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흘 전쯤에 스위스에 다녀왔다. 여행을 다녀오면 몸은 나른하고 피곤하고 기회만 있으면 소파에 파묻히며 헤롱대지만 머리 속은 온갖 생각들로 가득해진다. 아직도 햇빛 비치던 레만호의 푸른 물결이 눈에 어른거리고 융프라우에 남아있던 하얀 눈밭이 기억 속에서 환하게 빛난다. 스위스의 산들과 계곡과 초원과 호수와 집들의 아름다움은 쉽게 잊혀지는 대상이 아니다. 그런 풍경이 어디 그렇게 쉬운가. 그러나 아쉬움도 있다. 내가 40년전에, 또 20년 전에 보았던 풍경과 지금의 풍경은 너무 많이 다르다. 나는 대략 40년 전에, 독일에서 학생으로 살던 시절에 루체른과 인터라켄, 취리히, 융프라우, 라인폭포에 다녀왔고 20년 전에는 취리히를 거쳐 생모리츠와 실스마리아에 다녀온 적이 있다. 그때의 스위스 산들은 온통 눈으로 장관을 이루었었다. 만년설을 머리에 이고 눈이 부시도록 하얗게 보석처럼 빛나던 그때의 알프스 연봉들과 거무튀튀한 바위들이 맨살을 드러낸 지금의 알프스 산들은 절대로 같은 산들일 수가 없다. 어떻게 그 장엄하고, 그 멋진 위용으로 우리 인간을 숙연하게 만들던 산들이 이렇게 변한 것일까? “그 많던 빙하들은 어디로 갔을까?” 우리는 이 질문을 누구에게 해야 하는가?
40년전, 20년 전의 기억을 안고 비행기에 올라탔던 나의 부풀었던 기대는 라인강의 기원이 되는 라인폭포를 보았을 때 반가움에 떨려 왔었다. 바위에 부딪쳐 하얀 거품을 내며 부서져 자못 사납게 흩어져 내리는 폭포의 물결은 옛날 그대로인 듯 했고 어느때나 항상 그곳에 존재해 왔고 말없이 다시 나를 맞아주는 것 같았다. 갑자기 후두둑 세차게 내리는 비 때문에 시야가 흐려져 여유롭게 보지는 못했지만, 찍고 찍고 찍어야하는 패키지 여행의 일정이 나의 상념에 충분한 시간을 내주지는 못했지만 다시 만난 친구와 아쉽게 또 헤어지는 마음으로 그곳을 떠나와야만 했다.
그 다음에 간 <슈타인 암 라인> 마을은 작으면서도 예쁘고 고풍스런 분위기를 그대로 간직한, 아기자기하면서도 조용한 마을이었다. 건물 벽들에 그려진 프레스코화가 마을의 오래된 역사를 조용히 전해주고 있었다. 작은 마을에 드문드문 있는 기념품 가게에서 뭔가 건져보려고 했지만 내가 여행지에서 사곤 했던, 냉장고에 붙이는 마그네틱 하나도 10프랑이 넘는 액수여서 그 가격에 마그네틱 하나는 왠지 비싼 느낌이 팍 오면서 포기하고 말았다. 작은 레스토랑, 카페, 베이커리 등에 앉아서 한가하게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면 좋으련만 그건 어차피 불가능한 일이었다.
<슈타인 암 라인> 마을을 떠나 이번에는 취리히로 갔다. 그런데 실로 오랜만에 도착한 취리히에서는 내가 예전에 갔던 거리가 아닌 전혀 다른 장소만 방문해서 별다른 감회가 없다. 갈곳을 내맘대로 정하는 자유여행이 아니기 때문에 보여주는 곳만 봐야하는 여행에 적응을 해야만 했다. 단지 취리히가 이번에는 대도시의 느낌만 강하게 풍길 뿐 정감있는 모습으로 다가오지 않아서 유감이었다. 내가 예전에 느꼈던 취리히는 도시를 감싸는 거대한 호수의 물결이 찰랑찰랑하며 사람들에게 말을 거는 듯한 낭만적 분위기가 감싸고 돌았는데 말이다. 옛날의 취리히는 대도시와 커다란 호수가 멋지게 앙상블을 이루고 있어서 무엇 하나 아쉬움 없이 질 높은 생활이 가능한 장소로 보여서 나는 한숨을 쉬며 부러움과 질투를 느꼈더랬다. 40년 전의 한국의 경제상황은 지금과는 엄청난 차이가 나서 잘 사는 나라인 스위스에서 보이는 것 모두에 부러움이 일곤 했었다. 니더도르프(Niederdorf)거리 곳곳에 보였던 교회와 성당의 커다란 뾰족 첨탑들이 과거의 분위기와 좀 닮아 있긴 했는데 대성당의 한쪽 첨탑이 수리 중이어서 들어가 보진 않았다.
