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끌미끌한 촉감의 선크림을 그렇게 싫어했던 사춘기 시절, 어린 동생과 함께 여름방학이 되면 경기도 B시의 고모네에 며칠을 묵었다. 고모는 나와 동생을 ‘시골에서 왔어’라고 소개했고 나는 광주는 시골이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입 밖으로 내뱉지는 않았다. 그때도 광주는 광역시고, 고모네는 경기도에 속한 B시였다. 경기도민에게 도시와 시골의 경계란 서울과의 거리로 측정되는 것일까, 어렴풋이 생각했을 뿐이다. 버스를 한참 타고 나가야 시가지가 보이던 당시의 B시였지만 그들에게 나는 ‘시골 애’였고, 그들은 나에게 ‘도시’를 보여주어야 했다. (이제야 그 시절 사촌이 말한 ‘도시’가 ‘서울 및 서울에 준함’임을 안다) 스티커 사진도, 대형 마트도 모두 광주에서 흔한 것들이었는데, 나는 까맣게 탄 시골 애였고, 사촌은 하얀 도시 애여서. 나는 정말 까맸고, 세련되게 예쁘게 보여야 하는 줄 몰랐다. 내가 그나마 알아차린 건 그 ‘촌스러움’이 ‘시골 애’와 너무 잘 어울린다는 것과, 광주는 B시보다 크지만 서울에서 멀다는 사실 뿐이었다.
시간이 흘러, 엄마를 사랑하는 장녀는 세상의 순리대로 할머니를 적으로 여기기 시작했고, 그런 장녀와 고모의 관계란 큰 무리 없이 언제나 나쁜 쪽으로 흘렀다. 할머니 집이 있는 전라남도 C군은 시골이었다. 인도 없는 논밭 사이의 2차선 옆 정류장에는 하루에 버스가 지나가는 시간이 쓰여 있었고, 집 한 편에 작게 과자 몇 개를 놓고 파는 구멍가게보다 작은 구멍가게 하나가 있다가 사라지던 마을이었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할머니 것일지 모르는 넓은 논과 감나무밭, 해가 쨍쨍할 때 따야 한다며 땡볕에 끌려가던 고추밭, 비닐하우스, 이름 없는 개울, 작은 계곡, 마을을 둘러싼 산뿐이었다. 중학생 때는 통화 신호가 잘 안 잡히는 까닭에 마당에 나가서 문자를 보내야 했고, 아궁이에 불을 때 바닥을 데우면서 고구마와 절편을 던져 넣던, ‘000의 첫째 딸이에요’라고 설명하면 모두가 아는 작은 시골 마을. 명절마다 끌려가 갇히듯 지냈던 C군을 나는 시골이라고 불렀고, 그럴 때마다 고모가 나를 설명하듯 말이 떠올랐다. 시골에서 왔어요.
시골은 한국의 경제 성장 이데올로기에서 배제당한 채로 하위 영역을 차지하다 결국 부정적인 가치들을 모두 끌어안게 되었다. 잘 살기 위해서 응당 그러해야 한다고 믿었건만, 낙수 효과는 신기루였으며 시골은 발전되지 않음을 이유로 낙후, 고령화, 소멸, 촌스러움, 혹은 도시의 반대항으로서 조용하고 공기 좋은 살기 좋은 공간으로 타자화되었다. ‘지방/시골’ 이데올로기에 종속된 ‘시골’은 결국 서울 외 지역을 집어삼키며, 무기력함(노력하지 않음) 혹은 계몽 가능성 있음(능력 없음)을 의미하게 된다.
광주는 시골이 아니라 ‘지방’이었지만, 지방 사람인 나의 선언은 유효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떠나야 했다. 지방 거점 광역시임에도 불구하고 시골이라고 불리던 광주에서 벗어나, 나는 비-지방민이 되고자 했다.
