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과 불행의 교집합도 사실은 행복.
'잘 지내니?'
라는 안부인사를 받았을 때, 나는 어떤 대답을 해야 했을까?
경우의 수 측면에서 이야기하면,
이런 대답 밖에는 없을 것이다.
'응, 잘 지내. 요즘 너무 행복해.'
'아니, 잘 못 지내. 인생에 불만이 가득하다.'
어떡하면 좋지? 둘 다 아닌데.
오랜만의 연락에 거짓말하기는 싫은데, 이 오묘한 감정을 뭐라고 표현해야 하지?
보통 이렇게 사는 것을 잘 지낸다고 표현하나? 또 불행하다고 말하기는 어려운 것 같은데.
결국 다른 말을 했다.
곧 부서를 옮길 것 같다고, 내 방에도 애기가 한 명 들어왔다며, 듣기엔 어떨지 모르나 내게는 '동문서답'에 해당하는 답장을 보냈다.
돌이켜보면, 인생이란 무엇인가와 같은 고민은 자주 하지 않았어도,
'행복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자주 고민했던 나다.
고등학교 윤리시간,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인생의 진리이자 목표도 '행복'이라는 말을 들으면서부터 더욱 그랬는지도 모른다.
어렸을 적 나는 깡통차기라는 놀이를 좋아했다.
맞벌이를 하시던 부모님은, 벌써 공부같은거 잘할 필요 없다고 그냥 건강하게만 자라라고 하셨다. 위험한 일을 하거나 함부로 돌아다니지만 말고, 학교만 잘 가면 된다고. 그 다음은 그냥 니 마음대로라고.
그렇게 했다.
시청률 집계기보다 오랜시간 티비를 보고(당시 나는 류시원과 결혼하는 것이 꿈이었다), 엄마아빠가 남겨놓고 간 돈으로 육개장이나 제육김치볶음밥을 시켜먹으면서 놀기만 했다.
그런 나에게, 아파트 창문 밖의 소리는 일종의 대단한 무언가였다.
창문 밖 모르는 애들이 매일을 왁자지껄 큰 소리를 내며 떠들어대곤 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매번 웃고 있었고, 굴러가는 깡통소리는 바닥에 긁히면서 엄청난 마찰음을 냈다. 자존심에 부러 창문 밖을 쳐다보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도 도대체 저들이 왜 저렇게 웃을 수 있는 것인지 한참을 궁금해했다.
그 소리에 결국 밖으로 나가 본 것이 시작이었다.
내가 목격한 것은 아파트 주차장에서 깡통을 차는 애들이었다. 누군가 힘차게 깡통을 차면, 나머지는 소리를 지르면서 달려가곤 했었는데, 그 모습이 얼마나 즐거워 보이던지 어린 시절의 나로서는 그 무리에 끼지 않고는 견딜수가 없었다.
달려가 나도 깡통을 차게 해달라고, 나도 소리를 지르고 싶다고 부탁하던 때에 손에 맺히던 땀을 아직도 기억한다.
그렇다. 내 인생 최초의 구애행위가 바로 이 때 이루어졌다.
나는 그 친구들과 매일 깡통을 찼고, 소리를 질렀으며, 깡통에 지겨워진 친구들이 학교 운동장에서 축구공을 찰 때까지도 매일을 함께 했다.
깡통말고 또 억수로 행복한 기억이 어디 있나.
역시 그 다음을 꼽으라면 장범준과 함께 한 새내기 대학생 시절을 빼놓을 수 없다.
장범준이 1집을 내고 온 페이스북이 장범준 노래에 대한 찬양으로 물들던 시절의 삶은 그야말로 행복의 절정기였다.
집에 돌아가면 온갖 고민을 들어주는 룸메이트 언니가 있고, 무조건적인 사랑을 주는 남자친구도 있으며, 학교 동기들과 사이도 좋고, 학점은 나쁘지만 공부를 더 이상 잘할 필요도 없는데 엄마는 달마다 몇 십만원 씩 용돈을 줬다.
그래서인지 그 때를 추억하면, 과거를 미화해서가 아니라 힘들었다거나 큰 고민이 있었던 순간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심지어 학교수업도 아프다며 출석조차 하지 않았으니, 삶에 절망적 고민이라는 곰팡이가 필 일이 있기나 했겠나.
근데 왜지?
왜 하필 이 두 가지 순간이지?
축구가 눈물날 만큼 재미있었던 것이나 좋은 대학교만 가면 인생만사 해결이라는 환상에 도취되어 있었다는 사실은 차치하고, 삶에서 행복이라는 단어와 가장 어울리는 때를 떠올리라고 하면 단박에 저 시절을 떠올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영상물을 보는 것도 축구를 하는 것만큼이나 재미가 있고(더 이상 축구를 하지 않는 지금도 영상물에 집착을 한다), 같은 학교 대학원에 합격하기도 했었는데 왜 그 때는 그렇게까지 행복하지 않았던 거지?
오랜 고민 끝,
나는 이런 결론을 내렸다.