루체른에 다달았을 때는 조금전과는 달리 비행기에서 품었던 기대에 약간씩 금이 가기 시작했다. 루체른의 모든 것은 여전히 아름다웠지만 어딘지 모르게 도시화되고 번잡해진 풍경이 다소 눈에 거슬렸다. 내 마음 속에 그리움으로 남아있던 카펠교(Kapellbrücke)는 로이스 강을 가로지르면서 다리 양옆에 꽃송이들을 늘어뜨리며 여전히 예쁜 모습이었지만 그 다리를 둘러싼 주변의 풍경은 예전처럼 고즈넉하고 아늑하고 한번쯤 살아보고 싶던, 꿈속에도 나타날 법한 그 모습이 아니었다. 유람선을 타고<네개의숲을품은호수>(Vierwaldstätter See)를 둘러보았을 때도 너무나 많이 변해버린 주변 풍경으로 인해 내 마음에는 뭉게구름처럼 아쉬움이 피어올랐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지만, 살아 오는동안 오랜만에 만난 풍경 앞에서 입을 벌리고 와우 이렇게 변하다니, 알아볼 수가 없네, 하며 놀란 적이 숱하게 많았다고 하지만 루체른의 달라진 모습은 못내 아쉬워서 속이 아플 정도였다. 호수를 둘러싼 마을 속에 보이는 현대적 건물들의 모습과 호텔처럼 보이는 큰 건물들, 좁은 면적 속에 빽빽하게 서 있는 건물들의 모습은 그 옛날에 한가롭게 넓은 푸른 초원 속에 하나 둘씩 자리했던 스위스 전통 가옥과 이따금씩 보이던 작은 교회들과 단정하고 예쁜 서양식 2층집들이 있던 그림같던 모습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눈을 감으면 떠오르던 내 기억속의 풍경, 그 치명적으로 아름다왔던 풍경들은 어디로 간 것일까? 그것들이 결국 이렇게 변해 버리다니! 세월이 흘렀고,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오고. 모든 것은 상황에 따라 변한다는 사실, 나는 달라진 현실을 인정하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체른은 호수의 파란 물과 세월의 더께가 앉은 목조다리의 정겨운 모습과 골목골목의 예쁜 집들과 더불어 또 다른 아름다움을 연출하고 있었다. 루체른이 처음인 내 친구 둘은 연신 루체른이 예쁘다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나도 그말에 기꺼이 동의하는 바다. 호수를 낀 도시들은 예쁠 수밖에 없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더더군다나 알프스의 눈 녹은 물들이 모여서 이루어진, 산으로 둘러싸인 스위스의 호수옆 도시들이야 말해 무엇하랴. 그중에서도 예쁘기로 소문난 루체른임에야!!
