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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를 Apr 15. 2022

출타

단편소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마치 스스로를 옥죄는 듯 불안감이 감도는 어두운 숲 속 한가운데에서 청년은 상당히 불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의자 위에 서있다.

'망할 햇빛이 먼저 나를 죽이려고 드는군.'

 청년은 빗줄기처럼 흘러내리는 땀을 훔치며 스스로에게 속삭였다. 이제는 그가 잡고 있는 밧줄도 눅눅하게 젖어서는 강하게 쥐면 머금은 땀이라도 주륵 내릴 것만 같았다. 그가 잡고 있는 둥글게 묶인 밧줄의 울 너머에는 자신이 살던 아파트와 다니던 직장의 건물이 보였다. 습기로 인한 것인지 무더위로 인한 것인지 식별하기 힘들었지만 눈살을 찡그리며 목을 죽 내밀어 자세히 주시를 해보려고 노력해도 그 형태는 뚜렷해지기는 커녕 점점 희미해져 마치 잿빛 하늘을 보는 것만 같았다. 어쩌면 밧줄 울 너머로 흐릿하게 보이는 소도시는 나의 고향이 아닌, 나의 생활터가 아닌, 나의 직장이 아닌, 나의 보금자리가 아닌 그저 울퉁불퉁하게 솟아난 잿빛 황무지의 아지랑이일 뿐이지 않을까 청년은 생각한다.

"그래, 지나온 모든 것들이 실제로는 광대들의 놀음에 불과했던 거야! 그들은 나에게 초대장을 보냈고 난 정중하게 거절의 의사를 밝혔지만 이내 나의 보금자리에 침투하여 팔다리를 잡아들어 나를 이곳으로 끌고 왔지. 그들은 나에게 자신들만의 규율을 준수하도록 강요하며 일종의 세뇌를 시도하려 했지만 어림도 없지! 나를 어느 병원의 수술실인지 실험장인지 모를 곳으로 데려가 나를 심문하려 든 것도 잘 기억하고 있어. 그리고는 나의 이목구비를 속속들이 확인하고는 마지막으로 뇌를 확인하려고 했지. 결국 참다못해 나의 머리를 어루만지는 수십 가닥의 손가락 중 한 개를 물어뜯었지. 마치 속이 빈 고무장갑을 씹는 듯한 감촉과 오물을 삼킨 듯한 역겨움에 잠시 동안 정신이 몽롱해져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눈은 부어서 앞이 보이지 않았고, 온몸이 욱신거리며 파란 멍투성이가 되어있었지. 내가 옆으로 쓰러져 있다는 사실도 뒤늦게야 알게 되었어. 멍으로 부어올라 가려진 시야 속에서 나를 내려다보는 똑같은 웃는 가면을 쓴 너희들의 모습을 보니 마치 창자 속의 융털이 연상되더군. 그래, 너희들은 너희들에게 이로운 양분만을 빨아들이며 남은 찌꺼기는 유기하거나 남들에게 책임을 전가해버리는 거야. 나는 너희 같은 광대들의 세게에 사는 것은 이제 진절머리가 나는군. 난 내가 원래 있었던 자리로 돌아갈 거야."

 청년은 이내 울 속으로 머리를 집어넣었으며 마치 턱을 괴듯 잠시 목젖 아래쪽으로 받치며 울에 기댄다. 청년은 그런 자세로 잠시 오랫동안 기대어 있었다. 그에게 있어 이 자세는 상당한 안락감을 주었다. 이제는 기억나지 않는 몽상에 가깝지만 자신이 이곳에 오기 전에 느꼈었던 몸과 사고가 부유하는 듯한 그런 안락감이었다. 원래 그가 살았던 세계는 그러했었다. 모든 것이 두둥실 떠있었으며 적막하고 고요한 공간에 눈앞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희미하게 일렁이는 오로라뿐이었다. 그는 이 세계에 오고 나서도 눈을 감고 있으면 이따금씩 그 세계를 관찰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정말 그러한 세계가 자신이 살았던 세계인지 기억할 수 없었다. 어쩌면 그러한 세계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으며 청년은 그 세계의 주민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혹여나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곳이 정말 그가 지냈던 곳이 맞는지도 알 수 없다. 심지어는 그 세계조차 망할 광대들이 만들어낸 무대 내지 세트장일지도 모른다! 이것은 정말 최악의 가정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생각들이 청년의 머릿속을 휘젓는 동안 태양은 점점 높아져 그의 정수리를 내리꽂았으며 흘러내린 땀은 기댄 밧줄 울에 스며들었고 그 땀을 미처 모두 끌어 담지 못하고 바닥을 향해 한 방울씩 뚝뚝 흘러내리고 있었다.

