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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잡담 Dec 02. 2023

서원

16호_건축과 시간_특별잡담

인류는 교육을 통해 정치, 문화, 경제 등 다양한 부분을 발전시켜왔다. 과거 한반도에도 교육을 위한 다양한 형태의 교육기관이 존재했다. 고구려의 경당, 통일신라의 국학, 고려의 국자감, 향교 조선의 서원, 성균관 등 설립의 목적은 다르지만, 인재를 양성하기 위한 교육기관이었다. 이 글에서는 향촌을 중심으로 생긴 사립 교육기관인 서원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서원의 설립

서원은 조선 중기 이후 학문연구와 선현제향을 위하여 사림에 의해 설립된 교육기관이다. 조선 초기부터 사림은 2~3개 씨족마을의 사림이 향촌사회를 구성하며 자신들의 세력을 구축했다. 사림은 지방에서 영향력을 행사하였지만 반대세력인 훈구파는 중앙 집권 체제를 지향하였다. 사림은 향권을 주도하기 위해 유향소와 사마소를 세우는 등 노력을 하였지만, 훈구세력과 연산군의 사화로 인하여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그렇지만 이 과정에서 사림은 조광조를 중심으로 정계에 재진출함과 동시에 교육과 교화를 앞세워 향촌활동을 합리화함으로 서원 성립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이후 사림은 중앙으로 진출하여 향촌을 교화, 선도하기 위한 자치규약인 여씨향약과 미신타파를 시행하는 등 도학사상만을 강조하며 정치현실을 무시하는 급진정책을 시행했다. 이는 훈구세력과 중종의 배타적인 태도를 불러일으켰고 결국 기묘사화가 일어나 세력이 약해졌다. 이후 1542년 풍기군수 주세붕은 백운동에 안향의 위패를 모시는 문성공묘를 세워 배향하다 1543년 백운동서원을 최초로 건립한다. 1550년 명종은 풍기군수 이황의 요청으로 백운동서원에 편액·서적·토지·노비 등을 하사받아 왕으로 부터 권위를 인정받는 사액서원의 효시가 되었다. 



서원의 역할

서원은 사림의 정치적인 도구로 활용되기도 하였지만, 힘이 약해진 이후에는 정치적 반대세력으로부터 피할 수 있는 도피처가 되었다. 교육의 목적으로 세워진 서원까지는 건드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사림은 서원에 더욱 집중하였고 향촌의 유생들을 체계적으로 가르치며 교육기관의 역할을 하였다. 서원에서는 주로 경학을 중심으로 교육을 하면서 자신들의 세력을 키워나갔다.


서원의 또 다른 역할은 제향의식을 하는 것이었다. 사림들은 훗날 학문적인 측면에서 성리학의 내용을 해석하는 데 이견을 보였고, 결국 분열된다. 그러면서 결국 지방마다 모시는 유학자가 달라졌는데 예를 들자면 이황은 경상도, 송시열은 충청도, 이이와 주자는 황해도에서 많이 배향되었다.



서원의 배치  


사진 1 - 병산서원에서 보이는 낙동강, 사진 2 - 옥산서원 앞의 폭포


서원은 산을 등지고 물을 마주하고 있는 배산임수의 입지에 있는 것이 특징인데 이는 음양오행과 풍수·도참사상에 의거한 것이다. 따라서 서원은 건물의 높낮이를 다르게 하고 담장의 높이를 낮게 설계하여 자연과 조화되며 내부에는 계절을 느낄 수 있는 조경, 외부에는 선비정신을 상징하는 소나무와 대나무를 심었다.


서원의 배치는 보통 동쪽과 서쪽을 대칭으로 건물을 배치하였고 남쪽에서는 전학후묘 양식을 적용하여 앞쪽은 교육공간을, 뒤쪽은 제향공간을 배치하였다. 또한 중심축을 맞추어 정문, 누각, 강당, 내삼문, 사당의 순서로 배치되었다. 



서원의 건물

 앞서 말했듯 서원은 제향공간과 교육공간으로 나뉜다. 모든 건물은 화려한 장식 대신 성리학의 선비정신을 나타내는 간소한 양식으로 꾸몄고 무늬를 그려 장식하는 단청 또한 사당에만 사용하였다. 각 공간의 건물은 어떤 역할을 하였는지 살펴보자.


