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아침부터 하루종일 비가 내리고 있다.. 사실은 그제 내가 이곳에 도착한 이후부터 계속 비의 연속이다. 심하게 비가 내릴 때는 행동의 제약이 커서 최소한의 바깥 활동만 하며 집안에 머무르고 있다. TV에선 계속 비 소식을 전하고 있다. 태풍이 중국 상하이 부근을 지나다가 진로를 오른쪽으로 바꿔 북상중이라니 아무래도 태풍이 완전히 지나가기 전까지는 며칠 더 비의 행진을 지켜보아야 할 것 같다. 대낮인데도 하늘은 짙은 구름으로 덮혀있어 실내가 어둡다. 정원의 나무들은 세찬 바람을 이기지 못하고 끊임없이 심하게 흔들리고 있다. 지붕을 넘어 나무 데크까지 뛰쳐들어온 빗물로 인해 데크가 흥건하다. 거실의 큰 창으로 건너다 보는 흐린 하늘과 나무들의 거무스름하고 음울한 모습들이 마치도 북유럽의 전형적인 궂은 날씨를 그대로 재현하고 있는 듯해서 마음이 깊게 가라앉는다.
이런 날엔 그저 가만히 앉아서 음악에 귀를 기울이거나 재미있는 책을 읽는 것이 최선이다. TV에서도 바닷가 가까이에 가지 말기를 권고하고 있으니 어차피 선택의 여지도 없는 셈이다. 마침 fm에서는 드보르작의 교향곡 8번이 울려 나오고 있다. 오늘같은 날씨에 딱 어울리는 음악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다른 일에 정신 팔리지 않고 음악에 집중하면 어떤 음악이나 다 좋다. 그러다가 문득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2번이 듣고 싶어져서 걸음을 옮겨 오디오 앞으로 가서 cd를 올려 놓는다. 피아노가 부서질 듯 휘몰아치는 음의 현란한 향연이 언제 들어도 시원해서 다른 모든 것을 잊게 해준다.
인간이 자신을 자연과 동떨어진 별개의 법칙과 기제를 가진 현상으로 이해하면 자연을 대상으로 이런저런 불만이나 공감을 표현할 수 있을 테지만 사실 그것은 근본적으로 틀린 생각이다. 인간이 아무리 자연을 정복하고 극복하고 자연에 대해 승리를 쟁취했다고 착각하더라도 인간은 자연의 일부일 뿐이라는 엄연한 진리에 굴복할 수밖에 없다. 인간이 수백 번 죽었다 깨어난다고 해도 그건 절대로 도달할 수 없는 경지이며 그걸 바래서도 안된다. 날씨의 변화 하나에만도 이렇게 움추리는 인간의 현실을 똑바로 직시해야 한다. 이 요란한 궂은 날씨는 가을로 이행해가는 과정의 통과의례라고 생각하고 쿨하게 받아들여야 옳다. 다만 좀 심하게 느껴져서 억울할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올해 유난히도 길었던 폭염에 이어 폭우까지 밀어닥치니 자연의 위력을 새삼스럽게 실감하게 된다. 다가올 가을과 겨울에는 또 어떤 날씨가 선을 보이며 우리들을 기함하게 할지 모르는 일이다. 힘없는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그저 묵묵히 견디어내는 것 말고 또 무얼 할 수 있을까. 자연 앞에서 겸허해지고 조용히 순응해야 할 것이다.
