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언가 놓치며 살고 있는 것 같다
새로운 직장은 오랜 역사를 지닌 가게가 많은 동네에 있다. 들은 바에 의하면 오십여 년쯤 된 가게 여러 곳의 주인이 단 한 명이라고 했다. 잔디밭 위에서 흐드러지게 낮잠을 자는 고양이들을 마주친다. 정장을 입고 삼삼오오 모여 다니는 사람들은 탁자를 나누어 앉게 될 것이다. 연극적으로 손님을 환대하는 종업원이 있는 중국집에 들어가 그날의 할인 메뉴를 먹는다. 커피를 사서 자리로 돌아오는 길, 무언가 놓치며 살고 있는 것 같다.
을지로를 걷는다. 친구가 추천한 가게에서 도루묵 구이와 맥주를 들이켠다. 근처에는 골뱅이와 노가리 등 옛 세대의 향수를 자극하는 음식이 많다. 나 역시 한바탕 떠들썩 해지고 싶은 심정으로 식당을 옮겨 다니다 일찍이 취해 아득해진다. 전혜린의 수필집 <목마른 계절>이 생각나 꺼내 읽는다. 그녀가 독일에 도착해 목격한 정신과 영혼이 자유로운 사람들에 대한 내용을 읽으면, 이 시대에도 그런 도시가 존재하고 있을지 궁금해진다.
전혜린은 가난한 와중에도 책을 수집해 끝없이 읽는 다독가였다. 또한 계속해서 삶의 의미를 묻는 사색가기도 했다. 그녀는 학창 시절 각별하게 교우했던 주희라는 친구에 대한 애착을 드러낸다. 나 역시 마음이 궁핍했을 당시 읽었던 책들, 들었던 음악들, 걸었던 거리들, 끊임없이 마셨던 술과 함께 붙어 다녔던 한 명의 친구를 떠올린다. 모든 기억은 윤색되어 부각하고 싶은 장면만을 머릿속에 남긴다. 하지만 미화된 기억 속에도 한 가지 사실이 있다. 그때 친구와 나는 초라한 정신을 가졌을지언정 언제나 영혼은 순수했다. 현실에 만족하지 못하면 도망갈 채비를 하고, 도망간 곳에서 새로운 삶을 꿈꾸는 나의 모습을 바라보아야 하는 것이 괴롭다. 전혜린 역시 문학으로, 다른 예술 작품으로 계속해서 도망가다 더는 도망칠 곳이 없다는 생각 때문에 자신의 목숨을 꺼뜨려 버린 걸까? 그토록 진지하게 삶의 의미를 묻던 그녀가 스스로 감옥을 만든 이유가 무엇일까?
물음 사이 날 저물고 밤은 온다. 문득 루이제 린저의 <삶의 한가운데> 문장 중 하나를 떠올린다.
생에 대해 아무것도 묻지 않는 자만이, 생에 대하여 무언가를 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