'드디어 자유를 얻었군.'

청년은 이렇게 말하고는 한쪽 다리를 들고서 반대쪽 다리로 자신을 지탱해준 의자를 걷어차려고 했다.

"아저씨는 지금 규율에 위반되는 행위를 시도하고 있군요."

 청년의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청년은 목줄을 양손으로 잡고 목에 건 상태로 뒤를 돌아보았다. 어린 아이다! 어린아이가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이다. 청년은 당황함을 금치 못했는데 평소에 예민했던 탓에 업무를 위해 격렬하게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음에도 옆방을 거니는 바퀴벌레의 발소리도, 기척도 느낄 수 있었던 그가 자신의 바로 뒤에 있는 어린 소년의 기척을 감지조차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소년을 등진 햇빛으로 인한 검은 그림자가 자신의 발꿈치 언저리를 간지럽히듯 꿈틀거리고 있었는데 청년은 그것을 인식조차 하지 못한 것이다.

"글쎄다, 네가 하는 말의 의도를 잘 모르겠군. 그나저나 넌 어떻게 내가 있는 곳을 찾아왔으며 무엇을 위해 이곳으로 온 거지?"

 청년은 그 소년이 자신의 선택을 방해한 것에 대해 적잖이 못마땅해했으며 그러한 이유로 말투에 무의식적으로 공격성이 묻어난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글쎄요, 저는 눈앞의 나비를 잡기 위해 그것만 보고 따라왔을 뿐인 걸요. 이 나비는 제가 봤던 것 중에 가장 신비한 나비인데 까맣고 부채처럼 큰 날개를 가졌지만 자신을 보호하려는 듯 몸을 감싸고 있으며 그렇게 큰 날개를 고작 갑옷의 용도로 사용한 것에 죄책감이라도 느꼈는지 굉장히 빠른 속도로 땅 위를 달리는 게 아니겠어요. 아마도 발에 피가 나도록 연습을 한 덕분이겠죠. 잠시라도 그것으로부터 눈을 떼어버리면 이미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나아가 놓쳐버리기 일수였어요. 가끔씩 그 나비를 주시하다 보면 마치 바퀴벌레를 보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기도 했는데 그런 건 이제와서는 상관없겠죠."

 소년은 바른 자세로 청년을 올려다보며 마치 누군가가 외우도록 강요한 듯이 또박또박 말했다. 소년은 말하는 동안에도 청년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청년은 그렇게 바라보는 소년의 시선에서 옛날 생각이 잠시 떠올랐으며 그에 더해 내리쬐는 폭염 때문인지 정신이 몽롱해서 하마터면 의자 밑으로 떨어질 뻔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목을 밧줄 울에 기대고 있어 다시금 균형을 되찾을 수 있었다. 밧줄에 연결된 나뭇가지가 꽤나 굵고 튼튼하여 청년을 받주기에는 충분했다. 잠시 동안 정적이 이 공간을 삼켰으며, 해는 점점 기울어 소년의 등 뒤로 내려가고 있었다. 소년의 그림자는 점점 청년의 발 위로 스멀스멀 올라와 마치 먹잇감을 눈치채지 못하게 입속에 천천히 넣으려는 심해의 포식자처럼 느껴졌다. 청년은 이 소년으로 인해 곧 파멸해 버릴 것만 같은 불안을 느낀다. 해는 점점 피를 섞은 듯 붉게 물들기 시작했고 땀은 점점 식어 모든 것이 꽁꽁 언 듯 시려져서 몸을 벌벌 떨고 있었다. 첩자가 분명하다! 분명 이 어소년 역시 광대들의 후손이며 나를 체포하여 연행하기 위해 철저한 교육과 훈련을 받은 초년생일 것이다. 내가 이러한 사실을 뒤늦게 짐작한 이유는 분명 그는 아직 깨끗한 존재이기 때문일 것이다. 분명 망할 광대들과 오래 접촉한 탓에 소년의 뇌에는 균이 전염되었을 수도 있겠지만 손은 아직 때 묻지 않은 순수함이 아직은 남아있다. 이 얼마나 가련한 존재인가! 애석하게도 소년의 오염된 뇌로는 자신의 손을 바라볼 수도 없으며 자신의 손의 상태를 명확히 식별하지도 못할 것이다. 소년은 마치 겉으로는 윤기도는 붉은색을 띄지만 반을 도려내서 그 내면을 보면 검게 썩어 벌레가 득실거리는 사과와 다르지 않다. 청년은 그러한 사실을 직관하고 있음에도 더 이상 소년과 같은 인간을 동정하지 않는다. 내면이 썩은 것을 알고 있는 사과는 신선하게 보관할 필요도, 경건한 대접을 위해 냉장고 깊은 곳에 고이 모셔둘 이유도 없다. 이러한 사과는 박멸해야 마땅하다. 이 세상에서 사라져 버려야 한다.