기상이변, 온난화, 온실가스, 온난화에 의한 해수면 상승 등의 용어들은 이제 주위에서 수시로 들려오는 단어들이다. 언뜻언뜻 그 용어들이 주는 암담한 미래에 한 번씩 오금이 저려오는 기분을 느끼기도 한다. 요즘은 아무리 무관심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탄소중립이라는 단어를 들어봤을 것이다. 인간의 욕망이 만들어내어 손을 쓸 수 없는 정도로까지 커져버린 환경오염과 재앙적 기상이변은 바로 그 주범인 인간을 바로 턱밑까지 위협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그래서 우리나라도 2050년까지 탄소중립을 목표로 갖가지 정책을 세워 실천해 나가면서 국민들을 계도하고 있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이런 노력에 아랑곳없이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사치와 방탕을 일삼고 있다. 마치도 ‘소비가 미덕’이라는 이데올로기의 화신이라도 된 듯이 말이다. 사실 ‘탄소중립‘이라는 목표는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불가능한 목표로 보일지도 모른다. 냉소적으로 “그게 가능해?”라고 되물을 수도 있다. 소심하고 소극적이고 지레 겁먹어 목을 움추리는 사람들은 행동은 아무것도 안 하면서 미래를 불안해하며 다른 사람 뒤에 묻어갈 궁리만 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안 통한다. 모든 사람들이 심각성을 인지하고 조그만 것부터 실천해 나가야 한다. 탄소중립 실천방안 속에 들어있는 음식쓰레기 배출량줄이기, 대중교통 이용하기, 일회용품 사용 중지, 장바구니 이용하기, 비행기 안 타기 등과 같은 실생활에서 금방 적용가능한 방법부터 꾸준히 실천해 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모든 생명의 원천인 비, 하늘에서 비가 내리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하는 시답잖은 상상을 해본다. 길게 말할 것도 없이 모든 생명이 말라 죽을 것이다. 그런데 유치한 상상을 더욱 연장시켜서 하늘에서 비는 내리지 않지만 강과 호수와 바다에 항상 물이 넘치게 있다면? 그렇다면 모든 생명이 말라 죽는 일은 없을 것이다. 강과 호수의 물을 끌어들여서 지금처럼 모든 필요와 욕구를 채울 수 있을 것이며 지금과 비슷한 모습으로 살아갈 것이다. 바다에는 바다생물들이 자유롭게 유유히 살 것이고 강과 호수에도 각기 거기에 맞는 생물들이 살고 있을 것이다. 다만 멍청한 듯이, 잠시라도 모든 것을 초월한 듯이 ‘비멍’을 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하늘에 마치 구멍이라도 뚫린 듯이 내리 퍼붓는 비도 없을 것이고, 극한 호우의 피해가 어떻고 저떻고 하는 뉴스도 없을 것이며 우산을 쓰고 비옷을 입고 빗물 흐르는 거리를 차박차박 걷는 일도 없을 것이고 유리창에 뿌리는 비가 방울져 흘러내리는 것을 볼 일도 없을 것이다. 지금까지 비와 연관되어 느껴졌던 감정들, 비와 관련된 행위들, 비로 인한 행, 불행도 없을 것이다. 살만은 하지만 느낌은 별로 없는, 다소 삭막한 세계가 펼쳐질지도 모른다. 비는 어쩌면 우주의 섭리에 의해 지상으로 떨어져 내리는 선물인지도 모른다. 지상의 공기가 뜨거워져서 하늘로 올라가 수증기가 되어 구름이 되고 그것이 너무 많아지면 비가 되어 혹은 눈이 되어 떨어져 내리는 이 현상은 인간으로선 알 수 없는 신의 섭리로 치부하는 것이 마음 편할지도 모른다. 왜 인간은 하고 많은 행성 중에서 바로 이 지구라는 별 위에서 살게 되었을까, 인간과 동물, 더 나아가 모든 생물이 살아가는 원리는 결국 똑같은 것이라는 사실, 공기라는 것이 있어서 숨을 쉬게 되고 또 그 공기는 순환하며 비가 되고 눈이 되고, 그 비가 없으면 지구상에 생명이 마실 수 있는 물은 없다는 것, 태양은 지구를 덥혔다가 식혔다가 해서 계절의 변화가 이루어진다는 것, 이 모든 섭리에 갑자기 겸허해지는 그런 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