취리히에서의 1박을 위해 호텔에 체크인하고 우리 여행팀만을 위해 차려진 저녁 밥상을 먹었는데 그닥 훌륭하진 않았다. 구색만 갖추려고 노력한, 부분부분에서 인색함이 엿보인 그럭저럭 먹을만한 저녁이었다. 방울토마토 샐러드가 중간에 떨어져서 큰 토마토 샐러드로 바뀌고 빵은 있는데 그옆에 있어야할 올리브유나 버터가 없어서 요청한 뒤에나 겨우 받아먹을 수 있었다. 스위스는 이런 곳인가? 혹시나 아시아의 한 나라, 코리아는 이렇게 대접해도 되는 나라라고 생각한 것인가? 생각이 많아졌다. 메인메뉴로 나온 생선은 먹을만 했지만 사이드메뉴(바이라게)였던 시금치는 곤죽이 된 채여서 그것이 시금치인지조차 알아보기 힘든 형태였다. 맛도 그닥이었다. 우리 일행 셋은 정식 트리플 룸이 아닌, 트윈 룸에 엑스트라 베드가 놓여진 방을 배정받았는데 이게 또 가관이었다. 트윈 룸에 침대 하나가 더 들어왔으니 좁은 건 말할 필요조차 없고 수건, 컵, 양치컵도 하나씩이 부족했고 덮고 잘 이불도 제대로 된 이불이 아니라 홑껍데기 시트에 불과했으니 고객응대서비스가 모자라도 한참 모자른 미달수준이었다. 가이드와 프런트에 항의를 한 뒤에야 모든 사정이 바로잡아졌지만 이미 기분은 나빠질대로 나빠진 뒤였다. 규모가 웬만한 호텔에 원래부터3인을 위해 만들어놓은 트리플 룸이 없을 리 없건만 고객의 편의는 나몰라라 하고 자기들 수익구조에만 열을 올리는 것 같아서 이 부분은 뒤에 여행사에 정식으로 항의를 해야만 할 것 같았다. 여행사가 모객에만 힘을 쏟을 뿐, 그에 맞는 적절한 편의를 제공하는 데 관심없어 하는 듯한 비신사적이고 비도의적인 행태에 철저한 수정이 가해져야 할 것 같았다.
그 다음 날엔 인터라켄을 향해 출발했다. 인터라켄으로 향하는 길은 나를 또 다시 놀라게 만들었다. 인터라켄을 가려면 예전엔(40년전엔) 구불구불한 산길을 몇 시간에 걸쳐 돌아가야만 했었다. 산비탈을 끼고 까마득한 절벽을 내려다보며 마주오는 차를 가까스로 피해 가면서 아슬아슬한 곡예운전을 한참이나 해야만 겨우 도달했던 동네인데 이번에 간 인터라켄은 예전의 그곳이 맞나 싶을 정도로 새로 깔린 고속도로를 통해 힘 안들이고 쉽게 도달했다. 옛날에 본, 제임스 본드가 나오는 007 시리즈 영화에도 그런 꼬불꼬불하고 위험천만한 길들을 운전하던 장면이 있어서 40년 전에 인터라켄을 향해 운전해 가면서 그 장면을 생각해내고 빙긋이 웃었던 기억이 난다. 도시 모양도 완전히 변한 모습이었다. 처음으로 가는 사람이라면 지금의 도시 모양이 훤하고 세련되고 예뻐서 만족스러울 테지만 나에게는 왠지 낯설게만 느껴졌다. 산골짜기에 퍼져있던 옛날의 그 도시는 완전히 사라지고 없었다. 스위스의 마을 풍경은 이제는 크리스마스 카드에서만 볼 수 있는 과거의 일이 돼버린 것 같았다. 제국주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스위스는 약소국이었지, 한번도 제국이었던 적이 없는데도), 부티 나는 호텔이 도시 한가운데에 떡 버티고 있었고 그 옆의 우리 호텔도 오로지 현대적 느낌만 풍길 뿐이었고 길 양옆에 늘어선 가게들에서도 대부분 지어진지 얼마 안되는 풋내가 났다. 과거의 소박하고 아기자기하고 고향마을 같고 스위스 하면 떠오르던 전통적인 느낌은 아예 없었다. 이곳이 이렇게 변하다니!! 나는 그저 어이상실한 사람처럼 도시의 변화된 모양을 쳐다보기만 할 뿐인 수동적인 관찰자였다. 어쩌다 보니 이번의 스위스 여행은 과거의 내 기억과 현재의 모습 사이의 비교 여행이 된 것인가? 이런 마음은 이번 여행을 흡족하게 즐기는 데 방해 요인만 될 터였다. 나는 좀 씁쓸한 기분을 안고서 과거의 기억을 털어내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했다.
