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코엑스 근처로 잡은 값싼 숙소는 이름만 비지니스호텔인 낡은 오피스텔이었다. 작은 창을 가리는 흰색 블라인드에는 낡고 말라비틀어진 얼룩이 많았다. 블라인드를 올려 창문을 열지 말라고 말하는 것 같이. 블라인드만큼 벽지에도 커피색 액체가 흐른 얼룩들이 누군가 성급히 휴지로 닦아낸 듯이 엉겨 붙어 말라 있었다. TV장 옆으로는 누군가 잘못 구멍을 뚫었는지, 아니면 공중화장실의 구멍처럼 휴지를 꽂아 막아야 하는 용도인지 모를 빈 구멍들이 많았다.
카드키와 함께 받은 안내 사항에는 호수의 이름과 동일한 와이파이를 사용할 수 있다고 쓰여 있었지만, 하필 내 방 호수의 이름으로 잡히는 와이파이는 없었다. 별수 없다고 생각하며 옆방의 와이파이를 잡았다. 침대 옆에 협탁이 없는 게 아쉬웠으나 그보다 더 아쉬웠던 점은 발치에 있는 콘센트와 짧은 충전기 줄이었다. 머리를 밑으로 돌렸다. 흰 베개에 가렸던 얼룩이 보이는 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천장에 달린 에어컨 날에 낀 먼지까지는 차마 넘기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그것도 별수 없는 가격이다.
촌스러운 네온사인이 걸린 모텔 같은 프런트에서 이름을 말하자, 남자 직원은 한참을 내 이름을 찾았다. “아고다에서 예약했는데요.” 덧붙인 정보가 필요했던 걸까. 아고다에서 굳이 영문명으로 이름을 적으라는 점이 예약 때부터 거슬렸던 참이다. 이름과 전화번호가 적혀 있을 예약자 정보에, 남자와 눈 마주치는 일을 피하면서 빠르게 키를 잡아챘다. 예약할 때부터 내 방은 그곳이었을까? 내가 여자라는 점이 방 배정에 영향을 주었을까? 홀수 층은 여자만, 짝수 층은 남자만 받을까? 걸쇠 없이 도어락만으로 잠기는 문이 신경 쓰였다.
이러한 종류의 불안은 제주도 호텔에서 30대 남성 직원이 마스터키로 투숙객의 방을 열고 성폭행했다는 기사를 마침 어제 읽은 까닭일까? 정신병리학적 특성인가? 사회문화적 영향인가? 기질적인 특성인가? 그 얇은 문으로는 다른 투숙객들이 들고 나는 소리가 다 들렸다. 몇 번을 내 방문이 열리는 줄 알고 놀란 채 상체를 일으켰다. 그러면서도 그런 것들이 다 무슨 의미일까 싶어 이어폰으로 귓구멍을 막았다.
저녁은 간단하게 햄버거에 맥주를 마시기로 했다. 길은 골목을 나서서, 테헤란로를 따라 쭉 걸어가 역삼역 2번 출구 근처의 식당. 버스에서 한 정류장 일찍 내린 탓에 한 번 걸은 거리가 익숙해지길 바랐던 건 실수였다. 강남 코엑스에서부터 버스를 타고 내린 빌딩 거리. 정장 차림을 한 직장인에 잔뜩 기가 죽어 골목으로 들어가자, 거리의 모든 사람이 삼삼오오 모여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담배 연기에 콜록대는 순수한 비흡연자는 아니었는데도, 냄새가 독했다. 길거리 흡연자들은 보행자가 지나가면 그나마 피하는 ‘척’이라도 하던데, 서울에서 양복 입은 놈들은 싸가지가 없다고 생각했다. 고개를 들었다. 파란 표지판이 보인다. 강남구 테헤란로.
사업장만 가득한 고층 빌딩이 늘어진 대로(大路)는 보행자에게 호의적이지 않다.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은 사무용 빌딩 1층에 입점한 프랜차이즈 카페(주로 스타벅스)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것도 빌딩 입구를 통해야 하는 까닭에 일차적으로 보행자의 입장을 저지한다. 이 길로 출퇴근하는 직장인과 일일 보행자의 괴리가 증폭된다. 횡단보도에서 초록 불을 기다리며 티셔츠 끝을 만지작거렸다.
