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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를 Feb 14. 2022

자유를 추구해서는 안 되는 이유

목줄이 없어진 개는 방황하고, 끈이 없는 연은 휘둘린다.

우리는 모두 자유라는 일종의 낙원을 추구하며 현재를 희생하며 억압과 강압, 통제를 견뎌낸다. 난 이런 압박을 받고 있는 여러 주변 사람들에게서 압박에서만 벗어나면 나만의 특별한 무언가를 하겠다며 선언을 하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다. 그리고 그 압박이 끝나자 무력하게 폰이나 만지며 쳐다보고 있는 그들의 상태도 확실히 봤다. 이건 그들을 조롱하려는 심산으로 하는 말이 아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사람 중에는 나 자신도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하지,
자유를 위해 노력하지 않는다.



위에서도 말했듯이 우리는 막상 고통에서 벗어나면 생각보다 그리 자유로움을 느끼지 못한다. 심지어 그토록 끔찍한 나치 강제수용소에 수년간 수감되었던 빅터 프랭클 박사도 속박 속에서 자유를 갈망하며 그 고통을 견뎌냈지만 막상 해방되었을 때 그가 느낀 감각은 '무감각'이었다. 


스스로가 내면이 풍족하고 자유로운 사람이라면 사실 내가 쓴 글이나 다른 고통에 대한 걸 굳이 찾아보려 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 글을 읽는 사람 중 자신이 불합리함에 처해있어 진정 원하고 있는 일을 못하고 있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이 있다면 자기 자신에게 한번 물어볼 필요가 있다. 내가 원하는 일이 단순히 '고통을 견디기 위한 명분'인지, 혹은 '그 어떤 것에도 구애받지 않고 진정으로 내가 하고 싶은 일'인지를 말이다.


솔직히 말해 나의 경우는 전자다. 즉, 나는 꼭 불합리한 고통이 존재해야만 뭔가를 하고 싶다는 욕구를 느끼고 실제로 노력하기도 한다. 그런데 막상 그 고통이 사라지면 목표도 비전도 무의미해지고 내면이 무기력 지는 자신을 관찰했다. 내 몸은 그 어떤 것도 실행만 한다면 실천할 수 있을 만큼 자유로울텐데 이상하게 고통이 있었을 때보다 행동이 더 따라주지 않았다. 딱히 안 해도 상관없지 않겠냐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몸은 너무나 자유로웠고,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지나칠 정도로 편했다. 그래서 나는 그 행동력이나 목표를 위한 욕구를 유지시키기 위해 고통을 추구하고자 하는 것이다.




스스로가 추구하는 것이 정말 자유인가?
아니면 그저 속 편한 쾌락인가?


물론 내가 말하는 것들이 단순한 궤변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런데 그전에 스스로 확인해야 할 것이 또 있다. 우리는 누구나 뜻이 정해져 있는 것처럼 '자유'라는 단어를 남용하는데 당신은 이 자유라는 단어를 어떤 의미로 사용하고 있는 것인가? 정말로 타인의 억압에서 해방된 상태로 인식하고 있는가, 아니면 내가 원하는 것(쾌락)을 원하는 대로 마음껏 누릴 수 있는 상태를 두고 자유라고 하는 것인가?


