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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은별 Apr 29. 2022

소설 <들개>에 밑줄 그은 문장

이외수 작가님의 영면을 기원하며

며칠 전 이외수 작가님이 별세했다.



작가님과 나는 작은 인연이 있다. 말 안 듣는 중학생이었을 무렵 그의 베스트셀러 중 한 권인 <하악하악>을 펴냈던 출판사에서 기획한 작가와의 만남에 응모 댓글을 남긴 것이다. 이외수를 만나고 싶은 이유를 댓글로 남기면 그중 몇을 추첨해 화천에 있는 그의 문학관이었던 감성마을에 갈 기회를 준다는 것이 요지였다. 학업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허구한 날 소설만 읽던 나는 간절한 마음을 담아 "제발 학교로부터 벗어날 기회를 주세요"라고 남겼다.



1988년, 그는 경동시장과 종로 5가 부근의 한약방에서 대마초를 구해 피우다 적발된 사실이 있다. 그뿐만 아니라 그에게 문학을 배우고자 찾아온 제자들과 여관을 드나들며 마약을 했다는 불명예를 안기도 했다. 아버지는 그를 둘러싼 일련의 사건으로 하여금 화천에 가겠다는 어머니와 내게 심통을 부렸다. 가정 내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던 아버지의 말을 거역한 횟수가 손에 꼽을 시절이었다. 무슨 생각이었는지 이외수를 만나야겠다는 생각으로 아버지의 푸르뎅뎅한 표정도 뒤로하고 화천으로 떠났다. 산과 계곡이 품은 화천은 정말 아름다웠다. 그의 문하생이 기거하며 글을 쓰던 별채는 목재로 짓고 기와로 지붕을 만들어 한국의 정서가 그대로 배어났다. 이외수의 아내였던 전영자는 사람 좋은 미소로 손님을 반겼다. "이곳의 공기가 몹시 좋으니 숨을 많이 들이마시다 가셔라"는 말도 전했다.



그날의 행사가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띄엄띄엄 기억난다. 작가에게 직접 질문할 수 있는 시간에 한 독자가 손을 들고 질문했다. "선생님께서 쓰신 에세이의 분량이 짧아 아쉬워요. 여운을 보다 길게 즐길 방법이 없을까요?" 그날 나는 이외수와 관련한 즉석 퀴즈를 맞혀 그의 전집을 선물 받는 행운의 주인공이었다. 사회자가 "정답입니다" 외치자마자 무대로 와다다 달려가 이외수를 껴안으며 감사 인사를 표했다. 순백의 상하의를 맞춰 입고 회백색 머리를 한쪽으로 길게 땋아내린 그가 너무 말라 부서질까 무서웠다.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방송국에서 내게 간단한 인터뷰를 요청하기도 했다. 며칠 지나 이때의 방송을 본 학교 선생님들이 "쟤는 이외수를 만나고 온 애"라며 나를 띄워줬다. 공부는 안 하고 딴 짓만 하던 내가 이외수 작가 덕분에 "모르긴 몰라도 문학적 재능은 있는 애"로 여겨졌던 모양이다.



사람들이 동그랗게 모여앉은 감성마을에 모닥불을 하나둘 피우자 날이 저물었다. 어두운 산속에서는 새소리와 개구리 소리가 또렷이 들렸다. 사람들도 서로의 곁에 가까이 가 속삭이며 말했다. 화천에서 긴 하루를 보내고 돌아오는 길에 이날의 기억이 금세 사라질까 두려웠다. 언젠가 이외수 작가를 다시 만나면 친한 척이라도 해야겠다 생각했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이외수 전집이 집으로 배송되어 오기 전까지 나는 그의 에세이집 한 권만을 읽은 상태였다. 열 권이 넘는 그의 책 중 무엇부터 읽을까 뒤적이다 <들개>를 골랐다. 개구멍 하나가 간신히 뚫린 다 허물어진 집에서 아흔아홉 마리의 들개 그림을 그리는 남성과 맥줏집에서 서빙을 하던 여성의 관계를 묘사한 이 책의 강렬함이 아직도 느껴지는 듯하다. 버스정류장에 서 있는 여성에게 말을 건 남성은 다자이 오사무 <인간실격>에서 나올 법한 말장난을 한다. "저는 한자어를 잘못 읽었을 때 나타나는 현상을 의도적으로 사용해 보기 시작했습니다. 부지불식不知不識을 불지불식으로 말해 버리는 것이 그 하나의 예입니다. (중략) 저는 '악'으로 사용해야 할 경우는 '오'로, '오'로 사용해야 할 경우는 '악'으로 사용해 버립니다. 악랄한 자식,이라고 남을 비방해야 할 때는 오랄한 자식,이라고 말해 버리는 것입니다."



이외수의 번뜩이는 재치가 생생히 느껴지는 책의 처음 몇 장을 읽고 나는 금세 <들개>에 매료되었다. 마치 소설이 나를 빨아들인 것처럼 눈도 몇 번 깜빡이지 않은 채 주인공이 나누는 대화에 몰입했다. 소설 속 남녀는 야생에서 먹이를 찾아 으르렁거리던 들개 두 마리가 짝을 알아보고 부둥켜안는 것처럼 사랑에 빠진다. 문명에서 벗어나 자신들이 구획한 공간에서 예술에 한 몸 바친 그들을 보며 히피의 삶을 동경한 적도 있다. 소설을 다 읽고 난 후 심장이 요동칠 정도의 여운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이후 나는 이외수의 문학성을 폄하하는 듯한 세간의 반응을 안타깝게 생각하게 되었다. 과오를 포함한 그의 행적과 별개로 그가 가진 재능은 말 그대로 작가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몇 년 전 그를 장충동 신라 호텔의 로비에서 만난 적 있다.



언젠가 그를 다시 만나면 화천에 갔던 이야기를 꺼내며 친한 척해야겠다던 소원을 이룬 날이었다. 수년 전과 마찬가지로 위아래 깨끗한 흰색 옷을 차려 입고 동행인 두 명과 함께 있는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는 낯선 여자가 스스럼없이 인사를 건넨다는 것이 재미있다는 듯 밝은 표정으로 화답했다. 이윽고 내가 화천에 다녀왔던 이야기를 하자 기억은 나지 않지만 반갑다며 즐거워했다. 앞머리를 자른 데다 뿔테안경을 꼈던 중학생이었던 내가 루이비통 벨트를 한 길쭉한 아가씨가 되어 나타났으니 기억날 리 만무했다. 작가님 덕분에 문제아였던 내가 글에 관심깨나 있는 애처럼 보여 기분이 좋았다고, <들개>를 읽고 심장이 터질 듯한 짜릿함을 느꼈다고 말했다면 좋았을걸. 괜히 부끄러워 다음에 또 뵙겠다는 인사를 남기고 돌아섰다. 그날은 내가 시나리오를 작성 중이었던 웹드라마에 출연할 배우와의 미팅이 있던 날이었다. 파격적이고 과감한 대사로 승부수를 띄웠던 그 작품의 영향도 어쩌면 이외수에 있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언젠가 그와 관련한 글을 꼭 쓰고 싶다고 생각했다.

술과 담배, 사랑과 영혼을 작품에 담았던 그의 영면을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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