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예술 인프라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부메랑처럼 돌아오리라 기대하는 말이 있다. 아마도 대부분, 그리고 어느 정도는 이러한 생각을 하게 될 터인데. ‘그러니까, 네가 공부(혹은 취직)를 잘해서 서울로 왔어야지’가 첫 번째이고, ‘그런데, 서울 살아도 바빠서/비싸서 잘 못 봐’가 두 번째다. 그러므로 서두를 빌려 미리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모두에게 동등한 환경과 기회, 그리고 재능이 있지 않는 한 ‘공평한 경쟁’이 가능하다는 것은 착각이며, 그러한 결과의 공정이 세상의 모든 부조리를 해결해 줄 수 있으리라는 것도 신자유주의교 능력주의 신화에 불과하다. 두 번째로는 ‘서울 거주민들도 잘 못 본다’라고 반박 아닌 반박을 꺼내 드는 경우가 있는데, 이를 위해 미리 밝혀본다.
이건 ‘접근성’에 관한 이야기다.
서울 소재 국립공연에술박물관에서 하는 무대 미니어처 만들기 프로그램에서, 초등학교 고학년 정도 되어 보이는 자신감 있는 어린이가 자신이 만든 무대를 소개하는 모습을 봤다. 자신이 만든 무대를 설명하면서, 처음에 연극이 시작하면 커튼이 올라간다며 막을 올리고 무대 오브제를 인물의 입장과 퇴장, 동선에 맞추어 설명하던 그 어린이는 공연 예술 문화에 아주 익숙해 보였다. 그리고 그 어린이는 손쉽게 장래 희망을 공연 예술과 관련한 분야로 잡을 것도 같았고, 그 다짐이 특히 새롭거나 신기하거나 어려운 일은 아닐 것 같아도 보였다. 그리고, 박물관을 나와 버스터미널로 돌아가는 길에 한여름 땡볕 아래 땀에 전 티셔츠 자락을 펄럭이면서 발가락 끝에서부터 정수리 끝까지를 타고 폭발하는 감정이 있었는데, 그건 그 멋진 어린이로 인해 형성되었다고 말하기도 추했다. 그러니까 진작 어른이 된 나는 그 어린이가 부러워서 죽어버릴 것 같았다. 지금부터 내가 무엇을 해도 보상 가능하지 않을, 그 어린 시절의 문화 인프라 경험 때문이기도 했고, 그 환경을 당연한 사람들은 평생 나의 추하고 저급한 마음을 이해할 수도, 생각해 볼 수도 없으리라는 믿음 때문이기도 했다.
뮤지컬을 보러 가기 위해서, 광주송정역에서 용산역까지 가는 KTX를 끊는다. 오전 9시 44분, 4만 6천8백 원. 약 2시간. 왕복으로 하면 약 10만 원이다. 광주와 서울 내 이동 시간을 합하면 총 7시간 30분을 이동에 소요한다. 보통 중극장 뮤지컬 가격은 R석 기준 7만 원이다. 운이 좋아 초대권을 받았다고 쳐도 이제 나는 무엇이 이득인지 알 수가 없다. 애초에 이 문장들 사이에 ‘이득’이라는 단어가 어우러지는 질 수 있나? 이렇게 되면 지방 거주 자체가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고작 100분 뮤지컬을 위해 7.5시간 동안 교통수단을 타며 17만 원을 지불하고 나면 어쩐지 억울하다.
교통수단이 발달하여 광주와 서울의 이동 시간이 1시간 30분으로 단축된다고 해도, 문화시설 접근성이 향상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SRT는 정차역이 없는 만큼 KTX보다 더 빠르고 그만큼 더 비싸다. 시간은 재화로 치환될 뿐이고, 접근성은 결코 얻을 수 없다. 서울은 블랙홀이기에 그저 계속해서 모든 문화 자본을 빠르게 흡수하면서 그것을 ‘발전’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그것을 ‘독점’이라고 말한다.
1995년, 국제적 규모의 동시대 미술전이 서울이 아닌 지방 그것도 광주에서 열린다는 소식은 사람들은 의아하게 만들었다. 문화를 도구화하여 도시 성장을 꾀한 시 정부와 공무원들은 시민단체와 예술가들에게 5·18에 기반한 광주 정신을 지우려고 문화 기반의 장소마케팅을 하려는 것 아니냐며 비판받았다. 공무원들을 동원하여 관람객 수를 늘리기 바빴던 제1회 광주비엔날레에 전세 버스로 동원된 할머니 한 분은 다음 비엔날레에도 오겠다고 말했는데, 그 이유를 “광주에서 하는 거니까!”[1]라며 답했다. 난해한 현대미술 작품 앞에서 광주에서 큰 행사를 한다는 이유만으로 다음번에도 참석한다고 답변한 할머니의 말이 지방 문화예술행사의 양적 부재를 증명한다. 그렇다면 2024년 현재 서울과 지방 사이 문화 인프라의 격차가 조금은 줄어들었을까?