 진정으로 내가 실현하고 싶은 바를 온전히 실행할 수 있는 자율성이 주어진 상태로 해석하고 단어를 사용하는 사람이 있는가? 만약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퇴근한 뒤에는 자유다. 주말에는 이틀 내내 자유다. 내 말이 틀린 건가? 퇴근해도 가정을 책임져야 하고, 육아를 도맡아 해야 하며, 집안일, 지인과의 약속, 다음 주 출장이나 프로젝트 발표 등에 대한 걱정으로 편한 날이 없는가? 그럼 그 모든 것이 없어진다면 자유로워지는 건가? 가정도 꾸리지 않고, 육아도 필요 없고,  회사도 다니지 않고, 인간관계도 존재하지 않는 그런 상태가 자유일까. 내가 너무 반항적이거나 과장해서 설명한 걸까? 하지만 나의 주변 사람들은 자유를 이런 식으로 해석한다. 즉. 고통과 억압이 없는 상태를 말이다. 난 저번 글에서 세상은 고통으로 이루어져 있고 그렇기에 우리가 행동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그런데 그 고통을 부정하는 자세가 과연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에 대해서는 불 보듯 뻔하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우리가 흔히 원하는 '자유'의 실체는 사실 '권태'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강제적인 의무인 군 복무에서 휴가를 나와 잠시 자유를 느끼면서 하는 일이라는 것이 침대에 누워서 폰을 보거나 나가서 과식을 하고 밤새 오락을 즐기는 것이다. 이건 얼마 전의 나의 경우라는 사실을 밝힌다. 난 차라리 휴가를 나가지 않는 편이 나았다고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고 문화적으로, 관념적으로 난 가족의 곁에서 지내야 했고, 지인을 만나야만 했기 때문이다. 내가 내키지 않아 그걸 거부했다면 적잖은 불이익을 받았을 것이다. 난 어쩔 수 없이 순리에 따랐고 방탕하게 생활했다. 난 그저 어느 억압에서 다른 억압으로 넘어간 것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난 자유를 만끽하지 못했다. 나에게 자율성이 없었기 때문이다. 난 남들이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을 당연하게 따르는 척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늦게까지 자고, 공부하지 않고, 자기 계발도 하지 않고, 지인에게 얼굴을 비추고, 오락을 하거나 무의미한 대화나 주고받았다. 


(나늘 두고 스스로 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걸 체념하고 그저 권태와 나태에 찌들어 살면서 불평이나 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고 난 그 말에 동의한다. 실제로 난 불이익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몇 개월 만에 만나는 것임에도 가족과의 재회를 무시하고 스스로를 고립하는 행동, 지인의 약속에 대한 거절이나 무시, 형제나 지인과의 오락에 대한 기피 등은 나에게 집단적 불이익을 주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했고 온전한 나의 생각을 따르거나 공개하지도 않았다.)



내가 휴가를 나가서 이런 괴리를 체험하게 된 이유는 아마 자유에 대한 해석의 차이였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난 내가 원하는 것을 온전히 하는 것을 자유라고 해석한 반면(그림 그리기, 작곡 공부, 독서, 피아노 연습, 고양이 카페 방문, 일식집에서 식사, 카페에서 커피 마시며 독서 등), 그들에게 있어서는 권태나 고통 없는 생활을 자유라고 해석한 듯했다.(늦게까지 자기, 맛있는 거 많이 먹기, 가족과 항상 같이 있기, 많이 놀기, 충분히 쉬기 등 기준조차 명확하지 않다.)


스스로가 추구하는 억압에서 벗어난 자유가 진정한 자율성이 아닌 단순히 권태로부터 오는 쾌락을 위한 것인지는 않은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자율을 위해서는 적당한 압력이 필요하다.

속박에 몸부림치며 짖어대는 개의 목줄을 풀어주면 그 개는 영원히 방황한다. 날고 있는 연의 끈을 끊으면 바람에 이리저리 휘둘린다. 그리고 바람이 없으면 무력하게 바닥에 널브러져 있다. 중력이라는 압박에서 벗어난 우주선 파편은 우주미아가 된다.