하필 새벽에 모기가 눈을 물어 한쪽 눈만 우습게 부어오른 까닭에 뿔테 안경을 쓰고도 눈이 안 보이게 모자를 깊이 얹었다. 마르크스가 크게 인쇄된 티셔츠에, 만 원 주고 지그재그에서 산 나일론 바지를 입고, 무신사에서 세일 할 때 산 스트링 백팩을 맸다. 메시지로 친구에게 이 길이 너무 주눅이 든다고, 나는 ‘맑스’를 품에 안을 만큼 큰 그릇의 인간이 아니라는 우스갯소리를 보냈다. 이런 농담이나 깔짝대는 나와는 달리 진짜 마르크스사상연구소 뭐 이런 데에서 대단한 연구를 한 사람들이 빌딩 안에 가득 차 있을 것만 같았다. 쓸데없는 생각들이 이어진다. 밥을 먹고 다시 돌아가야 하는 대로가 불편하고 껄쩍지근하다. 라거 330ml와 500ml 중에 큰 걸 시켰다. 직장인의 무기가 깔끔한 외형과 정장이라고 한다면, 이 길을 되걸어가야 하는 나의 무기는 맥주다. 전에 만난 동생의 말이 떠오른다. ‘언니는 남 시선을 너무 많이 신경 써, 사람들은 언니한테 관심 없어.’ 나도 아는 말이다.
속이 얹혔다. 제목이 되는 것들이 있다. 제목이 되는 건 소재가 되고, 주제가 되고, 주인공이 된다. 우습게도 테헤란로는 제목이 된다. 그래서 ‘나’가 테헤란로를 걸어간 일은 글감이 된다.[1] 테헤란로는 “서울특별시 강남구 역삼동의 강남역 사거리에서 삼성동 삼성교의 구간에 이르는 도로”[2]다. 지식백과를 그대로 베껴 쓴 단어 뭉치. 강남구 역삼동이 어디인지, 강남역 사거리에서 삼성동은 또 뭐고, 삼성교는 어디인지. 모두 다 뉴스에서 떠들어대는 ‘여의도 크기의 N배’ 같다. 아무도 모르는데, 모두가 알고 있다고 여기는 것들. 서울이 지방을 문화식민지 삼고 있다는 이야기 등이 모두 다 뒤섞인다.
서울의 대로는 나를 옴짝달싹 못 하게 만든다. 사람으로 가득 차던, 비어있던, 해가 밝은 낮이던, 아무도 없는 새벽이던 그 공간은 각가지 다른 이유로 나를 쭈뼛대게 만든다. 제목이 되는 힘일까? 아니면 이 감각이 ‘광장공포증’일까? 개인의 정신병리적 현상일까? 비서울인의 배배 꼬인 추악한 질투일까? 주인공이 ‘나’이지 않은 적 없다는 서울의 믿음 때문일까? 그러므로 ‘테헤란로’라고만 적어 두어도 모두 서울을, 강남구를, 고층 빌딩을, 직장인들을 떠올릴 거라고 믿는 나의 믿음 때문일까?
대로가 나를 응시한다. 시선은 폭력적이다. 이곳에 있으면 안 되는 존재에게 가해지는 ‘신사적인’ 형벌은 무언의 응시다. 사르트르는 타인은 존재는 ‘지옥’이라고, 타자의 시선은 ‘나’라는 주체를 산산조각 내 짓밟는다고 말했다. 그러나 대로는 나를 응시하지 못한다. 사실 내가 대로를 응시한다. 널찍한 도로, 수많은 차선, 클랙슨을 울리는 차, 차선을 변경하려는 버스, 비상등을 깜빡이는 택시, 넓은 폭으로 심어진 가지치기 되지 않은 가로수, 빼곡한 고층 빌딩, 포장된 넓은 도보, 오고 가는 사람, 멈춰선 사람, 버스에 탄 사람들. 나는 대로에서 나를 응시한다. 제목이 되는 테헤란로에서 제목이 되지 못하는 나를 본다. ‘나’라는 일인칭 화자의 주체성이 공간으로 전환되자, 그만큼 비어버린 ‘나’ 안에 불안이 차오른다. 그렇게 대로가 나를 응시한다. 계속해서 대로가 나의 불안을 부풀린다.
모욕감에 위축되어 두려운 채로 숙소에 들어섰다. 흰색 커버가 헐겁게 씌워진 이불을 힘껏 끌어 올려 몸을 다 덮었다. 보지도 않는 TV를 틀고, 간접 등도 켠 채로 눈을 감았다. 얼룩과 먼지, 의미 없이 뚫린 구멍들과, 테헤란로 따위를 생각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TV 속에서 누구인지 모를 연예인들이 실없이 웃는 소리가 소음처럼 들려오고, 등에 접착한 매트리스의 촉감을 느끼면서 위에 덮인 이불의 무게를 가늠한다. 그제야 내가 서울에 ‘조금 있는’ 것만 같았다. 매트리스에 눌린 자국이 남는 만큼, 이불 위로 솟아 오른 발가락 정도로, 내가 조금씩 돌아오고 있었다.
[1] 그러한가? 왜 이 경험을 글로 쓰려고 마음먹었는가? 글감으로서 적절히 활용되었는지는 쓰는 지금 순간에서도 불투명하다.
[2] [네이버 지식백과] 두산백과 두피디아 ‘테헤란로’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152920&cid=40942&categoryId=32191)
[원문 링크]
아트인사이트, [에세이] 테헤란로는 제목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