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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운 Nov 24. 2023

여정에 담긴 우리

사랑스러워

여행이 이야기로 남는 건 여정에 담긴 '우리' 때문이다.

정경이 나의 오롯한 감동이라면, 이야기는 우리가 나눈 기억인 것처럼.  

파리에서의 여행담을 최근 남기면서 그때의 누군가가 떠올랐다.

공통어는 '사랑스러워' 정도로 해두겠다.


사랑스러워 #1.

몇 건의 이벤트를 겪으며, 우리 몸은 알게 모르게 긴장이 배어 있었다.

원 없이 걷고 즐기는 순간에도 경계가 함께했다.

방에 돌아와서야 긴장이 풀렸는데, 가족에 대한 기도와 일기를 루틴으로 기절하듯 잠에 들었다.

며칠 뒤 니스 해변에 들렀을 때, 탁 트인 바다가 주는 정경에 익숙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정경 못지않게 마음이 놓였던 건 파란 수영복의 주인공이었다.

동그란 체격의 할머니 한 분이 손주와 물놀이를 하고 계셨다.

백발의 할머니와 몸을 드러낸 청량한 파란색의 비키니라니.

무해한 이색적 풍경이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할머니의 동그란 배와 어깨는 아기 체형을 닮아 멀리서 보면 키가 큰 아기 같기도 했다.    

체형 어딘가 나의 할머니와 닮은 구석이 있어 자연스레 외할머니 생각이 났다.

파란색 수영복을 입고 공놀이를 하는 외할머니의 모습은 상상만으로도 사랑스러워 웃음이 났다.    

사랑스러운 정경에 빠져 있던 우리에게 고무공이 넘어왔다.

마땅한 불어를 찾지 못한 나는 꽉 찬 미소로 공을 전해 드렸다.

손주의 손을 잡고 오신 할머니가 해맑게 공을 받아 안으며 감사 인사를 하셨다. 사랑스러운 꼬마도 함께.  

나와 친구는 바다와 할머니의 공놀이가 주는 안전한 풍경에 깜박 잠이 들어 버렸다.

단잠에서 깬 우리는 우리가 그렇듯 마음을 놓아 버린 사실이 놀랍고 아찔해 웃어버렸다.

정경으로부터 받은 끄떡없는 보호였다.  

사랑스러워 #2.

열차는 이태리 어느 마을을 지나고 있었다.

우리 칸에 들어서자 짙은 볼터치에 다홍색 머리칼을 가진 할머니가 앉아 계셨다.

우리는 열차의 약속인 듯 할머니와 가볍게 인사를 나누었다.

우리를 바라보는 할머니의 미소가 고왔다.

창밖의 풍경과 여정을 나누다 배낭에 있던 초콜릿을 꺼내 할머니께 건네 보았다.

소녀처럼 웃으며 인사를 보낸 할머니는 초콜릿을 손에 쥔 채 다시 기도손을 하셨다.

사실 우리의 신경은 자리에 앉은 순간부터 할머니에게 가 있었는데, 설렘을 주체하지 못하는 할머니의 몸짓과 눈빛 때문이었다.

간절히 누군가를 기다리듯 기도손을 풀었다 가슴에 얹다를 반복하는 할머니에게서 숨길 수 없는 설렘의 소리가 새어나왔다. 할머니의 설렘이 사랑스러웠다.  

할머니의 비밀은 잠시 뒤 자연스럽게 풀렸는데, 우리 칸 문이 열리며 한 남자가 들어왔다.

크고 마른 체격에 화려한 차림을 한 남자였다. 많아야 서른 초반으로 보였다.

남자의 등장과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난 할머니는 탄성을 지르며 그를 안았고, 그는 할머니의 손에 입을 맞추었다. 할머니의 옥타브가 소녀 팬처럼 높아졌다.

할머니와 남자는 서로의 손을 놓지 않은 채 이야기를 이어갔다. 중간중간 입맞춤도 함께.

마주한 연인의 입맞춤마다 방황하던 우리의 시선은 영화 같은 장면에 자꾸만 슬며시 눈길이 갔다.

할머니의 순정이, 행복이 오래가길 바라보았다.

시간은 바야흐로 시에스타였다.

사랑스러워 #3.

스위스의 모든 기억은 풍경처럼 청량하게 남아있다.

파랗고 탁 트인 자연 못지않게 사람들 대부분이 따뜻했다.

그중에서도 인터라켄에서 만난 세 분의 할머니를 빼놓을 수 없다.

친구와 나는 인터라켄에 있는 동화 같은 마을을 걷고 있었다.

옥색의 호수를 비롯해 산에 둘러싸인 이곳에 요정이 아닌 사람이 살고 있다는 사실이 이질적일 정도로 아름다웠다. 더욱이 우리의 숙소는 근처 어딘가에 위치해 있었다.

숙소를 찾아가던 중 고와 보이는 한 무리의 할머니를 보았고, 우리는 길을 여쭤보았다.

친절한 설명 끝에 할머니는 우리에게 어디서 왔는지 물으셨다.

우리의 답에 반가운 기색을 보이시며 당신의 친구가 한국전쟁에 참전했다고 하신 할머니는 몇 년 전 한국 여행도 다녀왔다 말씀해 주셨다.

할머님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헤어지는 길에 나와 친구는 한국에서 준비해 간 선물을 드렸다.

전통 탈이 달린 키링이었다.  

익살스러운 표정의 키링을 보고 소녀처럼 웃던 할머니들이 키링을 가슴에 안으셨다.

집에 돌아온 듯한 포근함에 기억은 그림처럼 남겨졌다.


#돌아보면

여행을 빛내는 건 대개 자연이나 새로 본 유형의 것들이지만 실로 오래가는 건 사람인지도 모르겠다.

다음의 기약이 없기에 더 집중해 서로를 바라보는 사람들.

온기가 필요한 이방인과 온기를 가진 사람들의 이야기. 나누는 온기 속에 나의 할머니가 오버랩되었었다.  

할머니와 바다를,

할머니와 기차 여행을,

할머니와 아름다운 풍경을 함께 하고 싶었다.

그리고 끊임없이 나의 할머니가 보고 싶다.


*이미지 출처: Pexel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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