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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y Nagrom Nov 25. 2022

영포자가 미국에서 살아남기 ①

헬로 아임 파인 땡큐 앤 유?

지난 2018년 나는 우리나라에서 미국으로 넘어갔다.


물론 지금도 영어를 못한다.

코로나 시국 이후 난 미국에서의 생활을 접고 우리나라에 다시 돌아왔다.

물론 코로나 사태 직후 나는 약 1년 가까이 있었지만,

숨만 쉬어도 들어가는 고정비용과 우리나라와 지인들에 대한 그리움이 한가득이 있었기에 우리나라로 다시 복귀했다.


사실 당시 상대적으로 어린 나이에 미국에서 혼자 생활했고,

집주인으로부터 받는 스트레스, 영어, 환경 등 정말로 많은 것들이 내게는 큰 벽이었다.

이제와 말할 수 있지만, 코로나 시국이 나에겐 득과 실이 많았다.


먼저, 득으로는 그렇게 그리웠던 우리나라에 왔다는 것이다.

실을 따지자면 모두가 똑같겠지만 방콕으로 건강과 영어를 잃었다.


사실 잃은 것이 너무나도 많지만 그래도 나에겐 우리나라가 참 좋다.

건강으론 난 소위 말하는 확찐자가 됐다. 코로나 이전과 비교하면 총 15kg 가량의 살이 쪘다.

나는 밤에 노래 들으면서 무작정 걷기가 취미다. 물론 러닝머신 같은 것을 이용할 수는 있지만,

밤공기를 마시면서 밖에 나가서 걷는 것이 개인적으로는 정말로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밖에 나가서 걷게 된다면 일단 내가 나가서 걸은 거리만큼은 최소한 다시 돌아와야 하기 때문에 반강제적으로 운동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에 더해서 영어를 잃었다는 표현이 무엇일까?

음... 아마도 대면 수업에서 Zoom으로 전면 비대면 수업으로 바뀌었기 때문에 기껏 간 미국에서 집에서만 처박혀서 수업을 들었다. 자연스레 만나는 사람들은 줄었고 혼자서 YouTube, Netflix 등 우리나라의 컨텐츠를 보면서 시간을 소모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물론 이때는 단순히 재미만 추구했기 때문에 이 행동이 나중에 얼마나 큰 나비효과가 될지는 인지하지 못했다.


나비효과라니? 수업을 듣다 보면 자연스럽게 과제가 주어지기 마련이다. 교수님이 내주신 에세이는 일단 뒤로 미뤄둔채로 드라마, 영화를 몰아봤다. 어느덧 과제 마감이 하루도 채 남지 않았을 때 정신을 차리고 벼락치기를 했다. 나는 MBTI가 INFP라서 그런가? 너무 모험을 즐긴 것 같다. 하지만 장점을 따지자면 너무 벼랑 끝에 몰려서 좋은 아이디어들이 샘솟는 것?이 유일한 장점이었던 것 같다.


진정한 나비효과는 한순간 느껴졌다. 에세이도 잘 안 쓰던 기간이 있었는데, 그 기간이 지나고 에세이를 쓰려고 하니 표현들이 생각이 나지 않았다. 평소에 잘만 쓰던 표현들이었고 먼저 우리말로 생각하고 바꾸더라도 충분히 영어로 바꿀 수 있었던 난도였지만 한순간 그것이 안됐다. 그때 정말로 크게 흔히 말하는 현자 타임이 찾아왔다.


집에 박혀 있기도 여러 달이 지나고 점점 내 마음은 무너져 내렸다. 혼자 버티기에는 수많은 것들이 나에게 있었고, 그것들은 실로 나를 무너지게 만들었고 도망치게 만들었다. 점점 더 하기 싫어지고 자신감도 없어지고 내가 무엇을 하는지 조차도 모르겠었다.


코로나 때문에 일도 하지 못해 시간이 갈수록 통장은 텅장이 되고 있었다. 서류에 문제가 있어서 공기관에서 그것을 처리하는데 시간이 너무나도 많이 소요됐다. 평상시 같으면 길어야 1-2 달이면 끝날 문제가 5-6개월 만에 됐다. 기다림의 연속 속에서 너무나도 많이 무너졌지만 그래도 지금이라도 처리된 것이 어디인가 싶어 승인이 됐다는 이메일을 받자마자 한국행 비행기를 바로 예매했다.


LAX 공항에 도착하니 이전과는 사뭇 분위기가 많이 달랐다. 지인을 데려다주러 몇 개월 전에 들렸지만 그때와 똑같은 환경이었다. 다만 다른 점이 있었다면 과학자분들이나 입을법한 그 하얀색 방역복을 입은 사람은 없었고 팬데믹 초반과 같이 본국으로 급히 출국하는 사람들도 적었다.


짐을 어찌나 많이도 잘 꾸렸는지 수하물 캐리어 2개를 딱 23.0kg과 기내 수하물을 10kg에 정확히 꽉꽉 채웠다. 사실 기내용은 무게를 잴지는 몰랐는데 갑자기 카운터에 계신 항공사 직원분이 무게를 재야한다고하셔서 내심 놀라긴 했었다.


그렇게 무사히 2020년 1월 15일 고운 정 미운 정이 들었던 미국을 떠나게 됐다. 약 12시간의 비행기에서 눕코노미를 즐기고 1월 17일 그리웠던 우리나라를 도착했다. 당시 너무 추웠던 것이 기억이 난다. 약 하루 만에 나에게는 일교차가 40도가 차이가 났으니 잊어버릴 수가 없기는 하다. 내가 미국에서 떠나던 날의 최고기온은 33도였고 서울에 도착했을 때는 -7도였으니.


PCR 음성 확인서를 제출하고 여러 가지 방역 절차를 끝내고 방역 택시, 자가, 방역 리무진 등 선택지가 있었다. 하지만 나는 짐도 꽤나 많았고 우리나라에선 면허도 없고 국제면허도 안 해와서 택시를 선택했다. 지역별로 정해진 금액을 내야 했고 나는 9만 원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택시를 탔다. 다행히 택시기사님께서 친절하신 분이었어서 집에 도착해서 내 짐을 내리고 바로 보건소까지 데려다주셨다. 그래서 흔쾌히 팁까지 10만 원을 결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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