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록 실크 드레스는 세탁기 대신 세탁소에 맡겨야겠지만
버스에서 내리자 거짓말처럼 폭우였다. 앞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의 빗줄기였다. 우산이 없는 나와 다른 탑승객 한 명은 급한 대로 정류장에 몸을 숨겼다. 이내 다른 버스가 물살 가르며 정차하더니 온몸을 적셨다. 함께 서 있던 사람은 비명을 지르며 의자 위에 올라섰다. 편의점에 가기 위해선 횡단보도를 건너야 했다. 빗방울이 얼굴까지 흘러 화장이 다 번진 채로 우산을 샀다. 비를 맞아 달라붙은 실크 드레스의 매무새를 가다듬을 겨를도 없었다.
생각해 보니 비 맞아 흠뻑 젖어본 적이 없었다. 비 내리는 날이 싫었다. 물웅덩이를 피해 신중히 발을 내디뎌 봤자 발까지 축축이 젖게 만드는 비를 원망했다. 게다가 비 오는 날이면 피어오르는 비릿한 냄새는 우울에 빠지기 좋았다. 중학생 무렵. 클래식 피아노를 배우다 변칙이 자유로운 재즈에 흥미가 생겼다. 새로 다니게 된 실용음악 학원의 원장은 독특한 구석이 있었다. 그는 비 오는 날이면 학교에 가지 않았던 대학 시절의 별명이 "Rainy Guy"였다고 했다. 학원에 갈 때면 언제나 눈을 감고 음악 감상 중이었던 그의 짙은 색 뿔테 안경과 긴 머리카락이 떠오른다.
반면 비를 좋아했던 사람도 있다. 명문 대학 다니며 옥탑방에 자취했던 전 남자 친구는 폭우 내리던 날 속옷 하나만 걸친 채 뒷산에 오른 적 있다고 말했다. 인적 드문 산이었지만 누군가 마주칠 것을 대비해 주먹 속에 신분증 하나를 꼭 쥐고 있었다고. 마침내 중턱에 올라 짐승처럼 포효했던 그날의 기억이 생생하다고. 오늘 나는 그를 따라 해 본 것인지 모른다. "다 젖어버리자" 생각하고 우산 없이 걸으니 외려 웃음이 나왔다. 새로 산 지 얼마 안 된 구두에 출처 알 수 없는 얼룩이 져 속상하던 참이었다. 물이 뚝뚝 흐르는 채 현관에 서 구두를 보니 멀끔히 지워져 있었다.
우산이 없을 때면 그냥 젖어버리자.
비록 실크 드레스는 세탁기 대신 세탁소에 맡겨야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