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아를 줄이고 주변을 관찰하기
집에 도착하면 자정이 가깝다. 기사 마감이 얼마 남지 않아 회사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는 중이다. 의자에 앉은 내 입술은 점차 굳고 표정도 일그러진다. 지나치게 술 마신 다음 날처럼 몸의 모든 기능이 멎어 꿈쩍하지 않는 상태 같다. 키보드에서 손을 떼고 시야를 멀리 두면 잎이 우거진 진녹색 나무가 보인다. 눈이 천천히 내리는 날이면 마치 영화를 보는 듯 아름답다. 언젠가 서점에서 본 이영광 시인의 산문집 제목이 떠오른다. <나는 지구에 돈 벌러 오지 않았다> 당연한 말이라며 지나쳤던 그 문장이 며칠 내내 맴돈다.
며칠 전에는 인왕산이 품은 동네인 평창동에 다녀왔다. 아늑하고 조용한 구석을 의미하는 영어 단어인 누크nook를 이름 삼은 갤러리에서 개최한 사진전을 취재하기 위해서였다. 중간 일정이 비어 동네를 조금 걷기로 했다. 칼바람이 휘몰아쳐 피부를 에는 듯한 날씨였지만 바깥공기를 느낀다는 사실만으로 좋았다. 선거 벽보를 발견하곤 한 명 한 명의 이야기를 유심히 읽었다. 참전 용사로 조국을 위해 모든 걸 바칠 각오가 되어 있다는 사람, 다양한 지원금으로 생활 형편을 낫게 해 주겠다는 사람, 경제강국 도약을 위한 준비가 되어 있다는 사람 등 그곳에는 다양한 언어가 있었다. 어느덧 벽보를 보는 사람이 네댓 명쯤 모였다.
띄엄띄엄 있는 가게 몇을 지나 카페 하나를 발견했다. 창가에는 나와 비슷한 나이로 보이는 안경 쓴 남성과 중년 여성이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빈자리가 없어 그들 근처에 앉은 나는 여러 번 읽어 바삭바삭한 스피노자의 해설서를 폈다. 책의 내용보다 구미를 당기는 것은 아까 말한 둘의 이야기였다. "선생님, 저는 어떻게 해야 하지요?" 단정히 목도리 두른 남성이 흘러내린 안경을 올리고 답변을 시작했다. 그의 유려한 손짓이 마치 안무 같았다. 그는 여성의 귓가에 속삭이듯 말했다가 멀찍이 몸을 떨어뜨리고 단호한 어투로 말하는 것을 반복했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엿듣는 것이 부끄러워 집중을 하지 않았던 탓일까. 그들이 나는 말은 마치 동굴 속에서 뒤엉킨 여러 명의 소음 같아 알아들은 것이 몇 없다. 다만 여성이 종이를 꺼내 열심히 필기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전시는 내가 졸업한 대학의 교수의 그의 제자가 합심하여 전개하는 일명 '사제전'이었다. 인터뷰를 마치고 나도 그들임의 동문을 밝히니 고요한 갤러리에 웃음이 퍼졌다. 늦은 시간이었지만 회사로 돌아와 글을 마저 써야 했다. 요즘은 몸을 씻다가도 과거에 스치듯 들었던 말이 떠오른다. 내가 떠나보낸 사람 때문에 괴로 하던 나를 지켜보던 누군가 "존경하는 선생님께서 세상을 느끼기 위해선 자아의 면적을 좁혀야 한다고 하셨어"라고 말했다. 그때는 나에 심취해 있었기에 그 뜻을 짐작할 수 없었다. 그런데 이제 그 뜻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알 것 같다. 내가 만난 어느 아트디렉터는 또 다른 인터뷰에서 "자신에게 너무 집중하면 행복하지 않은 것 같아요. 외롭거나 힘들 때는 사람 관찰하는 것을 좋아해요. 나 아닌 다른 것에 눈을 돌리며 나를 잊으며 편안해지는 것 같아요"라고 말했다.
지금 나는 비대한 자아를 줄이고자 주변의 풍경과 사람을 관찰하고 있는지 모른다.