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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성윤 Jul 26. 2022

33년의 세월과 우동 한 그릇

소년 시절과 함께 했던 정독도서관 우동 국물을 마주하다

초등학교 다니는 딸의 방학 과제로 서울교육박물관을 찾는 것이 있어 검색해 보았더니 장소가 정독도서관 바로 옆에 위치해 있었다. 뭐 정독도서관? 내가 예전에 다녔던 그 정독도서관 근처에 서울교육박물관이 있다고?   

서울교육박물관은 정독도서관 부속 건물처럼 되어 있었고, 딸의 과제 덕분에 재수생 시절이던 1989년 이후 33년 만에 정독도서관을 방문하게 되었다.

                     

정독도서관은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즐겨 찾던 곳이었다. 당시에는 지금처럼 집 근처에 공부할만한 도서관이 없었고, 내가 갈 수 있는 곳은 정독도서관과 남산도서관 2곳뿐이었는데 정독 도서관 특유의 분위기를 좋아했다. 휴일이면 도시락 2개를 싸고 정독도서관을 찾곤 했는데, 식당 메뉴 중에 다행히도 우동 국물이 있었다. 우동은 300원이어서 좀처럼 사 먹기 어려웠지만, 우동 국물은 50원으로 저렴한 편이어서 가난한 학생들이 주로 이용하는 메뉴였다. 재수생 시절 도시락 밥을 우동 국물에 말아먹은 뒤 담배 한 대 피우는 순간에는 미래에 대한 불안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었다. 도시락 2개를 먹을 우동 국물 100원에 까치 담뱃값 100원, 하루에 200원만 있으면 하루하루를 버틸 수 있었던 시절이었다.         


                                     

정독도서관과 함께 했던 재수생 시절을 지나 대학생이 되고, 사회인이 되면서 정독 도서관에 대한 기억은 잊혀갔다. 더 이상 50원짜리 우동 국물에 감사한 마음을 갖지 않는 것처럼, 힘들었던 시절을 기억하고 싶지는 않았다. 삼청동을 비롯해서 정독 도서관 근처에 간 적은 꽤 있었지만 한 번도 정독 도서관 내부로 들어간 적은 없었다. 서울교육박물관을 거쳐 정독도서관 내부로 들어가 보았다. 33년의 세월이 지났는데 오히려 도서관 내부는 예전보다 깨끗해진 듯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정독도서관 열람실에는 '청춘, 여름, 꿈의 무대 고시엔-100년 역사의 고교야구를 통해본 일본의 빛과 그림자.'가 꽂혀 있었다. 10대 소년 시절 다니던 추억의 장소에 50대 중년이 되어 나타난 자를 반겨주는 듯한 모습이었다.          


        

예전에는 그냥 식당이었는데 지금은 '소담정'이란 이름까지 붙어있었다. 33년 전 300원이었던 우동은 4000원이 되었고, 우동 국물이란 메뉴는 존재하지 않았다. 일본 소설 '우동 한 그릇'에 나오는 내용처럼 '예약석'은 표시는 없었지만 내 기억 속 자리에 앉아 우동을 주문했다. 예전 우동 국물이 고춧가루에 김가루를 섞은 것이었다면 지금 우동 국물은 일본식의 간장을 위주로 한 맛이었다. 객관적인 맛은 분명 달라졌지만 마음속에서는 예전 추억 그대로였다. 여러 가지 소회를 이야기하니 아내가 금의환향한 것 같다고 말한다. 내가 뭐 큰 성공을 거둔 것은 아니지만 틀린 말도 아닌 듯했다. 미래가 불안하던 고학생이 어쨌든 대학을 거쳐 세상에 어느 정도 안착했기 때문일 것이다.             


  

33년 전 정독도서관이라는 같은 공간에 있었던 사람들은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을까? 이들 가운데 꿈을 이룬 사람은 과연 얼마나 될까? 다행히도 지금까지 여러 행운이 겹쳤다는 사실에 감사할 따름이다. 정독 도서관 식당은 아주 맛있었다. 하지만 다시 먹지는 않을 것이다. 33년이라는 오랜 시간을 거쳐 되찾은 추억을 깨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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