문화체육관광부가 발표한 <2023 전국 문화기반시설 총람>에 따르면, 문화시설은 경기 609개, 서울 449개 순으로 수도권 3개 시·도에 문화시설의 36.5%가 분포되어 있다. 지방에 문화기반시설의 총량은 전보다 증가했으나 관련 인력 수, 평균 이용 현황, 예산 등의 지표가 수도권이 지방보다 훨씬 양호하게 나타났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문예연감 2023>에서는, 2022년 40,534건의 문화예술활동 중 15,377건이 서울에서 개최되었다고 밝혔다. 그다음으로는 경기(4,274건), 부산(2,926건), 대구(2,345건), 경남(2,244건), 전북(1,612건), 광주(1,579건)로, 서울·경기에서 전체 문화예술활동 48.5%가 이루어지고 있다.
노무현 정부 때 부여받은 ‘아시아 문화중심도시’라는 이름이 허탈해지는 이 수치는 여전히 그 이름에 가닿기에는 요원하다. 1990년대생인 내가 광주비엔날레에 방문하는 이유는 1995년도의 할머니의 대답과 같다. 그 전시가 광주에서 개최되기 때문이다. 광주 사람들은 여전히 광주에서 한다는 이유만으로 문화예술행사에 참석한다. 어린 시절부터 외할머니, 외할아버지와 함께 유원지 소풍 가듯 방문했던 제1회 광주비엔날레부터 중고등학교 시절 학교에서 단체 현장학습으로 관람했던 비엔날레, 고3 때 처음으로 내 손으로 입장권을 사서 관람했던 제9회 광주비엔날레까지. 나의 어린 시절은 작품 설명과 도슨트를 들어도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여러 현대 미술작품과 함께했다.
교복을 입고는 친구 뒤꽁무니를 따르기 바빴고, 친구와는 시간 보내기 바빴던 유일하게 접근성 있던 현대미술 전시회는 ‘비엔날레 키즈’라는 아이들을 배출했다. 어릴 때부터 비엔날레를 관람하는 경험으로, 현대미술에 관심을 가지고 관련 예술 업계에 종사하는 예술가들은 스스로 ‘비엔날레 키즈’라고 불렀다. 지방에서 비엔날레가 개최되지 않았다면, 이들은 무슨 꿈을 꿨을까? 그리고 이들이 서울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면, 그러니까 ‘서울에서 하니까!’라는 이유를 들지 않고도 보러 갈 수 있는 공연과 전시가 널린 환경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면 또 다른 취향을 만들어 냈을지 모른다. 그렇다면 애초에 접근이 불가능한 도시의 어린이는 어떠한 취향의 어른으로 자라날 수 있는가?
“디나이얼 지방 출신”[2]은 자신의 출신 도시가 서울과의 관계 속에 낙후성을 얻은 까닭에 자신의 출신을 지워 서울에 속하고자 한다. 상경한 이들의 디나이얼이 현재 자신의 환경에 맞춰 정체성을 변화시키려는 시도라고 본다면, 지방에서 지방을 디나이얼 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가 될까? 내가 나고 자란 도시를, 걷는 거리를 지내는 동네를 부정하는 까닭은 내가 서울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감각은 어디에서 오는가?
대한민국의 높은 학구열은 고등학생의 대부분을 서울 소재에 있는 대학교에 입학하는 것을 목표로 두도록 한다. 열아홉 살까지 우리가 지내는 곳은 내가 선택할 수 없는 토양이라면, 스무 살부터 내가 있을 곳은 바로 나의 능력으로 쟁취해 낸 자격이 된다. 그러므로 나는 광주에서 나고 자랐지만, 성인이 된 이후까지 광주에 남아 있다면 그것은 광주에 ‘남겨진/버려진’ 것이 된다. 지방대 입학을 둘러싼 사회의 조롱과 비난, 대학 입시에서부터 실패했다는 감각, 내면화된 열등감으로 광주에 ‘남겨지고’ 나면 이제 ‘지잡대생’의 발언권은 상실된다. 노력 만능주의는 이제 지방의 문화 인프라 부족조차 개인의 문제로 손쉽게 치환한다. 그러므로 서울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감각은 지방에 ‘도태’되고 ‘실패’한 인간이 아니라는 정체성을 확보하기 위한 생존 본능에 가까워진다. ‘접근성’은 나의 노력과 능력으로 말미암아 알아서 해결해야 하는 문제가 된다. 그렇기에 어린이를 부러워하는 이유가 뱉지 못할 만큼 역겨운 질투가 되는 것도, 내가 아직 ‘지방’에 있는 것이 나의 잘못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광주에 있기를 선택한 ‘비엔날레 키즈’는 무엇을 할까? 어떠한 취향을 얻었을까? 5·18이라는 상흔 아래, 비경험자로서 오월 정신을 이어받은 어린이들이 형성한 취향은 무엇이 될까? 적어도, 이들이 광주에 살며 광주를 거부하지 않으리라는 사실, 그리고 광주라는 로컬리티 자체가 취향의 일부를 구성한다는 것은 확실하다. 지방을 긍정적으로 의미화하는 일이 지역 정체성을 바탕으로 한 문화예술가들이 발생해 나올 단단한 터가 되어주리라 생각한다. 지금도 내 두 발이 닿은 길, 길이 이어진 동네에서, 지역에서, 지역에서 함께 지내는 사람에서부터 시작하는 단단한 도시 정체성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런 도시 정체성은 우리의 ‘취향’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래서 지방에도 로컬 정체성이란 취향이 있다고 말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