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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록친구리니 May 13. 2024

노란 비닐봉지 안에 담긴 사랑


새벽에 낚시를 간 남편 덕분에 늦은 시간까지 푹 잤다. 느지막이 눈을 떠 맞이하는 혼자만의 주말이란, 어색하면서도 좋은 점이 몇 가지 있다. 먼저 눈뜨자마자 뭔가를 먹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다. 남편의 배꼽시계는 아주 정확해서 삼시 세끼를 제 때 챙겨 먹어야 한다. (물론 제때 챙겨주는 아내는 아니다) 식사 시간에 마주 앉아 소소한 대화 나누기를 좋아하는 남편과, 5분이라도 더 자고 싶은 나는 주말마다 이 문제로 토닥거린다. 오늘은 마음 편히 아침을 걸러도 괜찮은 날이란 말이지. (야호!)


두 번째는 조용히 멍 때릴 수 있는 시간이 확보된다는 거다. 말도 총량의 법칙이 있는 건지 극I 성향의 남편은 밖에서 말수가 없는 대신 집에선 수다쟁이가 된다. 반대로 밖에서 대화 나누는 걸 좋아하는 나는 집에 오면 조용해진다. 주로 남편이 말하고 나는 듣는 편인데 남편의 이야기는 늘 맥락 없이 웃기는 편이라 방어를 잘 해야 한다. 끝도 없이 대화를 하게 될 수도 있기 때문에. 그러나 오늘은 피곤한 나에게 말을 거는 남편이 없으니 소파에 누워 천장을 한참 바라봐도 괜찮은 날인 것이다. (야호!) 


소파와 물아일체 된 지 두 시간쯤 지났을까. 남편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오빠 10분 있으면 도착해요. 맛있는 거 사서 가는 중이니까 조금만 기다리고 있어 봐요." (문장으로 보니 굉장히 다정해 보이는데 남편의 말투는 장난끼가 200% 섞인 말투임을 감안해 주시길..) 보통 낚시를 가면 저녁 7-8시 정도나 되야 도착하는 편인데 세 시간이나 일찍 도착할 거라는 남편의 전화에 아쉬운 마음이 살짝 들었지만, 아침을 걸러 조금 배가 고픈 상태였던지라 뭘 사 왔을지 내심 기대가 되기도 했다. 



궁금함은 30초 만에 풀렸다. 오늘의 메뉴 힌트는 이미 카톡 창에 와있었던 것. 설거지하느라 못 본 카톡엔 오징어 회를 썰고 계신 어머님의 사진, 오징어 회가 신선하다는 이야기부터 또 사갈 건 없냐는 질문까지 소파 멍 때리느라 폰과 내외하고 있는 아내에게 보낸 남편의 사랑이 담겨 있었다. 신혼 3년 차까지 그의 사랑의 언어를 알아차리지 못해 오랜 시간 오해했던 순간이 떠오르며 피식 웃음이 났다. 


남편은 회식이나 지인을 만나 맛있는 걸 먹는 날이면 술에 한껏 취한 상태에서도 가장 먼저 하는 말이 있다. "오빠 혼자 맛있는 거 먹어서 미안해요." 전화를 걸어올 때면 무조건 첫 마디는 "밥 챙겨 먹어야지요."다. 밥으로 시작해서 밥으로 끝나는 사람. '사랑해'라는 말이 그렇게 어렵냐며 서운함을 온몸으로 표현하던 내 곁에서 그는 8년째 밥 얘기로 나에게 사랑을 말하는 중이다. 


10분이 지나 남편이 도착했다. 현관문이 열리고 바닷바람에 꼬질꼬질해진 남편의 모습에 웃음이 나기도 전에 투박한 손에 들려있는 노란 비닐 봉지가 보였다. '오늘 그의 사랑은 저 노란 봉지 안에 담겨 있구나.' 소파에서 얼른 일어나 남편의 사랑을 건네받았다. 식어도 맛있을 거라는 아주머니 말씀에 사 올까 말까 고민하다가 사 왔다는 튀김과 오징어 순대를 꺼내는데 사랑을 꺼내 담는 기분이 들어 자꾸만 웃음이 났다. 음식은 식었지만 남편의 사랑은 여전히 따뜻함을 확인한 날이랄까. 


매일 부지런히 사랑을 전하는 나의 그에게, 나도 글로 사랑을 전해 본다. 


"오빠, 오늘 저녁 정말 맛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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