우리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자유를 갈망하기 때문이 아니라 현재 처해있는 불합리한 억압 덕분일지도 모른다. 난 특정 억압에 시달릴 때마다 희망적이면서도 낭만적이며 심지어 비현실적이기까지 한 공상적이면서도 망상적인 미래를 그리게 되는 자신을 관찰했다. 그리고 그런 망상이 끝나는 시기는 반드시 그 억압이 끝난 직후였다. 허나 그 망상이 헛된 것만은 아니었다. 그건 실제로 노력만 한다면 충분히 이룰 수 있는 것이었고, 그 억압을 받는 동안 난 그것을 실현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나는 스스로에게 압력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사람을 더 원활하고 효과적으로 성장시키기 위해 필요한 것이 당근인지 채찍인지에 대해서는 여러 연구결과가 존재한다. 다만 내가 보기에 이러한 보상이나 불이익을 극단적으로 비유하자면 당근은 마약이고, 채찍은 고문이라고 생각한다. 당근으로 인한 행동은 보상의 광적인 집착을 발생시키며, 채찍은 광적인 고통 회피 본능을 발동시킨다. 이렇게만 본다면 역시 적당한 중도가 가장 이상적이겠지만 결국엔 당근이건, 채찍이건 이걸 얻거나 혹은 피하기 위해 행동을 한다는 점에서 그 사람은 미래에 있을 보상(쾌락을 주거나 고통을 주지 않는 것)의 굴레에 빠져있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한다. 그 굴레라는 표현에 부정적인 인식이 있을 뿐이지 목표, 비전, 가치 등도 굴레에 속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나를 어느 한 길로 가도록 통제하는 나만의 규율과도 같기 때문이다. 결국 내가 자율적으로 살기 위해, 자유롭게 살기 위해서는 일종의 굴레, 목줄, 압력이 필요하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원하는 것을 이루고자 헌신하는 사람은 어떻게 그렇게까지 할 수 있을까? 성취감, 긍정적인 영향력, 부, 명예와 같은 보상이 주어질 미래에 대한 기대 덕분인 것일까?


사실 내 개인적인 생각에서 봤을 때 가장 효율적인 실천방법은 갈 방향만 정해놓고 그냥 생각 없이 실천하는 것이다. 내가 말한 '생각 없이'라는 말은 미래에 대한 보상이나 기대에 대해 그만 되뇌고 현재에 할 일에 충실하라는 것이다. 자신이 길을 제대로 가는지에 대해 딱히 불안감을 가질 필요가 없다. 이미 방향을 정해놓고 시작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내가 궁수라고 가정해보자. 난 과녁을 향해 최대한 신중하게 각도를 맞춰서 화살을 쐈다. 화살을 쏜  직후부터 궁수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화살이 어떤 식으로 날아가서 어디에 꽂히는지만 확인하면 된다. 화살이 날아가는 도중에 어떤 걱정과 불안 기대를 가지더라도 무의미하다. 만약 그게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간다고 해도 내가 그 순간 취할 수 있는 실질적인 행동은 하나도 없다. 어쩌면 중간쯤부터 과녁의 어디쯤에 꽂힐지 예상되어 미리 기뻐하거나 절망할 수도 있다. 그런데 그건 숙련된 궁수만이 정밀하고 감각적으로 예상할 수 있다. 우리는 인생의 숙련자인가? 도전의 숙련자이며, 이미 수 십 번의 인생을 여럿 살고 그 모든 경험을 숙지한 채 다시 살고 있는 인생인가? 난 나의 내일도 예측할 수 없는 아마추어라는 이름도 과분할 정도로 삶의 초심자이기에 특정 방향을 향해 시작했다면 그 뒤는 딱히 생각하지 않는 게 오히려 낫다고 생각한다.





솔직히 말해 이 글은 단순히 자유라는 단어를 부적절하게 해석한 사람들에게 하는 말일뿐이다. 허나 어쩌면 이는 우리 모두에게 해당하는 사실일지도 모른다. 시각적으로 존재하지 않고 관찰할 수 없는 단어는 결국 모조리 추상적일 뿐이다. 결국 같은 단어라 할지라도 우리는 상황에 따라 입맛에 맛게 뜻을 변형시키거나 왜곡한다. 지금의 난 '자유'라는 단어를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한 명분으로 여기기도 하며, 어떠한 경우에는 고통이 아예 없는 경우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그렇게 변형할 수 있었던 것도 나의 상황과 처한 환경이 여러 방면으로 변하였기 때문에 가능했을 거라 생각이 든다. 가끔은 어디에서나 드물게 볼 수 있는 무지개를 찾는 것보다 차라리 아틀란티스를 찾는 것이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무지개는 찾고 나면 더 이상 미련이나 감흥이 없게 되지만 아틀란티스는 그것이 있다는 믿음만 전제하면 죽을 때까지 열정적으로 탐색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상 우리가 꿈꾸는 우리 멋대로 해석한 추상적인 단어에 대한 열망도 딱히 다르지는 않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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