어찌됐든 우리 방에서는 전면의 산들이 막힘없이 바라보여서 조망이 매우 좋았는데 앞에 있는 산들 사이로 융프라우의 눈덮힌 봉우리가 빼꼼히 보여서 내일의 등정에 기대를 갖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미 실망했던 것처럼 예전의 그 풍부했던 눈들은 온데간데 없고 정상 부근에만 간신히 눈이 얹혀져 있는 것을 보니 누구 탓을 해야할지 모르는 안타까움과 아릿한 슬픔 같은 것이 찌르르 전해져 왔다. 기후변화 문제는 이제는 더 이상 방관자의 입장에서 왈가왈부하면 안된다는 심각한 경고를 하고 있는 지경에까지 이른 것 같다. 이렇게 비행기를 타고 다니는 것 자체가 오버투어리즘에 한발 담그고 있는 것인데 도대체 누구를 탓한단 말인가? 나 자신부터 자숙하고 책임감을 느끼고 상징적으로 손발을 묶는 퍼포먼스라도 해야 마땅할 듯한 죄책감을 느꼈다. 이제 앞으로는 먼 나라까지 날라다니는, 가고싶은 곳이라면 어디든지 마음대로 가던 여행은 지양해야 할 듯하다. 창문 밖으로는 유럽에서 이미 썸머타임을 적용하고 있는 까닭이어선지 저녁 9시까지도 산 봉우리에 노란 햇빛이 비쳐드는 것을 보고 언제 깜깜한 어둠이 찾아오나 신기한 마음으로 기다려졌다.
가이드가 아침부터 채근을 하는 바람에 조식도 일찍 먹고 차비를 해서 융프라우에 가기 전의 중간역인 그륀덴발트로 가는 기차에 8시에 올라탈 수 있었다. 그륀덴밭트에 내려서는 40년 전과 달리 케이블카를 탔는데 케이블카에 앉아서 내려다보는 산악지형의 풍경이 아주 그림 같았다. 예전 같으면 눈밭에 있어야할 집들과 계곡들이 초록색 초원을 끼고 군데군데 퍼져 있었다. 집들과 여기저기에 작은 골짜기를 타고 내려가는 계곡물과 능선 위의 소떼와 양떼들의 모습이 아름다웠다. 그것은 또 색다른 풍경이었지만 눈이 없는 풍경은 여전히 아쉬웠다. 케이블카에서 다시 톱니열차를 바꿔타고 드디어 융프라우 요흐(Jungfraujoch)에 이르렀을 때는 역시나 예전처럼 반짝반짝 빛나는 눈밭이 펼쳐져 있어서 반갑고 기뻤다. 그러나 기억과는 달리 걸어갈 수 있는 지역이 너무 제한적이어서 어리둥절해졌다. 역시나 많이 달라진 모습이었다. 옛날에는 정상 부근까지 얼마든지 오랫동안 돌아다닐 수 있었는데 말이다. 융프라우가 얼마나 더 오래 명성을 유지할 수 있을지 시간문제가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지구인 모두에게 지극히 슬픈 문제가 아닐까. 가슴이 쓰라려왔다.
융프라우의 얼음궁전을 통과해 지나가다가 한쪽 벽에 미디어 아트 형식으로 전시된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Kaspar David Friedrich)의 안개바다위의 방랑자(Der Wanderer über dem Nebelmeer)를 보고 놀라움과 반가움을 동시에 느끼며 걸음을 멈춰섰다. 인간은 웅대한 자연 앞에서 불안을 느끼며 고뇌하며 방랑하는 작은 개체일 뿐이라는 깨달음을 주는 것 같았다. 이 그림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교향시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Also sprach Zaratustra) 레코드 판의 표지에도 실린 바가 있다. 여기에서 마주하고 있는 바다 위에 떠있는 안개의 모습이 눈으로 뒤덮인 과거의 융프라우 주변 산들과 비슷한 느낌을 주는 것 같아서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나에게 가장 인상적이었던 도시는 체르마트와 몽트뢰였다. 그 두 도시는 나의 예전 스위스 방문에서 빠진 도시였기 때문에 내가 이번에 처음으로 방문한 도시여서 그런지는 모르겠다. 