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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은별 Feb 15. 2022

태국의 작은 섬 코팡안에서

언제가 될지 모르는 다음 휴가

생리가 찾아온 줄도 모르고 일에 몰입했다. 내일까지 마감해야 하는 기사 두 편이 남았지만 몸이 꿈쩍하지 않는다. 간신히 걸음 떼 지하철역 계단 내려가며 쓰러질 것 같다고 생각했다. 언젠가 죽는 꿈을 꿨다. 흰 공간에 서 있던 나는 빛에 싸여 꺼져가는 촛불처럼 의식이 흐릿해짐을 느꼈다. 신도, 사랑하는 사람도 없이 홀로 맞는 죽음이었다. 굉음 내며 달리던 열차가 도착해 문을 열었다. 얼굴 구긴 사람들과 몸 부딪히며 눈 감고 지난 꿈을 생각했다. 잠들기 전처럼 온몸 힘 빠지고 편안했다.



겨울이 되자마자 어김없이 태국의 작은 섬 코팡안으로 떠나고 싶다. 각국의 젊은이가 해변에 모여 동틀 때까지 춤추고 음악 즐기는 풀문파티로 유명한 곳이지만 보다 그리운 것은 야자수 드리운 창문이 있던 숙소다. 영국인과 결혼한 한국 여자가 운영하는 호스텔이었던 그곳엔 웃통 벗고 배낭 멘 채 오토바이 탄 청년이 많았다. 나는 오랜 여행으로 꾀죄죄한 옷을 켜켜이 쌓아 동네 허름한 세탁소에 맡기고 슬리퍼 끌며 돌아다녔다. 저녁에는 맨발로 주문받는 어린 소녀가 있는 식당에서 밥 먹고 배앓이를 했다. 어쩌면 닦지 않은 양동이에 얼음 넣어 만든 칵테일 때문일지도 모른다. 식은땀으로 흠뻑 젖은 침대 위에서 여행 온 나라에서의 죽음을 떠올렸다. 전날 짧은 옷 입고 파티에 가 신나게 춤췄다는 소문이 돌아 존엄한 죽음이 되지 못할까 봐 두려웠다.



약국에 도착하자 한 손으로 배 짚은 여행객이 줄 서 있었다. 약 받아 계산하고 물과 함께 들이키니 금세 나은 듯했다. 방콕으로 가는 페리를 예약해 뒀기에 짐을 챙겨 급히 숙소를 떠났다. 맑은 바닷물이 파도와 함께 출렁였다. 몇 달 후 찾아본 숙소 블로그에는 '호스텔 운영하실 분 찾습니다'라는 게시글이 있었다. 코팡안에서 허리까지 자란 검은 머리를 땋은 또 다른 한국인과 만난 기억이 났다. 그녀도 식당의 소녀처럼 맨발이었다. 웃을 때마다 뿌리 검은 치아가 드러나던 그녀는 밤마다 테크노 클럽에 사람들이 모인다고 했다. 나를 초대하는 그녀에게 진한 약초 냄새가 났다. 아침이면 익힌 달걀을 손님 그릇 위에 내가는 상상을 멈췄다.



두툼한 외투 입었지만 오한이 든다. 문득 많은 여성이 달마다 피 흘리는 몸으로 산다는 사실이 놀랍다. 태국에 간 것이 벌써 4년 전이다. 4년 전에는 이런 일이 벌어졌다. 내키면 항공권 끊어 다른 나라 가 묘한 인상 주는 사람을 만나고, 술 마시고, 때로 죽음을 생각하다 우스꽝스러워 관두는……. 이보다 놀랍지는 않을 것이다. 어린 내가 좋아했던 일중 하나는 케이크에 촛불 꽂아 소원 빌고 바람 부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생일 아닌 날에도 종종 네모난 상자 들고 퇴근했다. 감정이 손바닥 뒤집듯 했던 아버지가 다정히 노래 부르고 손뼉 치며 나를 축하했다. 가늘고 긴 선처럼 흐르던 하루가 특별해졌다.



마음과 몸이 말하는 것을 감춘 채 사는 사람의 고통이 뼈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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