- 제향공간 

임고서원 ,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는 사당

* 사당 - 사당은 선현의 위패를 모시는 건물이다. 사당은 높은 곳에 있거나 기단을 설치하여 교육기관보다 높은 위상을 가졌다. 또한 별도로 담장을 두르고 삼문을 두어 출입을 제한하였다. 서원의 선현은 서원을 이어받은 유학자들에 의해 정해졌다. 보통 공자, 사성(四聖), 십철(十哲), 18현, 송대의 6현 등 자신들이 추종하는 유학자나 서원을 세운 유학자의 위패를 모셨는데 이들이 모시는 유학자들은 서원의 정체성을 나타내었기 때문에 그들을 모시는 사당은 매우 중요한 공간이었다. 


* 전사청 - 전사청은 제사를 준비하는 건물로 제사 용구와 음식을 보관하는 건물로 사용되었다.


- 교육공간   

옥산서원의 강당
옥산서원의 동재와 서재


* 강당 - 강당은 유생들이 경학을 공부하는 곳으로 원장의 방과 대청으로 이루어진다. 대청에서는 경전을 공부하는 특별수업인 강회와 서원운영·정치·사회 등의 문제를 논의하는 당회가 정기적으로 열렸다. 


* 동·서재 - 유생들의 숙소와 학습장소로 사용된 건물이다. 강당을 중심으로 좌측과 우측에 배치되어 강당과 함께 ‘ㄷ’ 자 모양을 만든다. 



- 기타공간


옥산서원의 장판각

* 고직사 - 고직사는 관리인이 거주하며 학자들과 유생들이 필요한 것을 공급하고 제사를 할 때는 제사 음식을 준비하는 등 여러 가지 일을 하는 건물이다. 교육과 제향 공간 모두 도와야 했기 때문에 양쪽을 보조할 수 있도록 효율적으로 배치를 했다. 


* 장판각 - 장판각은 서적을 보관하고 출판하는 곳으로 장경각·장서각으로도 불린다. 사액서원의 경우 왕이 서적을 하사하거나 관찰사·지방관에서 지급되었다. 하지만 임진왜란 이후 서적의 보급이 줄어들며 서원에서 자체적으로 서적을 간행했다. 서원에서 출판된 책은 서원에서 제향하는 인물과 관련된 문집류나 일생을 담은 전기책이 대부분이었다. 


* 누각 - 누각은 유생들과 학자들이 풍광을 보며 시회를 가지며 마음을 다스리던 공간이다. 누각은 17세기 이후 생겨나기 시작했으며 단아하고 소박한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다. 또한 다른 건물과 다르게 벽체가 없이 구조부재로만 이루어진 것이 특징이고 주변 경관을 끌어들여 전통적인 조경 기법을 잘 보여준다. 자연경관이 좋은 입지를 가진 서원에서도 가장 매력적인 공간이라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살펴보았던 것처럼 서원은 자연과 성리학을 반영한 위계질서에 따라 체계적인 배치를 이루고 있다. 하지만 모든 서원이 똑같은 배치를 이루는 것은 아니다. 서원은 시기와 조건에 따라 건물의 배치가 다르기도 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배치 양식이 정형화되었다. 지금부터는 사액서원이자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3개의 서원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자. 


다양한 특징의 아름다운 서원


- 소수서원

 소수서원은 1541년에 세워진 한국 최초의 서원이다. 소수서원을 세운 풍기군수 주세붕은 소수서원을 세울 때 ‘백운동’이라는 이름으로 설립하였다. 이후 1548년 풍기군수로 부임한 퇴계이황에 의해 사액서원이 되면서 소수서원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소수서원의 배치도


 소수서원은 한국 최초의 서원인 만큼건물의 배치가 정형화되어있지 않고 자유롭다. 강당과 동재, 서재가 ㄷ자를 이루고 있는 정형화된 서원과는 달리 정문을 들어가면 남북으로 길게 세워진 강당이 있다. 뒤편에는 원장과 교수의 집무실 겸 숙소인 직방재와 일신재가 있으며 오른쪽 뒤편에는 동재와 서재인 학구재와 지락재가 있다. 정형화된 공간에서 교육공간 뒤에 위치하게 되는 사당과는 다르게 소수서원의 사당은 강당의 서북쪽에 있다. 그 뒤로는 전사청, 장서각, 영정각이 위치하여 제향공간을 이루고 있다.


- 병산서원

 병산서원은 고려 말부터 이어져 온 풍산 류 씨 가문의 서당인 풍악 서당이 전신이다. 1572년 류성룡 선생은 풍산에서 병산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후 임진왜란 때 불태워졌지만, 정경세 공이 1614년에 유림과 함께 뜻을 모아 사당을 창건하면서 병산서원으로 지어졌다.   