수도권이라는 통칭으로 서울·인천과 헐겁게 묶여 있는 경기도 남부 A시에서 첫 직장을 가지게 되었을 때, 혈연과 지연 그리고 학연, 그 무엇으로도 엮이지 않은 새로운 도시에서 어느 정도 홀가분했고 또 그만큼 외로웠다. 나고 자란 광주에서 대학까지 졸업하고 처음으로 나온 바깥은 서울은 아니었지만 유사하게 서울과 가까웠다. 고모의 말은 언제나 나를 찌르고 있었기에, ‘그놈의 경기도’가 얼마나 도시인지 두고 보자는 마음은 전라남도 C군을 떠올리게 하는 논을 바라보고 나서야 사그라들었다. 사람들이 열망하는 ‘서울’이 사실 태양이 아니라 블랙홀이라는 사실은 이때까지 알지 못했다. 당시 경기도 A시는 농업인구가 더 많은 시골이었지만, 나는 어린 시절의 고모와 정확히 같은 논리로 그곳을 시골로 부르는 일을 꺼렸다. 보라색 시외버스를 타면 서울까지 한 시간이 걸렸다. 직행버스가 없을 때는 지하철과 버스를 몇 번을 갈아타고는 2시간에 걸려 집에 왔다. 서울과 가까워지고 싶은 열망이, 결국 서울이라는 표면장력에 속하지 못했지만 그렇게 부지런히 왕복 2시간이 넘는 시간을 고속도로에서 버리면서 ‘올라왔다’고 말했다. ‘위’로 올라왔다고. 그러한 무의미한 방향성을 바보같이 믿었다.
ⓒ전일빌딩14, 광주문화관광
직장생활 때문이라는 이유로 사투리를 지웠고, 광주 출신인 줄 몰랐다는 직장 동료들의 말은 칭찬으로 들었다. 아무래도 ‘광주 출신’은(이때의 ‘광주’는 ‘전라도, 호남’과 동의어다) ‘광주 출신’이었으니까. 모 기업 인사 담당자의 말에서부터 특정 커뮤니티 사상에 물든 남자 동료, 전라도 사투리를 구사하는 인물이 등장하는 영화나 드라마, 전라도 출신 유명인의 잘못을 논하는 기사의 댓글에서, 친구의 친구의 경험담에서 ‘광주’는 한 번씩, 두 번씩, 너머 다섯 번씩 그 어떠한 ‘광주’가 되었다.
코로나19가 막 퍼져 나가던 시절, 경상도 지역에서 대거 확진자가 나왔을 때는 ‘지역 봉쇄’가 판타지가 아니던 지방민으로 두려워했고, 만약을 떠올리며 더욱더 두려워했다. 그 어떠한 ‘광주’는 선거철이 되면 또 다른 얼굴을 뒤집어썼다. 이 세상을 구할 무언가로, 그리고 여전한 ‘홍어, 빨갱이, 전라디언’으로, ‘한 정당만 지지하는 무식한 지방’이자 ‘투표로 특정 정당의 잘못을 처단하는 정의로운 지역’으로 다들 광주라는 이름을 자기 입맛대로 소화했다. ‘광주’는 언제나 행정구역 명칭 이상의 함의를 지녔다. ‘광주의 시위는 뭔가 달라’, ‘5.18민주화운동의 발상지 광주는’, ‘빨갱이 광주는’, ‘뒤통수치는 게 특징인 광주는’, ‘홍어내 나는 광주는’, ‘광역시인데 별 볼 것 없고 발전도 안 된’, ‘전라도 광주는’.
나는 거주지를 광주 밖으로 옮기자마자, 사투리를 지우면서 광주를 지우고자 했다. 나는 ‘민주화의 성지 광주 출신’이지만 동시에 ‘항상 배신하고 홍어나 먹는, 여권이 있어야 갈 수 있는 전라디언 빨갱이들의 도시 광주 출신’이었고, 그건 구렸다. 전라도 사투리를 연기하는 배우의 역할은 ‘멋있다’라는 이야기를 듣기도 하는 경상도 사투리와는 다르게 촌스럽고, 구닥다리고, 멍청한 역할이 많았고, 경상도를 제외한 타지역의 사투리와 비교했을 때도 광주 혐오를 위해 정치 논평에서 사용되는 경우도 흔했다.
상경한 경기도 A시의 생활은 벅찼고, A시를 떠돌며 약 5년을 버텼지만 A시는 고향에 준하는 안정감을 줄 수 없었다. 사투리 쓴다며 꼭 집어 한 번씩 말하던 A시의 동료들 사이에서, 나는 서울이 가까워서 너무 좋다며 말하면서도, 서울로도 가지 못하고 광주도 가지 못하는 이 애매한 위치를 점거했다. 혼란스러운 나이에서도, 나 자체로도 모든 게 어정쩡했다. 광주에서 ‘위’로 올라왔지만 여전히 시골인 이곳에서, 나는 지방민도 비-지방민도 아니었다. 서울은 계속해서 나를 내치는 것만 같이 너무 컸고 높았고 두려웠다. 넘나드는 톨게이트가 나의 자격을 시험하는 검사대 같았다.