체르마트에서 더욱 좋았던 것은 세 명이 자기에 꽤 넉넉하게 분리된 룸이 하나 더 있어서 처음으로 오랜만에 공간적으로 쾌적함을 느낄 수 있어서 좋았고 도시 분위기도 아늑하고 친근감이 들어서 더 좋았던 것 같다. 도시라고 하기에는 매우 작은, 마을이라고 부르면 딱 맞을 크기에 사람들의 발걸음이 빈번한 큰 도로를 사이에 두고 양쪽으로 늘어선 가게와 식당들, 호텔들이 과거의 스위스와 크게 다르지 않은 전통적인 분위기와 느낌을 주었다. 우리들은 자유식으로 점심을 사 먹은 후에 여행사에서 선택관광으로 내놓은 고르너그라트 트래킹을 가지 않기로 해서 오후 일정을 자유롭게 길게 즐길 수 있었다. 골목에 줄지어선 가게들을 기웃거리며 작은 성당에도 들어가 보고 뮤지엄도 들르고 무슨 기념품을 사면 가장 잘했다는 소리를 들을까 고심하면서 이곳저곳 가게에도 들어갔지만 딱히 눈에 띄는 것이 없어서 애초부터 사려고 작정했던 물건외에는 쇼핑을 하지 못했다. 친구 하나는 남편의 관절염에 좋다는 젤 연고를 사고 나는 옛날부터 쓰던 버터통의 덮개가 금이 가서 유럽에 오면 꼭 사리라 마음 먹었던 대로 스테인레스 스틸로 된 버터통(Butterdose)을 하나 샀다. 치즈칼도 하나 살까말까 망설였으나 너무 날카로운 치즈칼의 모습에 약간의 공포심이 생겨 그만두고 말았다. 메인거리라고 해봤자 아무리 걸어다녀도 두 세번 왕복하는 데 한 시간밖에 안 걸리는 소도시의 제일 끝에 있는 언덕길을 오르자 저 멀리에 마터호른(Matterhorn)의 웅장한 자태가 비교적 잘 눈에 들어와서 우리는 감격하며 그 앞에서 여러 장의 사진을 찍고 또 찍으며 즐거워했다. 거리 가운데쯤 되는 곳에서는 스위스 전통 복장을 입은 소그룹으로 조직된 스위스호른 음악대가 연주를 하기도 해서 듣고나서 힘껏 박수를 쳐주기도 하면서 오후 시간을 원없이 즐겼다. 이곳에서라면 저녁에도 카페의 야외 의자에 앉아 간단하게 술 한잔 하며 거리에 오가는 사람들 구경도 하면 꽤 재미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어찌된 일인지 방에 올라가서 샤워를 하고나자 그 생각은 완전히 잊어버리고 자느라 바빴다.
그 다음 날엔 레만호에 있는 시온성을 보고 나서 몽트뢰로 갔다. 몽트뢰는 영국의 전설적인 락그룹인 ‘퀸’의 보컬 리더였던 프레디 머큐리가 말년에 살았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우리 일행은 호숫가에 있는 그의 동상이 있는 곳으로 가서 전부 오른손을 번쩍 치켜든 머큐리의 유명한 포즈를 따라 하며 사진을 열심히 찍었다. 애나 어른이나 이럴 때는 모두 동심으로 돌아가는 것 같았다. 몽트뢰에서는 그 시점에 재즈 페스티벌을 하고 있어서 안 그래도 좁은 도로에 차들이 넘쳐나서 통행이 불편했다. 자유여행으로 왔다면 하루 저녁쯤은 재즈 페스티벌에 가서 함께 어울렸어도 좋지 않았을까 생각해 봤다.. 몽트뢰라는 지명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쪽은 프랑스와 가깝고 문화적으로도 프랑스의 영향이 강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그런지 도시 모양이 더 경쾌하고 건물 모양도 더 장식적으로 보이는 것 같았고 휴양도시의 여유로움이 곳곳에서 느껴졌다. 호수의 푸른 물결이 바로 눈앞에서 넘실거리는 이런 곳에서 한달 살기를 한다면 어떨까? 생각만해도 짜릿하고 너무 좋을 것 같았지만 그것은 꿈으로 끝나버리겠지… 한낮의 태양은 레만호에 노랗게 떨어져서 호수의 표면 위에 눈부신 윤슬을 그려놓고 있었고 하얗게 부풀은 돛을 펄럭이며 날씬하게 생긴 요트가 물결을 헤치며 나아가고 있었고 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호수 위로는 시원한 바람이 스쳐 불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