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 한가운데
요사이 시간에 흔들리는 중이다.
숫자는 우리의 시간을 겨냥하고 있다.
언제부턴가 감각이 무뎌진 나는 나이를 묻는 질문에 태어난 해로 답하곤 했다.
어려지는 것도, 나의 나이가 많은 것도 신경 쓰지 않았으므로 '만 나이'도 와닿지 않았다. 그저 나의 해로 살아갈 뿐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나의 부모에 대한 것이라면 얘기가 달라졌다.
부모님의 칠순을 기념했음에도 여전히 내 기억 속 앞자리는 과거로 회귀해 있었다.
실감도 실감이지만 바뀌어 버린 앞자리를 인정하기 어려웠다.
스물에서 서른이 되던 해 느꼈던 마음의 간극처럼 앞자리 7은 8에 곧 닿을 것처럼 조바심을 불러왔다.
나의 부모가 나이 드는 것이, 느려지는 것이 무언가 사무쳤다.
오지 않은 일을 때로 사서 걱정하는 나는 마주할 자신이 없는 것들에 대한 기우를 말끔히 헹구지 못했다. 그들 한가운데 ‘시간’이 있었다.
내 의지와 무관하게 흘러가 언젠가 이별하게 되는 일.
빠름을 습관처럼 실감하게 되는 시간은 반대로 붙들고 싶은 것이기도 했다.
어느덧 찾아온 봄을 맞으며 분기 하나가 지나간다는 사실에 새삼 또 놀란다.
바쁜 일상에 내가 놓치고 있는 것들은 과연 얼마나 될까. 아니 얼마나 많을까.
얼마 전 이모할머니의 사진을 보며 헛헛해하시던 엄마의 모습이 기억났다.
몰라보게 수척해지신 이모할머니의 얼굴은 겁이 나도록 낯선 것이었다.
집과 회사를 반복하는 일상은 지극히 정상적이지만 가끔 너무 여상해 시간마저 허술하게 지워버렸다.
매몰된 구구단에 답을 하고 있는 기분도 들었다.
그렇게 매일을 보내는 우리는 매년 같은 시기에 같은 사실로 놀라곤 했다.
벌써 한 해의 반이 지났다는 사실에 습관처럼 놀라며 KPI(Key Performance Indicator)를 점검하고, 연말이 되면 믿기지 않는다는 듯 서로의 얼굴을 바라봤다.
우리를 두고 시간 혼자 가버린 느낌에 허망해하면서도 결국 시간에 끌려다닌 듯 패배를 인정하고 마는 것이었다.
가끔은 여전히 모르겠다.
하루에 충실하나 마냥 보람되지만은 않은 이 기분을 해석하기 어렵다.
쳇바퀴처럼 바쁜 한 해를 보낸 내가 종국에는 아껴 쓴 시간을 반납하는 기분마저 드는 것이다.
나이가 들수록 시간에 가속이 붙는단 어른들 말씀은 틀리지 않을 것이고, 시간에 굴복 않을 채비를 해야만 할 것 같다.
눈을 뜨고 올려다본 하늘로 내 사랑 목련이 어느새 함박웃음을 터뜨리고 있고, 길가의 꽃들 모두 바지런히 봄이 되어 있다.
오늘의 행복에 한가득 숨을 불어넣어 본다.
*대문 이미지 출처: pexel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