'저 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시절 나는 매일 아침 9시 등교를 하고, 오후 3시 30분쯤 귀교했다. 대문을 열고 방에 신발주머니만 던지고 나서는, 매일 기계처럼 깡통을 차거나 축구를 했다.
엄마 아빠한테 혼날 용기가 생기는 날이면, 집에 들어가지도 않고 온 아파트 단지를 돌아다니며 숨바꼭질을 하기도 했으나, 대부분은 집에 돌아와 저녁을 먹고 정해진 시간에 꿈나라로 갔다.
신기하게도, 인생은 망하지 않았다.
바보상자라 불리던 티비를 그렇게나 오랜 시간 보았는데도 말이다.
대학교도 마찬가지다.
한국에 살면서도 무려 뉴욕의 시차와 함께하는 삶을 살던 대학교 1학년, 나는 수업에 가거나 안가거나 하면서 매일 남자친구를 만났다(물론 p는 수업에 갔다).
엄마가 준 돈으로 중국집 볶음밥이나 해물쟁반짜장 같은 걸 시켜먹고는, 해가 지면 밖으로 나와 서울 구경을 했다.
어쩔 땐 친구들과 학교 앞 술집에서 칵테일을 마시고, 때로는 p와 그 유명한 '명동'이나 '신사동'을 돌아다녔다.
역시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세상에 존재를 하든 안하는 상관도 없는 사람처럼 살아서 그런지, 세상도 나를 괴롭히지 않았나보다.
그렇다면 불행한 때는 어떤가?
내 인생의 불행은 딱 한 가지 단어로 요약된다.
'갈망'.
나는 무언가를 갈망하게 될 때면, 그림자처럼 따라오는 불행을 등뒤로 업고 다니곤 했다.
'전교 5등안에 들고 싶다'
'특별반 독서실 자리를 가지고 싶다'
'수시전형으로 어느 대에 붙고 싶다'
'대학원 입학시험 150점 맞고 싶다'
'학점 4.3 맞고, 어느 회사에 입사하고 싶다'
위에 열거한 성과를 간절히 갈망하고 있었을 때를 곧 나의 불행기라고도 말할 수 있는데,
그 때 내 고민을 들어주던 친구들은 말을 안해서 그렇지 아마 속으로는 내가 육갑을 떨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쟤 왜 저러는지 모르겠다고, 그냥 대충살면 되는데 하늘 무너진 것 같이 군다고.
그때는 그랬다. 너무 목이 마른데, 수도꼭지는 아무리 세게 눌러도 답이 없었다.
정말이지 타는 목마름이었다.
그럼 지금은 어떻지?
나는 행복한거야 불행한거야?
요즘의 나는 행복하지도, 그렇다고 불행하지도 않다.
아침에 일어나 '아! 오늘이 왔어! 새로운 오늘! 또다시 눈을 뜨다니 이것이야말로 신의 축복!'
인 것은 아니고,
'인생 망했다. 눈 감아도 내일이 안왔으면 좋겠다.'도 마찬가지로 아니다.
아침에 일어나 출근을 하고, 일주일에 두어번 운동을 간다.
회사 동기들과 마음이 잘 맞아 많은 위안을 얻기도 하면서, 집에 돌아오면 대충 유튜브를 보거나 일하러 회사로 돌아가곤 한다.
주말에는 p랑 논다. 그게 다다.
내 인생 뭐지? 아무 일도 없어? 아무것도 없어? 너무 심심한데?
아.
그렇구나.
지금이구나.
요즈음의 나는 무엇을 해도,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 역을 들리는, 인생의 기차를 탄 것만 같다.
아침에 출근만 하면, 집으로 돌아올 수 있다.
전교 5등이나 학점 4.3을 받을 필요도 없이, 정해진 때 월급도 입금된다.
누구도 무례하게 대하고 싶지 않고, 누구도 내 인생에 커다란 영향을 끼치게 하고 싶지 않아 쉽게 그들이 내 정신을 좀먹는 곰팡이가 되도록 내버려두지도 않는다.
불행이 워낙에 요란하길래, 행복도 야단법석이어야 할 줄 알았는데.
행복은 오히려 고요하고, 불행만 요란한가보다.
이럴수가. 모르고 있었다니.
장기하는 탁월한 철학가가 맞다.
'별일 없이 산다'라는 노래에서, '별일 없이 산다. 별 다른 걱정 없다.'가 '나 행복하게 잘 살고 있다'는 뜻으로 쓴 것이라 했을 때, 이해할 수 없었는데 말이다.
별일 없이 사는 고요한 인생이 사실은 행복이었나보다.
다음에 누군가 안부를 묻는다면, 이렇게 대답해야지.
'어, 나 별일 없이 살아. 별 다른 걱정 없어.'
그리고 이 글은 언젠가 갈망의 숲으로 다시 걸어들어갈 나에게 쓰는 편지이기도 하다.
'야 요란법석하게 생각하지마.
결국 별일 아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