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더운 8월 퇴근길 지하철, 한동안 긴 잠을 자는듯했던 친구들과의 채팅방을 깨우는 메세지 하나.
"우리 오랜만에 어디 멀리 놀러 갈래?"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8월이었다. 정말이지 가만히 있어도 물 먹은 솜처럼 축 쳐지고 무거운 날씨. 당장이라도 바다로 향하고 싶었지만, 교실에 삼삼오오 모여 놀던 17살 소녀들은 어느덧 곱하기 두 배의 나이가 되었기에 날짜를 맞추기란 쉽지 않았다. 끝내 9월의 어느 날 바다 대신 숲 속으로 떠나기로 한다.
약속한 9월이 다가왔고, 날은 몰라보게 선선해졌다. 바다보다 숲을 선택하기 잘했어. 여행이라고 해서 거창할 것도 없이, 우리의 계획은 오직 횡성의 작은 마을의 통나무집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뿐이었다.
비가 촉촉하게 내린다. 마음과 정신이 상쾌해진다. 물기를 머금은 흙과 나뭇잎이 내뿜는 숲 속의 냄새. 비록 불멍은 못했지만 내리는 비를 가만히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산골짜기에 편의점이 있을 리가 없다. 숙소 도착 전, 마트에서 장을 본다. 무서운 속도로 담기는 쇼핑카트 안의 물건들. "이거 다 먹을 수 있지?" 잔소리하는 사람 한 명, 이에 질세라 "사람이 몇인데 당연하지" 방어하는 사람 한 명. 고등학생 때랑 달라진 게 하나도 없다는 생각이 들어 피식 웃음이 난다.
넓은 사이즈의 침대 하나. 누군가는 바닥행이지만 불평하는 이는 아무도 없다. 언제나 그랬듯 게임으로 공정하게 승자를 가릴테니 말이다. 사소한 것도 놀이거리가 된다.
어릴 때와 다른 점은 음료수 대신에 술이 있다는 것, 대화 주제가 조금 더 알싸해졌다는 것. 반면 한가지 여전한 것은 어김없이 내기에서 꼴지한 나.
"우리도 이런 집 짓고 에어비앤비하자. 지혜가 사장하고 우리는 직원 할게."
잡초와 잔디도 구분하지 못할 것 같은 친구들이 저 말을 꺼내니 머릿속이 까마득해진다. 고생길이 훤히 보이잖아? 하지만 잠시 상상해 본다. 내가 꿈꾸던 시골에서의 삶, 그리고 그 마을에 하나둘씩 뿌리를 내리는 나의 가족, 나의 친구들. 사실 나는 오래전부터 도시의 삶보다는 시골, 더 정확히 말하면 마을의 삶을 꿈꿔왔지.
하늘이 어두워지며 통나무 집이 더 환히 빛나기 시작할 즈음, 일사불란하게 저녁 준비를 한다. 누군가의 도움 없이 숯, 번개탄, 토치를 이용해 불을 지핀다. 불 하나 지폈을 뿐인데 무언가 우쭐한 감정이 든다. 나 이런 것도 잘하는 여자라고.
호스트가 선물로 놓고간 첫 수확한 감자와 양상추. 호일에 알감자를 돌돌 말아 불구덩이에 던진다. 부드럽고 아삭한 양상추를 맛본다. 양상추의 신선도, 오늘 몇시에 잘 것인지와 같은 일관성 없는 주제들로 대화를 하다보면 어느새 고소한 감자 익은 냄새가 난다. 호호 불며 감자 한알을 정성스럽게 까먹는 친구들 모습이 영락없이 귀엽다.
이번 여행에서의 좋은 기억은 역시나 사람이었다. 여름과 가을 사이의 정취를 함께 만끽한 정겨운 친구들. 그 추억을 더 풍성하게 만들어준 마음씨 따뜻한 호스트.
따뜻한 나의 공간에 좋은 사람들의 정겨운 온기가 가득해지는 나만의 통나무집을 다시 한번 그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