신도 돌보지 못하고, 진리도 알 수 없게 되는 퇴보하는 삶을 사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게되는 파트였습니다.


 


마치며


 철학의 세계는 참으로 어려운 것 같습니다. 특히나 플라톤 전공자도 아닌 저 같은 학사가 플라톤 저서에 관한 심도 깊은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예 불가능 생각합니다. 하지만, 학부 시절 모 교수님이 "희랍 철학은 철학으로서 가치도 있지만, 인생의 지침서로도 가치가 있지요."라고 말했던 기억이 납니다. 제 글이 지침서까지는 아니지만, 여러분에게 도움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그럼 연휴 잘 보내시고 저는 다음 글에서 찾아뵙겠습니다 :)




인용


1) 이후 본책에 대한 인용은 쪽수로만 표기하겠습니.

2) '아우구스티누스'의 중세철학사에 관해서 좀 더 자세히 알아보시고 싶으시다면, 요한네스 힐쉬베르거 <서양철학사> [상권],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 'Divine Illumination', F. 코플스톤 <중세철학사>, 김태규. (2010). 아우구스티누스의 인식론 -조명의 문제를 중심으로-. 한국중세철학회, 16. 의 저서들을 추천합니다.

3) S.P. 렘프레히트 <즐거운 서양철학사>에서는 아우구스티누스가 '신플라톤주의'에서만 영향을 받은 듯이 기술했기 때문에 '/(슬래쉬)'처리했습니다.

4)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2020년 02월 10일). Divine Illumination. Stanford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https://plato.stanford.edu/entries/illumination/#Rel-

5) 소크라테스는 신적인 계시들을 “수수께끼로 받아들이면서 그 뜻을 질문하고 이성의 힘을 빌어 그것을 풀이하려고”했다.(조대호. (2003). <소크라테스 윤리의 그리스적 전통에 대한 연구: 소크라테스 철학 안에서 이성과 신적인 계시의 관계>. 철학논총, 3(33)) 해당 인용에서와 같이 고대 그리스에서 신적인 계시는 수수께끼와 같은 형태였는데, 이러한 계시의 형태는 강제적인 가로막음이 없다고 봐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6) 미약한 지식으로 작성했지만, 굳이 짚고 넘어간 이유는 기원전의 사람들이 설명에 대한 객관화에 관해서 논리적인 방식을 말했다는 점에서 해당 부분을 작성했습니다.

7) 추가적으로 소크라테스의 이러한 철학적 근원은 고대 그리스의 전통적인 믿음인 “인간의 무지와 지혜의 신적인 기원에 대한 믿음”에서 왔습니다.(조대호. (2003). <소크라테스 윤리의 그리스적 전통에 대한 연구: 소크라테스 철학 안에서 이성과 신적인 계시의 관계>. 철학논총, 3(33), p. 317.)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