 "그래, 모든 것이 그들의 소행이었어. 너희들은 다시금 나를 끌고 가 너희 입맛대로 나를 원치 않는 곳에 앉힐 것이며 이리저리 휘둘러대겠지. 이제 그런 사실은 또다시 겪을 가치도, 필요도 없을 정도로 정확하게 꿰뚫고 있어. 자세히 보니 너도 그들처럼 가면을 쓰고 있군. 그 역겹고도 가식적인 미소. 너희들은 항상 그런 식인 거지. 마치 영원한 선의를 베풀 것처럼 입가에 미소를 머금으며 나에게 접근을 해오지만 그 모든 안면의 형태가 그저 싸구려 가면에 지나지 않았어. 그러한 의도가 노골적인 접근, 동정, 선의 등을 어째서 당시의 나는 눈치채지 못했는지 의문이 들 정도야. 바퀴벌레의 움직임에만 신경을 기울인 탓인지도 모르지."

 청년의 말이 끝났을 때는 이미 해는 산 아래로 떨어지며 이제는 슬슬 칠흑이 감돌기 시작했다. 찬 바람이 불어 몸은 완전히 식어버렸고 손도 꽁꽁 얼어 밧줄에서 떼어지지 않았으며, 밧줄 아래로는 고드름이 바닥을 내리꽂았다. 소년은 더 이상 형채를 식별할 수 없었고, 검은 실루엣만이, 자신을 삼켜버릴 듯한 검은 그림자만이 자신의 목자락까지 올라온 것이 보였다.

 '최악의 여행이로군!'

 이 속삭임을 끝으로 청년은 재빠르게 의자를 걷어찼다. 이내 밧줄은 팽팽해지며 청년의 목을 휘감아 그를 떠받쳤으며, 그의 발은 새로운 여행지에 도착한 이국인처럼 신나는 듯한 명랑한 달리기를 하듯 공중에서 큰 원을 그리며 빙빙 맴돌았다. 그런 시늉을 하고 있자, 순간 마치 구름 속에 가려진 우주의 주민이 자신이 매달린 밧줄을 끌어올려주는 듯한 온화한 감각을 느꼈다. 어쩌면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희망이 머릿속으로 피어나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이내 청년은 의식이 흐릿해진 탓인지 어두운 풍경에 착각이라도 한 것인지 눈앞에 가면을 쓴 수많은 소년, 소녀들이 자신에게 달려오고 있는 모습을 보았으며 하나둘씩 자신에게 기이한 괴성을 지르며 매달리는 것으로 보아 그것이 착각이 아닌 현실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소년, 소녀들은 공중에 매달려 있는 청년을 향해 높게 뛰어올라 매달렸고, 그 무게에 밧줄을 지탱하고 있는 나뭇가지는 점점 아래로 휘어 지면에 가까워지도록 만들었으며, 아이들의 무게로 인해 그의 목은 더욱 강하게 조여져 의식은 점차 희미해졌고, 그나마 그가 최종적으로 고대했던 일출의 끝도 제대로 보지 못할 것 같았다. 수를 셀 수 없을 지경으로 매달린 아이들은 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입을 크게 벌려 꺼름칙한 웃음소리를 내며 청년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이렇게 매달린 아이들로 인해 청년의 발바닥은 지면과 밀착했다. 이 마을 주민들은 어떤 식으로든 청년을 떠나보내지 않기 위해, 혹여나 출타에 성공했다고 하더라도 창의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사실상 떠나지 않았다는 명분을 만들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하는 듯이 비춰졌다. 그는 마지막으로 향하려는 여행지까지에도 못 가도록 필사적으로 제지하며 지독하게 자신을 못살게 구는 이 마을의 주민들에게 끔찍한 환멸을 느끼며 원치는 않았지만 급하게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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