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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를 Feb 10. 2022

자살은 경위가 어떠했든 검증 실패한 삶이다.

아무리 끔찍해도 끝까지 살아야만 하는 이유

한국이 다른 나라보다 자살률이 높은 것은 연구가치가 있는 흥미로운(즐겁다는 것이 아니라 눈독 들여 관심을 가질만한 주제라는 의미)사회현상이긴 하지만 사실상 내가 관심 있는 것은 타인이나 사회와 연관된 자살의 문제가 아니라 단순히 나와 관련된 자살 욕구의 문제다. 어째서 사람은 스스로 삶을 포기하려는 욕구에 빠지는 것일까? 나의 경우, 그 이유는 간단하다. 지금의 문제에서 벗어나고자 했지만 그 어디로 도피하더라도 벗어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투박한 비유이기는 하지만 내가 하는 게임이 질리거나 더 이상 플레이하는 것이 힘겨우면 가장 현명한 판단은 그 게임을 꺼버리는 것이다. 사실 RPG 게임이나 우리 일상이나 크게 차이 나는 것이 무엇인가? 매일마다 반복적인 임무가 있고 완료하고 적당한 보상을 받는, 혹은 특정 프로젝트를 위해 조직이 단합하여 수행하는, 그러다가 잠깐 휴식을 취하며 담화를 나누거나 성장이랑은 별 연관 없는 이벤트성 놀이를 즐기는 것. 사실상 우리 일상이랑 비교해 시간 흐름이나 성장 속도가 빠른 것 외에는 큰 차이가 없어 보인다. 그러한 게임은 질리거나 도저히 깨지 못해 의욕과 흥미를 잃게 되면 끄면 그만이지만 현실은 어떻게 해야 하나? 현실이 각박하고 도저히 나아가거나 살아갈 수 없다는 생각이 들면 스스로 목줄을 메달아 숨통을 끊어야 하는 것인가?




사실상 자살을 하고 말고는 본인 자유다.


세간은 자살 자체를 극도로 지양하는 경향을 보이지만 사실상 자살을 하든 말든 그건 본인의 자유가 아닌가? 모든 위기나 문제는 사람마다 자신만의 해결책이 있는 법이다. 다만 그중에서 모든 문제와 인과관계에 대한 책임을 내던지는 행위인 자살을 택하는 것은 내가 보기에는 그리 현명한 판단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자살 자체가 비도덕적인 행위라느니, 암묵적으로라도 생각하거나 논해서도 안된다는 틀에 박혀 무의식적으로 반응하는 식으로 얼렁뚱땅 결론을 지어버리는 행위 나로서는 그리 호의적으로 받아주기는 힘들다. 나에게 있어 이는 상당히 중요한 입지를 차지하는 문제이며, 예민하고 위험한 문제이기에 조심성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자살을 할지는 본인의 자유라고 극단적으로 말한 이유는 정말로 모든 편견과 관념을 들추어내고 들여다봤을 때 그것이 딱히 틀린 말은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오해의 여지를 위해 다시 말하지만 난 이것이 그리 현명한 판단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는 것을 명심해주었으면 한다. 자살이라는 것은 문제 회피의 관점에서 본다면 가장 최종적이며 최후의 수단이다. 그리고 제목에서도 말했듯이 자살은 그 경위나 사유가 어떠했든 간에 자신의 총체적인 삶을 평가한다는 면에서는 실패한 삶일 뿐이다. 이는 영화를 초반까지만 보다가 재미없다고 꺼버리는 것과 같다. 아직 이야기가 전개되거나 대단원으로 나아가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영화를 부분적으로만 보고 명확한 평가를 내리는 것은 불가능하며 설령 평가를 내리더라도 그 평가는 모순된 것이다. 이는 마치 맛보지 않은 음식의 맛을 평가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삶 또한 이와 같다. 별다른 사고나 질병으로 요절하는 것이 아닌 이상 개인은 자신의 삶을 자연사할 때까지 살아보지 않는 이상 자신의 삶을 전체적으로 평가하는 것은 모두 모순된 것일 뿐이다. 20대인 내가 삶을 허무하고 무가치하다고 평가하여 자살해도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아니, 그 시기에 평가를 하는 것 자체가 모순인 것이다. 난 아직 평균적인 수명의 절반조차 살아보지 않은 실정인데 어떻게 감히 나의 삶을 평가할 수 있겠는가. 그렇기에 자살을 한다는 것은 말 그대로 스스로의 삶을 평가하고 검증하는 데 실패한 결말일 뿐이다.





과거의 나는 어느 정도 나 자신에게의 위안이나 위로를 위해 자잘한 내면 일기를 적고는 했다. 하지만 최근 들어서 나는 이성과 합리성, 납득성을 추구하게 되었다. 즉, 나 자신이 스스로 납득할 수 도록 특정 심리현상을 분석하여 개념화나 이론화를 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나 자신이 겪는 심리적 고충을 좀 더 유연하게 대처하기 위함인데 사실 이런 활동 또한 위안을 위해 시도하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순 없을 것 같다. 문제에 관해 사색하고 생각하고 그에 대한 것들을 글로써 정리하는 것은 나름의 성취감도 느끼고 뒤죽박죽이던 논리도 꽤나 정렬시켜준다. 하지만 여전히 나는 혼란을 느끼고 고통을 느낀다. 이는 나 자신의 실존에 관한 문제이며, 나의 존재에 대한 나의 끝없는 불확신과 의문으로 인한 것이다. 생각과 관념, 가치, 신념, 삶에 대한 색안경 등을 모두 걷어내고 바라보면 늙어 죽는 것과 지금 당장 죽는 것과 근본적인 차이가 없다는 결론을 내려버린다. 내가 성취해내는 그다지 크지 않은 성과들이  인류 속 특정 집단 속에서는 나름의 가치가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우주적인 시점에서 본다면 뭐가 어찌 됐든 상관없는 일이 아니겠는가. 심지어는 인류의 존재와 종속 자체도 우주의 시점에서 본다면 단지 벼룩의 생사보다도 하찮은 일이지 않겠는가. 그래도 나는 색안경을 끼는 것을 선택하고 싶지는 않고 걷어진 진실에의 베일을 다시 가리고 싶지는 않다. 진실로부터 외면하고 싶지 않다. 물론 우주적 관점에서는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하찮은 인류 속의 한 개인이 아무리 이런 진실에 대해 탐구한다고 해도 통제할 수 있는 거라고는 하나도 없을 것이다. 정말이지 만취한 인간처럼 세상만사, 혹은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수많은 문제들에 대해 망각하며 살아가는 것이 더 현명할 수도 있다. 그중에서 어떠한 선택을 할지가 내가 앞으로 해결해야 할 수많은 과제 중에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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