사진 9 - 병산서원의 입구,  사진 10 - 병산서원의 만대루,   사진 11 - 병산서원의 배치도


 병산서원의 배치는 조선 중기의 전형적인 서원 배치이다. 서원의 앞에는 낙동강이 흐르고 있으며 남향을 향하여 자리를 잡고 있다. 병산서원의 건물은 지형을 통해 자연스럽게 위계를 형성하고 있다. 정문과 누각을 지나 교육공간인 동재와 서재, 강당이 있으며 그 뒤로는 제향공간인 사당이 있다. 사당은 강당과 일자로 배치되어 있지 않고 강당의 동북쪽에 있다. 고직사는 동쪽에 교육공간, 제향공간과 분리되어 있다. 전사청, 만대루(누각), 복례문(정문)은 기존 건물이었던 교육공간의 건물과 장판각, 고직사가 세워진 1614년 이후 세워졌으며 그러한 이유로 고직사, 사당의 위치가 조금씩 다르다.


 병산서원의 여러 특징 중 하나는 건물들이 서로 연결되어 자연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특히 병산서원의 누각인 만대루는 정문을 지날 때부터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큰 벽을 연상시키는 만대루는 교육 공간이 폐쇄되는 느낌을 주어 더욱 강조시킨다. 하지만 강당에서 만대루를 보았을 때는 시선을 사로잡는 것이 아니라 건물의 단아함과 비움을 통해 자연을 내부로 끌어들여 더욱 돋보이게 하는 역할을 한다. 


- 옥산서원  


사진 12 - 옥산서원의 입구,   사진 13 - 옥산서원의 무변루,   사진 14 - 옥산서원의 배치도


 옥산서원은 회계 이언적 선생을 기리기 위해 설립된 곳이다. 1572년 경주부윤 이제민이 세웠으며 1573년에 사액서원이 되면서 옥산서원이라 불리게 되었다. 옥산서원은 “용추에서 떨어지는 물로 마음을 씻고 자연을 벗 삼아 학문을 구하는 곳”이라는 뜻을 담은 세심대를 앞에 두고 있다. 


 옥산서원은 조선 초기에 지어진 서원에 비해 정형화된 서원의 배치를 이루고 있다. 외삼문(정문)을 통해 서원의 내부로 들어서면 가장 먼저 무변루(누각)가 보이며 그 뒤로 교육공간의 건물인 동재, 서재, 강당이 보인다. 교육공간 뒤로는 제향공간인 사당이 중심축을 따라 배치되어 있다. 옥산서원의 고직사는 교육공간의 우측에 있으며 다른 서원에 비해 큰 규모를 자랑한다.


 옥산서원의 무변루는 병산서원의 만대루와 다르게 구조부재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벽면을 막아놓은 것이 특징이다. 무변루는 양쪽 끝에 툇마루가 있으며 방문객을 위한 2개의 방이 있다. 외삼문에서 본 무변루는 모두 막혀있지만, 강당에서 바라본 무변루는 개방되어 내부공간을 강조하고 있다. 



결론

 이처럼 서원은 각각 다양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들의 공통점은 서원 교육의 주된 내용인 성리학을 바탕으로 하여 서원 건축에 적용하였다는 것이다.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가진 입지에 있는 서원은 정형화된 공간을 가지기도 하지만 지형과 지역에 따라 다른 배치를 통해서 서원의 특징을 보여주며 한국 교육기관의 건축양식을 잘 보여준다. 또한 서원은 단순히 교육과 제향의 역할만 한 것이 아니라 성리학을 통해 사회와 문화를 발전시키며 국가발전에 크게 기여를 했다. 현재에도 우리 사회는 학교라는 교육기관을 통해 국가발전을 위한 발판을 마련하고 있다. 과거의 서원은 정치적인 수단으로 사용되면서 잘못된 길을 가기도 했다. 우리는 이러한 잘못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올바른 교육환경을 만들어나가야 한다.



참고문헌

네이버지식백과. 

이광우. (2012). 서원연합회: 한국의 9대서원. 소수서원

이병훈. (2012). 서원연합회: 한국의 9대서원. 옥산서원

문화재청국가문화유산포털: 소수서원

문화재청국가문화유산포털: 병산서원

김창현. (연도미상). 한국문화원연합회: 병산서원 만대루와 자웅을 겨루는, 경주 옥산서원 무변루

이기석. (2021). 「조선시대 서원건축의 공간 분석 연구 - 도산서원과 병산서원의 비교를 중심으로」


도판목록

사진제공 - 1 ~ 14 홍세준


  


게재 : Vol.16 건축과 시간, 2021년 가을

작성 : 프로잡담러 E | 홍세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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