A시의 스타벅스에 앉아 놀리는 땅을 바라보고 쓰레기 태우는 냄새를 맡으면서, 여기는 어디인가, 나는 누구인가를 물었다. 해가 지면 개구리가 울던 논 옆의 포장된 인도를 걸어가며, 수많은 개구리(혹은 두꺼비)가 논에서 뛰어 올라와 내 길 앞에 나타나지 않기를 빌면서 실눈을 뜨고 걸음을 빨리했다. 타지에서 직장생활을 하는 동향 친구들과 비슷한 이야기를 나눴고, 지지대 없이 서 있는 두려움을 공유했지만 불안감은 해소되지 않았다. 희한하게도, 친구가 나에게 ‘오메’라고 보내기 전까지는 그랬다. 나의 고민과 힘듦을 토로하던 메시지 사이에, 친구가 보낸 그 ‘오메’라는 메시지(뒤에 아마 ‘힘들겄네’와 같은 위로의 말이 붙어 있던 걸로 기억한다)를 보고서는 그 ‘오메’가 너무 ‘촌스럽고 구려서’ 떠나고 싶었는데, 정확히 떠나고 싶었던 만큼 그 구림을, ‘오메’를 사랑한다는 걸 알았다.
광주를 떠나고 싶어 하던 이유가 정확히 다시 내가 광주에 있어야 하는 이유가 되었다. 일자리가 없고, 급여가 적고, 문화생활을 즐기기가 어렵고, 중심에서 배제당하고 있고, 평소에는 별반 주목받는 일이 없다는 이유가. 그리고 중심에서 기득권들에 의해 계속 좌지우지되는 어떠한 ‘광주’들의 이미지들이, 행정구역의 명칭임과 동시에 과도한 긍정적 혹은 부정적 함의를 가지는 ‘광주’를 다시 쓰도록 나를 종용한다.
ⓒ아시아문화전당야경, 광주문화관광
지방은 ‘서울 아님’의 땅이고, 당연하게도 각각의 ‘지방’들이 있다. 제주도 출신 친구는 ‘제주 4.3사건’에 대한 이야기가 ‘광주 5.18민주화운동’만큼 말해지지 않는 사실을 지적하고, 강원도 출신의 사람들은 ‘지역 논의’에서 ‘경상도-전라도’의 대립 구도가 형성되어 ‘강원도’가 불리지 않는 점에 대해서 말한다. 얼마나 많은 ‘지방’들이 지방 속에서 다시금 지워지는가, 그리고 그 이야기들이 다시 비-지방민에 의해서만 불리게 되는가. 언제까지 ‘서울 공화국-지방 식민지’ 구조가 유지될 수 있을까? 언제나 지방에 관해 이야기하는 지방민들이 ‘그러게, 네가 노력해서 서울로 오지 그랬어’라며 무시당할까. 지방은 언제까지 서울과 비교되어 열패감에 휩싸여야 하는가?
그리고 광주는, 광주는 도대체 어떻게 불려야 할까? 대형 서점 두 개뿐이고 소극장도 몇 개 되지 않는다. 미술관도 전시장도 서울에 비해서 열악한 수준으로 수가 적다. 그러나 내가 겪은 광주는 전라도의 청년이 유입되는 공간이며, 국내 유일 2층 단관 극장인 광주극장에서 영화 보는 맛이 있는 도시이고, 광주극장 영화제와 광주 여성영화제가 별미이며, 국립아시아문화전당(ACC)과 광주 비엔날레가 높은 수준의 전시 및 전시 연계 프로그램, 예술교육 등을 제공하는 예향 도시다. 그리고 오월이 되면 고요한 소란이 이는 근대역사를 간직한 도시이기도 하다. 5.18민주화운동 최후항전지인 구도청의 층수를 넘기지 않기 위해 지하로 층을 내려 지은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의 뜻을 생각하면서, 지금의 우리와 앞으로의 우리가 이 지방 도시와 새롭게 맺어 나갈 관계를 기대하게 된다. 과거에만 매몰되지 않고, 미래에만 몰두하지 않고 현재에서 조화를 이루어 공존하는 곳으로 광주를 재의미화한다.
지방에도 이름이 있다. 내가 사는 광주는 주체에 의해 호명된 바로 그 촌스러운 ‘오메’이며 사랑하는 ‘광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